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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농사

도보사랑 2019. 2. 24. 10:12

[삼선 이야기] 자식 농사

 

2019.2.24.

 

나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 어떤 책은 아무리 다가가도 읽히지 않고, 어떤 책은 읽기가 엄청 힘들어도 놓을 수 없고, 어떤 책은 읽지 않았는데 저절로 기다려지고, 어떤 책은 한번 손에 들면 단숨에 끝까지 간다. 그렇다고 책 읽는 것이 현실 문제를 즉석에서 해결해 주지 않아 어쩌면 노력보다 성과도 적은 일일 수 있다.

 

“글공부에는 그 아비의 버릇을 이을 줄 모르고 주량만 훨씬 아비를 넘어서는 거냐?”

 

다산이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아들 학유(學游)에게 한 말이다. 하지만 글공부란 지금의 '나'나 200년 전 연암의 아들 종채(宗采)나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조선 후기, 대 학자인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에게는 글공부 이외는 딱히 다른 할 일이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자식이 책 읽기를 좋아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심정으로 평생 글공부하면서 살지 않았을까? 하지만 책 읽기만 같았고, 인생 경로와 자식 농사는 달랐다.

 

우선 두 분의 삶을 간략히 비교해 보자. 연암은 답답한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책 읽기와 세상 경험에 치중했지만, 다산은 6년 재수 끝에 대과에 급제하여 관리의 길로 접어든다. 연암은 삼종형을 따라 연경에 다녀오는 등 나이 50에 먹고 살기가 어려워 음서제도로 생계형 관직에 진출했지만, 다산은 규장각, 승정원, 암행어사 등 최고의 관직에 도달한 나이 마흔, 정조가 죽은 다음 해에 18년간 귀양살이하면서 마음껏 책을 읽고 글공부를 한다.

 

연암은 아들이 둘인데, 장남은 큰 집에 양자로 보내고 둘째 아들인 종채(宗采)가 아버지의 전기인 과정록(過庭錄)을 지었으며 그의 아들 박규수가 바로 평양감사 재직시절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미국 상선을 불태웠으며 개화파를 이끈 인물이 되었다. 다산의 아들 학유(學游)는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를 지었고 그 이후 후손 중에 드러난 인물이 없었다.

 

연암의 손자인 박규수는 개혁의 사랑방을 열어 김옥균, 김홍집, 오경석을 키웠으나 미완성의 역사를 만든 반면, 일본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송하촌숙(松下村塾)에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을 배출하여 개혁에 성공한다. 이곳에서 만든 이론이 정한론(征韓論)이다.

 

두 나라 모두 사랑방을 열었으나, 조선은 하나밖에 없었고 일본은 수없이 많은 사랑방이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은 어디선가 잘못된 길을 걸어갔다. 그 문제가 혁신의 길목에 선 지금 우리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지 않을까?

 

나는 평양감사 시절 박규수가 미국 상선에 너무 쉽게 승리(1866년)하는 바람에 조선의 지도자들이 서양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에 빠진 것을 한 원인으로 지목한다. 반면 일본은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1853년)의 함포에 놀라 본격적인 개화의 길로 들어섰고 두 나라 모두 근 십 년 차이로 미국이 원인을 제공했음에도 그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만약에 그때 평양감사가 박규수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서양의 실체를 좀 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을까?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고, 서양의 실체에 대해 누구보다도 밝았던 박규수의 승리였기에 조선은 너무 쉽게 안주해버렸다. 위대한 개혁가란 모름지기 작은 문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예민함을 보여야 한다.

 

다산은 천주교로 집안이 폐족이 되어 후손들이 과거시험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조선에서 과거시험이라는 기회를 상실한다는 것은 그 집안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음을 뜻한다. 하지만 다산은 과거라는 정형된 책 읽기보다는 제대로 된 책을 읽을 기회를 얻었다고 오히려 이를 더 기쁘게 생각하는 정말로 지독한 독서광임에 틀림이 없었다.

 

자식 공부에 대한 아비의 애틋함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맏아들이 저 멀리 남양주에서 강진으로 아비를 찾아오니 기뻐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옛날 가르쳐 준 경전 이론을 물으니 우물쭈물 대답을 못 하는데, 시험 삼아 술 한 잔을 마시게 했더니 취하지 않았고, 동생 또한 형보다 주량이 몇 배 더 많다고 한다. 오호통재라! “어찌 글공부에는 그 아비의 버릇을 이을 줄 모르고 주량만 훨씬 아비를 넘어서는 거냐?”

 

*인용: 고미숙 지음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 pp.376-381, 사진은 강진 김영랑생가 모란꽃(20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