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굴로 쫓겨난 ‘反혁명’ 아들… 떠날땐 주민들이 60리길 배웅
본보 고기정 특파원, 시진핑 下放생활했던 산시성 량자허 현지 르포
《 중국은 8일 개막한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18차 당대회)’를 통해 10년 만의 지도부 교체에 들어갔다. 앞으로 10년간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한 중국을 이끌어 갈 지도자들이 어떤 인물인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중국 대륙에 떠오르는 새로운 별들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
○ “디댜오(低調·자세를 낮춤) 유지하라고 했다”
시 부주석은 원래 ‘태자당(혁명원로 자제 그룹) 중의 태자당’이었다. 부친 시중쉰(習仲勳·1913∼2002)은 국무원 부총리를 지냈다. 최고위 간부들의 주거지인 베이징(北京) 중난하이(中南海)에 살던 그가 량자허까지 오게 된 건 9세 때인 1962년 아버지가 ‘류즈단(劉志丹)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실각한 것이 계기였다. 산간혁명의 근거지인 시베이(西北)에서 활약하다 전사한 건국 영웅 류즈단의 생애를 다룬 소설이 마오쩌둥(毛澤東)의 심기를 건드렸다. 마오보다 류즈단을 더 치켜세우는 듯한 이 소설 때문에 류즈단의 전우이자 초고를 손봤던 시중쉰마저 반(反)혁명분자로 몰렸다. 반혁명분자의 가족이었던 그는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던 1969년 1월 량자허로 하방(下放)됐다.
당시 량자허 주민은 야오둥(窯洞)으로 불리는 토굴에서 살았다. 부잣집 도련님이던 그는 몸에 이가 옮을까 봐 농민들이 가까이 오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아무 생각 없이 빵을 개에게 던져줬다가 “부르주아 부패분자 시중쉰의 아들이 개에게 (귀한) 빵을 줬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왕(王)모 씨(73)는 “학생 몇 명(12명)이 왔는데 마을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시진핑은 책을 많이 봤고 아는 게 많았지만 일은 잘 못했다”고 회고했다.
농촌 밑바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시진핑은 3개월 만에 베이징으로 도망갔다. 이모부에게서 “민중의 바다로 들어가라. 그게 노동개조를 받고 있는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다”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그는 비로소 그 바다에 몸을 적셨다. 시 부주석은 량자허로 돌아와 벼룩과 거친 음식, 농촌생활, 노동, 사상 등 ‘5대 관문’을 통과하며 농민들과 친숙해졌다.
그가 살던 10m²(약 3평) 남짓한 토굴의 입구는 지금은 일반 집과 마찬가지로 개조돼 관광지처럼 꾸며져 있다. 앞에 작은 매점도 있다. 매점 주인은 “일반인에게 개방은 안 되지만 우리 마을의 자랑거리다”라고 전했다. 토굴뿐 아니라 마을 주변도 새로 도로 공사를 하는 등 시 부주석의 최고지도자 등극을 앞두고 지방정부에서 적잖게 신경을 쓰는 듯했다.
토굴 취재를 마치고 주변을 돌아보던 중 갑자기 경찰차 한 대와 승용차 2대가 다가와 기자를 둘러쌌다. 공안이 끌고 간 곳은 파출소 분소로도 쓰이는 촌민위원회. 시진핑이 21세 때 서기로 근무했던 곳이다. 연행한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고 외신기자가 함부로 취재하면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들은 2시간가량 기자를 억류해 취조한 뒤 풀어줬다.
마을 자율경비대원이라고 밝힌 한 40대 남성은 기자에게 “우리도 시 부주석이 더 높은 자리로 가게 돼 정말 기쁘다. 하지만 위에서 ‘디댜오(低調·자세 낮추기)’를 유지하라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긴장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 오늘의 시진핑을 만든 ‘겸손과 온화’
2007년 10월 시 부주석이 당 상무위원으로 선출됐을 때 홍콩 다궁(大公)보는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디댜오, 핑스(平實·소박하고 수수), 첸허(謙和·겸손하고 온화), 다치(大氣·대범하고 당당)’라는 4단어였다. 이 중 ‘디댜오’와 ‘첸허’는 오늘의 시진핑을 있게 한 핵심 키워드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시 부주석은 량자허에 다시 돌아갔을 때 옌안 사투리부터 익혔다. 촌민과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다. 이곳의 거친 잡곡에도 익숙해졌으며 양말을 직접 짜서 신었다. 서기로 있을 때는 전용 승용차를 배정받았으나 엔진을 빼내 트랙터를 만들어 농사일에 쓰도록 한 일화도 전해진다. 베이징의 귀족 청년이 어느새 농군으로 변한 것이다. 주민들은 시진핑이 1975년 10월 량자허 생활을 끝내고 상경할 때 60리길을 걸어 배웅할 만큼 친근한 사이가 됐다.량자허에서 몸에 익힌 덕목은 이후 공직생활에서 발휘됐다. 그는 푸젠(福建) 성장(대리성장 포함)으로 6년간 재직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반면 성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서민의 고충을 듣고 함께 호흡한 것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화권 언론이 2007년 그가 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전격 발탁됐을 때 리커창(李克强), 리위안차오(李源潮), 보시라이(薄熙來) 등 5세대 지도부 ‘4대 천왕’ 중 그를 으뜸으로 꼽은 것도 이런 품성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 석자를 따서 ‘시(習)-윗세대의 장점을 배우는(習) 데 뛰어나고, 진(近)-중앙 지도부와 지방 인민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近) 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핑(平)-평소 간부로서 태도는 소박하고(平) 겸손, 온화하며 대범하고 당당하다’는 말도 있다. 량자허에서 만난 촌민위원회의 한 청년은 “우리 마을 출신이 최고지도자가 됐다고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한 것도 그가 ‘자세 낮추기’를 유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본보 고기정 특파원, 시진핑 下放생활했던 산시성 량자허 현지 르포
《 중국은 8일 개막한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18차 당대회)’를 통해 10년 만의 지도부 교체에 들어갔다. 앞으로 10년간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한 중국을 이끌어 갈 지도자들이 어떤 인물인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중국 대륙에 떠오르는 새로운 별들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
22세 량자허 촌장 시진핑 시진핑(앞줄 가운데)이 산시 성 량자허 촌에서 7년간 있다가 1975년 베이징으로 돌아가기 직전 마을 주민 및 지인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당시 그는 22세였다. 사진 출처 바이두
지난달 31일 찾은 량자허(梁家河)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이 머물던 시절처럼 여전히 궁벽한 산촌이었다. 혁명성지 옌안(延安)에서 국도 210호선을 1시간 반가량 달린 뒤 농로를 20분 정도 더 타야 겨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민이래야 80가구 347명. 남북이 산으로 막힌 협곡에 자리한 탓에 ‘도대체 뭘 먹고 살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다.
○ “디댜오(低調·자세를 낮춤) 유지하라고 했다”
시 부주석은 원래 ‘태자당(혁명원로 자제 그룹) 중의 태자당’이었다. 부친 시중쉰(習仲勳·1913∼2002)은 국무원 부총리를 지냈다. 최고위 간부들의 주거지인 베이징(北京) 중난하이(中南海)에 살던 그가 량자허까지 오게 된 건 9세 때인 1962년 아버지가 ‘류즈단(劉志丹)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실각한 것이 계기였다. 산간혁명의 근거지인 시베이(西北)에서 활약하다 전사한 건국 영웅 류즈단의 생애를 다룬 소설이 마오쩌둥(毛澤東)의 심기를 건드렸다. 마오보다 류즈단을 더 치켜세우는 듯한 이 소설 때문에 류즈단의 전우이자 초고를 손봤던 시중쉰마저 반(反)혁명분자로 몰렸다. 반혁명분자의 가족이었던 그는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던 1969년 1월 량자허로 하방(下放)됐다.
당시 량자허 주민은 야오둥(窯洞)으로 불리는 토굴에서 살았다. 부잣집 도련님이던 그는 몸에 이가 옮을까 봐 농민들이 가까이 오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아무 생각 없이 빵을 개에게 던져줬다가 “부르주아 부패분자 시중쉰의 아들이 개에게 (귀한) 빵을 줬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왕(王)모 씨(73)는 “학생 몇 명(12명)이 왔는데 마을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시진핑은 책을 많이 봤고 아는 게 많았지만 일은 잘 못했다”고 회고했다.
농촌 밑바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시진핑은 3개월 만에 베이징으로 도망갔다. 이모부에게서 “민중의 바다로 들어가라. 그게 노동개조를 받고 있는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다”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그는 비로소 그 바다에 몸을 적셨다. 시 부주석은 량자허로 돌아와 벼룩과 거친 음식, 농촌생활, 노동, 사상 등 ‘5대 관문’을 통과하며 농민들과 친숙해졌다.
그가 살던 10m²(약 3평) 남짓한 토굴의 입구는 지금은 일반 집과 마찬가지로 개조돼 관광지처럼 꾸며져 있다. 앞에 작은 매점도 있다. 매점 주인은 “일반인에게 개방은 안 되지만 우리 마을의 자랑거리다”라고 전했다. 토굴뿐 아니라 마을 주변도 새로 도로 공사를 하는 등 시 부주석의 최고지도자 등극을 앞두고 지방정부에서 적잖게 신경을 쓰는 듯했다.
토굴 취재를 마치고 주변을 돌아보던 중 갑자기 경찰차 한 대와 승용차 2대가 다가와 기자를 둘러쌌다. 공안이 끌고 간 곳은 파출소 분소로도 쓰이는 촌민위원회. 시진핑이 21세 때 서기로 근무했던 곳이다. 연행한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고 외신기자가 함부로 취재하면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들은 2시간가량 기자를 억류해 취조한 뒤 풀어줬다.
마을 자율경비대원이라고 밝힌 한 40대 남성은 기자에게 “우리도 시 부주석이 더 높은 자리로 가게 돼 정말 기쁘다. 하지만 위에서 ‘디댜오(低調·자세 낮추기)’를 유지하라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긴장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런 토굴에서 생활 중국 산시 성 량자허 촌에 지금도 남아 있는 토굴의 내부. 시진핑 국가 부주석도 1969년 하방돼 이런 곳에서 7년간 살았다. 오른쪽 사진은 시 부주석이 살았던 토굴의 외부를 깔끔하게 정비한 ‘시진핑 토굴’의 입구. 량자허=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
2007년 10월 시 부주석이 당 상무위원으로 선출됐을 때 홍콩 다궁(大公)보는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디댜오, 핑스(平實·소박하고 수수), 첸허(謙和·겸손하고 온화), 다치(大氣·대범하고 당당)’라는 4단어였다. 이 중 ‘디댜오’와 ‘첸허’는 오늘의 시진핑을 있게 한 핵심 키워드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시 부주석은 량자허에 다시 돌아갔을 때 옌안 사투리부터 익혔다. 촌민과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다. 이곳의 거친 잡곡에도 익숙해졌으며 양말을 직접 짜서 신었다. 서기로 있을 때는 전용 승용차를 배정받았으나 엔진을 빼내 트랙터를 만들어 농사일에 쓰도록 한 일화도 전해진다. 베이징의 귀족 청년이 어느새 농군으로 변한 것이다. 주민들은 시진핑이 1975년 10월 량자허 생활을 끝내고 상경할 때 60리길을 걸어 배웅할 만큼 친근한 사이가 됐다.
그의 이름 석자를 따서 ‘시(習)-윗세대의 장점을 배우는(習) 데 뛰어나고, 진(近)-중앙 지도부와 지방 인민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近) 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핑(平)-평소 간부로서 태도는 소박하고(平) 겸손, 온화하며 대범하고 당당하다’는 말도 있다. 량자허에서 만난 촌민위원회의 한 청년은 “우리 마을 출신이 최고지도자가 됐다고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한 것도 그가 ‘자세 낮추기’를 유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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