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로전쟁의 대전략을 입안한 코다마겐타로
일로(日露)전쟁의 대전략을 입안한 코다마겐타로(児玉源太郎)
일본 메이지 시대의 코다마겐타로(児玉源太郎)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전략가다. 군인으로서 기본인 전술과 전략을 넘어 전쟁양상의 변화와 국제정세까지 꿰뚫어 봤던 인물이다. 코다마겐타로는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郎)의 언덕위의 구름(坂の上の雲)에서도 명장으로 그려지고 있다.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가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도 점령하지 못한 뤼순의 203고지를 단번에 공략한 것으로 묘사되면서 노기는 오랫동안 일본인들에게 우장(愚將)으로 각인됐다. 그러나 전사가들은 코다마겐타로가 뤼순에 도착한지 나흘 만에 203고지가 함락된 것을 코다마의 공으로 돌리는 것은 사실이 아닌 소설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코다마와 노기는 같은 야마구치 현 출신으로 30년 동안 돈독한 사이었다. 육군에서 성장과정은 코다마가 하사관인 군조부터 출발해 다소 늦은 편이었다. 군사적 재능에 있어서는 코다마가 노기보다는 몇 수 위였다, 코다마가 연대장 시절 노기와 대항훈련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기습작전으로 노기를 크게 이겼다.
코다마는 노기보다 실력은 뛰어났지만 자신이 갖지 못한 노기 특유의 성품을 평생 존경했다. 코다마보다 세 살 위인 노기는 성격이 근엄했고 군인으로서의 사생관이 투철했다. 젊었던 시절 사이고다카모리가 일으킨 세이난전쟁에서 연대기를 빼앗긴 것을 자책한 노기마레스케가 할복하려하자 코다마는 곁에서 이를 말렸다. 또 뤼순요새 공방전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군부와 일반국민들 사이에서 노기에 대한 불신과 비난이 고조됐을 때 그가 아니면 뤼순을 함락할수 없다고 극력 변호한 이도 코다마였다. 두 사람의 우정은 평생 동안 지속돼 코다마가 먼저 타계하자 노기는 폭우를 맞아가면서 코다마의 운구행렬을 지켰다고 한다.
러시아는 상비군의 규모나 경제력에서 일본을 크게 앞서 있었기 때문에 일로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것으로 예측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독일의 용병가 몰트케의 제자로 일본에 육군대학 교관으로 초빙돼 머물렀던 독일 육군의 클레멘스 메켈(Klemens Meckel)소령은 코다마가 있는 한 일본이 반드시 이길 것으로 예측했다.
일로전쟁이 발발해 코다마겐타로가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은 당시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남겼다. 전쟁을 지휘해야 할 참모본부차장 타무라이요조(田村怡与造)가 파상풍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이 직책을 맡을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당시 타이완총독겸 내무대신이었던 코다마겐타로가 두 계급 강등을 무릅쓰고 참모차장을 맡는다.
총리 물망에도 오르내리던 코다마였지만 신분의 높이보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간다는 소신으로 참모차장직을 맡아 전쟁계획을 입안하고 전쟁이 시작되자 만주군 총사령관인 오오야마이와오(大山巌)수하에서 총참모장으로 전쟁을 지휘한다. 코다마가 두 계급 강등을 선택한데는 평소 자신을 아꼈던 오오야마이와오와의 친분도 있었다.
코다마겐타로는 육군에서 활약했지만 쓰시마 해전에서 도코헤이하치로가 발틱함대를 궤멸시키는데도 큰 공을 세웠다. 그는 하치멘롯피(八面六臂はちめんろっぴ팔면육비 여러 면에서 다재 다능)라는 수식어가 붙는 그야말로 메이지시대의 공명(孔明)이었다.
코다마겐타로는 일로전쟁은 반드시 정보전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고 그의 안목은 해전에서 주효했다. 일찌감치 해저케이블 부설선 오키나와마루(沖縄丸)호를 영국에 발주하고 큐슈남단의 오오스미 반도에서 오키나와의 이시가키섬 그리고 타이완을 잇는 총연장 1,800킬로미터에 이르는 장거리 해저케이블을 1897년 5월에 설치했다. 1906년에는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사세보, 토쿄간의 직통 전신선을 개통했다.
그런가 하면 영일동맹에 따른 군사협력도 착착 진행했다. 황족 고마즈노미야(小松宮こまつのみや)를 순양함에 태워 영국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 보냈으며 영국해군으로부터 신형무전기를 제공받고 이를 토대로 개량형 36식 무선전신기를 완성해 해군의 모든 함정에 설치했다.
일본과 러시아의 해전은 사실상 해제케이블과 무전전신기가 실전에서 사용된 최초의 사례다.쓰시마해전 당시 시나노마루호는 발틱함대를 발견하고 이를 무선전신가로 기함 미카사와 토쿄의 대본영에 바로 전달했다. 1 분당 20여개의 문자에 불과한 한정된 정보량이었지만 도고헤이하치로는 연합함대의 전투력을 한데 모아 로제스트벤스키제독의 발틱함대롤 격파했다.
쓰시마 해전 두달 전 코다마겐타로는 만주군 총참모장으로 봉천대회전에서 러시아에 신승(辛勝)을 거두게 되는데 이 때부터 러시아와의 강화를 준비한다. 러시아에 비해 병력수도 부족한데다 탄약도 모자라 신승이나마 승리했을 때 전쟁을 멈추지 않으면 결국 지게 된다는 치밀한 계산에서였다.
그리고 한번 이기면 계속 이길 것이라 낙관하는 본토의 군부를 설득한다. 여기에 대해 대본녕의 육군은 불만을 나타냈는데 해군대신인 야마모토곤노효에(山本 権兵衛やまもと ごんのひょうえ)가 동의해 가까스로 강화를 모색하게 된다.
당시 코다마겐타로는 이렇게 말헀다. “전쟁을 시작하는 자는 전쟁을 끝내는 것을 생각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은 종전 후엔 이전보다 살기 좋은 환경으로 바꿀 책임이 있다.“
그는 종전 이후의 대전략도 마련했다. 간신히 이기긴 했지만 러시아가 이후에도 틈만 나면 남하를 노릴 것이라는 판단에 남만주만큼은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남만주철도회사를 만든다. 국책회사를 토대로 일본인들을 이주시켜 만주지배권을 굳혀야 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남만주철도의 총재로는 평소 그가 믿고 신뢰했던 고토신페이後藤 新平(ごとう しんぺい)를 추천하고 자신은 그 아래 직책을 맡겠다고 선언한다. 직책의 높낮이 보다 자신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향하겠다는 소신을 다시 한번 주장한 것이었다. 그런데 코다마는일로전쟁을 입안하고 지휘했던 스트레스 때문인지 돌연사하게 되고 고토신페이는 고인의 유지를 받들겠다면서 초대 만철 총재에 취임한다.
시바료타로는 언덕위의 구름(坂の上の雲)에서 일로전쟁에 모든 일본인들이 애국심에 아낌없는 응원을 보낸 것으로 묘사했지만 역사적 사실은 달랐다. 전쟁이 길어지고 사상자가 늘어날수록 군부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특히 강화이후엔 적지 않은 희생을 치르고 러시아로부터 배상금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다는 불만이 히비야폭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시바료타로는 코다마겐타로를 “인사(人事)를 다하고 그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천재형 인간으로 그리고 있는데 일본의 전사가들은 거의 이 시각에 동의한다. 육군 군조에서 대장까지 실력으로 올라간 코다마겐타로는 일로전쟁의 처음과 끝이었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입안, 지휘했으며 이길 수 없었던 전쟁에 승리했을 때 현명하게 강화를 준비한 그는 “불을 붙인 자는 끌 줄 알아야 한다”는 명언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