세상이야기

나루토 포로수용소에 울려 퍼진 환희의 송가

도보사랑 2018. 12. 25. 16:34

나루토(県鳴門) 포로수용소에 울려 퍼진 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ude)

 

1918년 6월1일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 선율이 지금의 시코쿠 토쿠시마(徳島)현 나루토(県鳴門)시에 있는 반도(板東ばんどう)포로수용소에 울려 퍼졌다. 독일병사들이 일본에서 최초로 전곡을 연주했으니 아시아 초연(初演)인 셈이다.

 

일본이 독일과 전쟁을 했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이 독일의 군사시스템을 받아들여 참모본부체제를 구축했고 제2차 세계 대전당시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당시에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은 상태여서 독일의 적국이었다. 교향곡을 연주한 독일병사들은 영국의 요청에 따라 일본이 독일의 거점이었던 청나라 칭다오를 공략해 포로로 잡힌 이들이었다. 1914년 전투에 패한 독일군 6,400명이 포로로 일본의 6개 수용소에 분산 수용됐는데 그 수용소 가운데 하나가 토쿠시마현 나루토의 반도수용소다, 여기에는 약 1000명이 수용됐다.

 

한 무리의 독일병사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수용소에서는 프로이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먼저 수용돼 있었던 독일병사들이 이들을 환영했다. 포로수용소장 마쯔에토요히사(松江豊寿)의 배려였다. 그는 독일포로들을 오히려 격려하고 위로했다.

 

“제군들은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고립무원의 칭다오의 절망적 상황에서도 조국애에 불타 끝까지 용감하게 싸운 용사였다. 다만 칼이 부러지고 화살이 떨어진 결과 일본군에 항복한 것이다.” (諸子は祖国を遠く離れた孤立無援の青島において、絶望的な状況の中にありながら、祖国愛に燃え最後まで勇戦敢闘した勇士であった.しかし刀折れ矢尽き果てて日本軍に降ったのである.)

 

마쯔에토요히사는 아이즈 특유의 무사의 정을 간직한 인물이었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아이즈번이 사쯔마 쬬슈연합의 신정부군에 당한 서러움과 치욕의 역사를 듣고 자랐다. 아이즈번의 번주 마쯔다이라카타모리(松平容保まつだいら かたもり)는 공순(恭順)의 방침을 내보였지만, 신정부군은 아이즈와카마쯔의 쯔루가성을 무자비하게 공략했고 아이즈번은 무사들은 물론이고 여성과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나서서 처절하게 농성전을 벌였다. 아이즈는 멸번의 치욕을 겪었고 번사들은 아오모리나 홋카이도 같은 오지에 개척을 명분으로 한 사실상의 유배 길에 오르는 치욕을 당했다.

패자에 대한 가혹한 처사는 원한만 남길 뿐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아이즈출신의 마쯔에는 쬬슈와 사쯔마출신이 장악한 육군 내에서 입지가 좁았고 스스로 패자의 아픔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독일포로들에게 측은지심으로 대한 것이다.

 

수용소에서 마쯔에는 포로에 대한 폭력을 금지했고 늘 인도적인 대우를 하도록 했다. 독일 포로들이 매일 갓 구운 빵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가 하면 맥주와 담배도 허용했다. 새로 포로가 들어오면 환영회를 열고 취침시간을 두 시간 늦춰 그들만의 회식을 갖도록 배려했다.

 

또 독일인 포로들이 저마다 기술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수용소내에 가구제조, 금속가공. 이발, 아이스크림, 제본, 음악레슨, 베이커리, 육가공 , 도서관, 인쇄소를 허용한다.

 

포로들은 현지주민과도 유대를 맺게 되면서 수용소는 일종의 일독문화교류회관의 양상을 띤다. 포로들을 위한 일본어교실도 생기고 포로들은 주민들에게 악기연주나 스포츠도 지도한다.

 

포로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것 아니냐는 토쿄의 육군성에 대해 마쯔에토요히사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것은 포로수용소이지 형무소가 아니라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포로에 대해 인도적인 마쯔에에 감격한 독일포로들은 부족하나마 컨서트를 준비한다. 여성이 없어 소프라노 부분은 모두 남성으로 대체하고 부족한 악기는 오르간으로 충당해 베토벤 9번 교향곡을 공연한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독일의 패전이 확정되면서 반도포로수용소의 독일 포로들은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모두 석방된다.

 

독일포로들과의 작별이 임박하자 마쯔에토요히사는 다시 한번 그들의 심금을 울린다. “패전국의 국민생활은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비참한 것이다. 제군들의 어려움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아프다, 역경에도 굴하지 말고 조국부흥에 진력하기를 바란다. 오늘 지금부터 제군들의 외출은 완전한 자유다. 즉 제군들은 자유인이 된 것이다!”

(敗戦国の国民生活は古今東西を問わず惨めなものである. 帰国後の諸君の辛労を思うと、今から胸の痛む思いである. 困難にもめげず、祖国復興に尽力してもらいたい. 本日ただ今より、諸君の外出は全く自由である。すなわち諸君は自由人となったのである!)

 

마쯔에소장과 마을주민들은 독일인 포로들과 선물까지 교환하며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눈다.

이후 독일포로들에게 반도수용소의 기억은 이후로도 오래 남게 돼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관련모임이 열렸으며 일본 나루토에는 1972년에 독일관이 문을 연다.

 

마쯔에토요히사와 독일군포로의 미담은 바루토노라쿠엔(バルトの楽園 Ode an die Freude)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2006년에 상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