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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탄생

도보사랑 2022. 7. 14. 11:19
북학의 탄생
  중화사상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고 체계로써 중세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표상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중화사상은 세계를 문명인 중화(中華)와 야만인 이적(夷狄)으로 가르는 화이론(華夷論)을 낳았고 화이론은 성리학의 명분론으로 자리 잡았다. 중화의 조건은 종족적으로는 한족이어야 하며 문화적으로는 상투 튼 머리였다. 공자가 피발좌임(被髮左衽), 즉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복장을 미개한 오랑캐 풍습으로 말하자 머리를 묶는 형식은 문명인의 예법이 되었다. 종족적으로 지리적으로 조선은 중화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피발좌임의 여부, 즉 문화적 개념으로서의 예의를 화이의 구별 기준으로 내세웠다. 조선의 선비들은 상투 튼 머리와 우임(右衽)의 긴 소매 옷을 입고 중국과의 일체화를 지향하며 조선이 소중화임을 자처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파병해 도와주었고 조선은 명나라에 재조(再造)의 은혜를 새기며 소중화 의식을 더욱 다졌다. 하지만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고 명을 무너뜨림으로써 동아시아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병자호란에서 패배하고 명나라마저 멸망하자 조선 사회는 큰 충격과 좌절감에 휩싸였다. 중화 문명의 담당자가 오랑캐로 바뀐 것이다. 명‧청의 교체는 조선 사회엔 롤 모델의 상실을, 통치 세력에겐 통치 이념의 기반 상실을 의미했다. 중국과의 관계를 고민하던 조선은 청나라에 적개심을 품은 효종과 김상헌의 척화 논의를 계승한 송시열 및 이를 지원한 서인(西人)과 산림(山林)의 지원 아래 북벌(北伐)과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조선의 지배 이념으로 삼았다.

  이후 북벌론은 조선의 국가 대의가 되어 19세기 말까지 지속해서 이어졌다. 18세기 건륭제의 중국은 유럽 문명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에 대한 원수를 갚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어내기를 꿈꾸는 조선은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의 문물을 의도적으로 배척했다. 청나라 사람들의 가죽옷과 변발은 경멸과 조롱의 상징이 되었다.

  실체보다 더 단단한 것은 그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와 집단 무의식이다. 인간은 편견을 갖게 되면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중국에 간 조선의 선비들은 한결같이 조선만이 중화를 지키고 있다는 우월감으로 중국을 깔보았고 중국은 오랑캐이므로 개‧돼지와 다를 바 없다는 선입견으로 바라보았다. 백이 숙제 사당에 들러 명나라에 대한 향수에 젖고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꿈꾸었다. 북벌이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와 조선만이 중화라는 생각은 배타적 우월의식을 낳고 이성에 기초한 정당한 교류를 가로막는 지적 장애를 일으켰다.

  하지만 청나라의 치세(治世)가 안정적으로 지속되면서 사행을 통해 중국의 발달한 문명을 확인한 일부 지식인을 중심으로 중국의 문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현재 상황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입장이 생겨났다. 명나라가 반드시 회복되리라고 믿는 중화론자들의 의식에는 오랑캐는 백 년을 가지 못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오랑캐가 일시적으로 천하를 장악하더라도 하늘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 운세는 절대 백 년을 넘지 못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청나라의 국운이 백 년을 넘어서자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자각이 싹텄다. 아울러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것은 자기 실리를 위한 행동일 뿐이며 명의 멸망은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는 논의가 생겨났다. 조선도 이적이므로 이적이 이적을 섬기는 것은 상관없다는 의견, 명나라보다 청나라가 도와준 은혜가 더 크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사라진 왕조에 집착하기보다는 청나라가 강대국인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그 문물 가운데 좋은 점을 수용하려는 현실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수레와 벽돌을 사용하자는 주장은 18세기 초‧중엽 이래 서명균(徐命均), 이광려(李匡呂), 홍양호(洪良浩) 등 소론계에서도 제기되어 북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견해가 되었다. 마침내 북학의 목소리는 박제가와 박지원에게서 정점에 다다르고 구체적으로 드러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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