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의 여행 가방>
오르한 파무크
박양근 역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2년 전에 원고 뭉치와 공책이 가득 담긴 작은 여행 가방을 내게 주었습니다. 평상시처럼 농담 섞인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내가 떠나간 뒤에 그것을 읽어보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 말은 운명하신 후를 뜻했습니다. 아버지는 조금은 부끄러운 듯이 “그냥 한번 보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너에게 쓸만한 게 있다면 내가 죽은 뒤에 출판해 보거라”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우리들은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여행 가방을 놓아둘 장소를 찾느라 자신이 성가신 짐으로 여기는 사람처럼 앞뒤로 왔다 갔다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가방을 조금 외진 구석에 조용히 내려놓았습니다. 그 어색한 순간을 우리 부자는 결코 잊어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일단 지나면서 우리들은 일상적인 일로 되돌아 왔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는 농담을 하며, 짓궂게 구는 성품을 회복하면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대개 실패로 끝난 사업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다 하여 그렇게 슬퍼하는 기색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며칠 동안 한번도 손을 댄 적이 없는 그 작은 여행 가방의 앞뒤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나는 검정색 가죽에 자물쇠가 달리고 모서리가 해져 둥글게 된 여행 가방에 이미 친숙해져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단거리 여행을 할 때면 종종 사업에 필요한 그 속에 서류를 넣고 다녔습니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아버지가 여행에서 다녀오시면 종종 이 작은 여행 가방을 열고 아버지의 물건을 샅샅이 뒤지기도 하며 오듀콜로뉴 화장수와 이국의 냄새를 맡곤 했습니다. 정말 낯익은 그 가방은 내 어린 시절의 과거를 뚜렷이 떠올려 주는 친숙한 친구입니다. 지금 나는 그 가방에 감히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의심할 바 없이 내용물이 지닌 신비스러운 무게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그 무게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려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방안에 가두었을 때, 테이블에 앉아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구석에 앉을 때 우러나오는 것, 바로 문학의 의미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작은 여행 가방에 손을 대었을 때, 나는 그것을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몇몇 공책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그 공책에 뭔가를 쓰는 것을 이전에 보았지만 가방 속에 있는 무게의 짐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던 때는 첫 번째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큰 서재를 가지고 계셨고 1940년대 후반기의 젊은 시절에, 이스탄불의 시인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발레리의 시를 터키어로 번역했지만 독자가 별로 없는 이 가난한 나라에서 시를 써서 살아가는 생활은 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아버지인 할아버지는 부유한 사업가였고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동안 아버지는 행복한 삶을 살았으며 문학과 글쓰기를 위해서 고생을 감내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삶을 사랑했으며 나는 그 점을 이해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가방 속에 있는 내용물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첫 번째 이유는 내가 읽으면 그 글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아셨던 아버지는 마치 그의 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한 행동을 보여주셨습니다. 25년 동안 작가로서 활동한 후 나는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렇더라도 문학을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하여 화를 내고 싶지 않습니다. …… 내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 내가 알거나 발견하고 싶지 않는 정말 중요한 문제는 아버지가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입니다. 아버지의 가방을 열 수 없었던 이유는 이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 이 점을 떳떳하게 인정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만일 진실하고 위대한 문학이 내 아버지의 작은 여행 가방에서 솟아난다면 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던 아버지 상을 인정해야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두려움만큼 가능성이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만한 나이가 된 지금조차 나는 아버지가 작가가 아닌 아버지로서만 존재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자신 속에 있는 제2의 존재와 그렇게 만드는 세상을 발견하기 위하여 수년을 보내는 사람입니다. 내가 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첫째로 떠오르는 것은 소설도 시도 문학적 전통도 아닙니다. 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홀로 책상 앞에 앉아 어두운 그림자 아래에서 내면을 뒤적이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언어로 새 세상을 건설합니다. 이 사람들은 타자기를 사용하고 편리한 컴퓨터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연필과 종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나도 30년 동안 그렇게 했습니다. 그가 글을 쓸 때면 차나 커피를 마시고 담배도 피웁니다. 탁자에서 일어나 창문을 통해 거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유심히 바라보기도 합니다. 운이 좋을 때면 나무나 멋진 경치를 보기도 하고, 아니면 검은 벽을 뚫어져라 응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나처럼 시나 희곡이나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모든 차이점은 책상 앞에 앉아 인내심을 가지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진지한 과업에서 생겨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적으로 응시한 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며, 스쳐 지나치는 세상을 연구하는 것이며, 자신 속으로 들어가서 인내와 끈기와 환희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며칠, 몇 달, 몇 해 동안 새로운 언어를 빈 공책에 조금씩 보태면서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 나는 마치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어떤 다른 존재를 마음속으로 가져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것은 누군가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다리나 돔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작가들이 사용하는 돌이 언어입니다. 돌을 손에 쥐고 돌 하나하나가 서로 이어져 있는 방법을 느끼고, 때로는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거나 손가락으로 거의 감싸 안아 무게를 달기도 하고 펜 끝으로 그것을 뱅글뱅글 돌려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세월이 왔다 지나가는 동안에 인내심과 희망을 지니면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나갑니다.
작가의 비결은 영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영감은 그것이 닥쳐왔을 때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되는 비결은 인내와 끈기입니다. 우리가 즐겨 하는 터키의 농담 중에 바늘로 우물을 판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속담은 내게 심령 같은 작가 정신을 일깨워 주는 것 같습니다. 나는 옛 이야기 중에 패러하트의 인내심을 좋아하는데 그는 사랑을 위하여 산에 굴을 뚫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점을 이해할 뿐더러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내 소설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불변의 열정으로 똑같은 말을 그렸던 페르시아의 옛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모든 붓질을 기억했기 때문에 그는 눈을 감고서도 그 아름다운 말을 다시 그려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 나는 글쓰기의 직업에 대하여, 내 자신의 삶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음을 잘 압니다. 만일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면 천천히 말하십시오. 그것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말하십시오. 만일 이야기에 담긴 힘이 마음속에서 솟아오른다고 느끼거나, 테이블에 앉아서 끈기 있게 예술이라는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고 느끼면 똑같은 희망을 부여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영감의 천사(어떤 사람에게는 규칙적으로 찾아오고 다른 사람에게는 거의 찾아오지 않는)는 희망을 가진 자와 자신감을 소유한 자에게는 호의를 베풉니다. 바로 그 순간이 작가가 되었다고 느낄 때입니다. 자신의 노력에 의문을 품고, 노력과 꿈과 자신의 글의 가치에 대하여 그저 의문만 품고, 자신의 이야기가 그저 이야기일 뿐이라고 느낄 때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천사는 이야기와 이미지와 꿈을 보여줄 작정을 하고 작가가 세우기를 바라는 세상을 펼쳐 줍니다. 만일 내가 평생을 바쳐 쓴 책을 살펴본다면 그토록 환상적일 정도로 행복하게 느꼈던 문장과 꿈과 내용들은 나의 상상으로 빚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찾아 나에게 정중하게 전해 준 어떤 힘이 있어 그렇게 되었다는 경이의 순간에 놀라게 됩니다.
아버지의 여행 가방을 열고 그 속의 공책을 꺼내어 읽는 것이 두렵기만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참았던 역경을 참지 못했던 아버지가 좋아했던 것은 고독이 아니라 친구와 사람들이고 술집이나 농담이나 군중들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포기한 꿈과 인내심은 작가로서의 내 생활과 경험으로 빚어진 편견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고, 친구들과 재미있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들뜬 기분을 가지면서도 많은 글을 쓴 훌륭한 작가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우리들이 어렸을 때 가족이라는 단조로운 삶에 지쳐 우리를 떠나 파리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여타 작가들처럼 아버지는 호텔방에 앉아 공책을 글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때 썼던 바로 그 공책들이 가방에 담겨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 공책들을 내게 가져오기 전, 여러 해 동안 아버지는 그때의 삶을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린아이에 불과했을 때조차 그 즈음에 대하여 이야기했지만 소심한 성품과 작가가 되고 싶은 꿈과 호텔방에 머물 동안 아버지를 사로잡았던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대신에 아버지는 파리의 보도블록에 새겨진 사르트르라는 이름을 보았다거나, 보신 영화나 책에 대해서, 그리고 매우 중요한 소식을 의기양양하게 전해 준 사람들의 성실성에 대해서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작가가 되었을 때 주지사나 위대한 종교적 지도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저명한 작가들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해주신 아버지가 계셨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점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적힌 아버지의 공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커다란 서재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살고 있을 때 나처럼 책과 사색 속에서 혼자 있는 것을 즐겼으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작품이 지닌 문학적인 수준에 대해서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물려주신 이 가방을 불안하게 지켜볼 때면 그렇게 열 수 없는 물건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는 책을 보시다가 종종 앞에 놓여진 침대 의자에서 기지개를 펴기도 하고 손에 쥐었던 책이나 잡지를 치우고 꿈속에 빠지거나 때로는 장시간 공상에 빠지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농담을 하거나 놀리거나 또는 가족들의 생활에 대하여 말다툼을 벌일 때 보여주는 것과 전혀 다른 표정을 아버지의 얼굴에서 보거나, 내적 응시의 첫 징조를 보았을 때면, 어린 사춘기 시절의 나는 아버지가 뭔가를 불만스러워 한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몸이 떨리곤 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불만이야말로 한 인간을 작가로 만드는 기본적인 자질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인내심과 고생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무엇보다 일상과 하루하루의 삶에서 탈출하여 방에 자신 스스로를 가두고 싶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방에 처박히고 싶은 욕망은 행동으로 몰고 갑니다. 마음속에서 다른 작가의 책을 읽고 양심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서 그들의 언어와 논쟁하고 그들의 책과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자신의 사상과 세계를 발전시킨 부류의 독립 의식을 가진 선구자 격인 작가라면 틀림없이 현대문학의 초기에 살았던 몽테뉴입니다. 몽테뉴는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추천해 준 작가입니다. 그래서 나는 동양이든 서양이든 어느 세상에 있든 사회와 단절하고 그들의 방에서 책에 완전히 둘러 싸여 있던 작가들이 보여준 전통의 일부로서 내 자신을 바라보기를 좋아합니다. 진정한 문학의 출발점은 책들이 가득한 방에 자신을 가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자신을 가두더라도 우리들은 생각만큼 고독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은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 쓴 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책과 말, 그리고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과 교류하게 됩니다. 나는 문학이 인간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탐색의 과정에서 모은 것 중에서 가장 귀중한 보고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들의 고뇌 어린 작품에 관심을 기울일수록 그 사회와 종족과 국민들은 더욱 지적으로 성숙하고 부유해지면서 진보해 갑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책을 태우거나 작가를 모욕하는 것은 암담하고 절망적인 세대가 다가온다는 신호입니다. 문학은 결코 한 나라의 관심사만이 아닙니다. 자신을 방에 가두어 내적인 여행을 가장 먼저 떠나는 작가는 수년에 걸쳐 유효한 문학의 영원한 규칙을 찾아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그들의 이야기가 자신의 것인 것처럼 말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집니다. 왜냐면 이것이 문학이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먼저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책 속으로 여행하여야 합니다.
나의 아버지는 모두 1,500권에 달하는 장서를 가졌으며 이것은 보통의 작가가 가진 것보다 많습니다. 22살이 되었을 때 까지 나는 그 모든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책 한권 한 권마다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어느 책이 중요하고 어느 책이 가벼워 읽기 쉽고, 어느 책이 고전이고 어느 책이 교육에 꼭 필요하며 어느 책이 잊어버려도 좋지만 재미있는 우리나라 역사책이며, 그리고 어느 것이 아버지가 높게 평가하는 프랑스 작가의 작품인지를 알았습니다. 종종 나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장서를 바라보며 언젠가 다른 집에 내 서재를 만들리라, 더 나은 서재를 세워 나의 세계를 만들리라 꿈꾸어 왔습니다.
내가 멀찍이 떨어져 아버지의 서재를 보았을 때 그것은 실제 세상을 그린 조그만 그림 같았습니다. 그것은 이스탄불에서 내 자신의 모퉁이에서 바라본 세상에 불과합니다. 서재가 그 증거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파리와 미국의 여행에서 구입한 책과 1940년대와 50년대에 고서점과 신간 서점에서 산 외국어로 된 책도 구입하여 서재를 꾸몄습니다. 나도 그 서점상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내 세상은 내 집안과 나라와 서구 사회가 뒤섞여지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에 나도 약간의 야심을 가지고 내 서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이스탄불』이라는 책에 적었듯이 작가가 되려는 생각은 그때까지는 뚜렷이 갖지 못했습니다. 화가가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결국 하게 되었지만 내 인생의 길이 무엇인지 아직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끊임없는 호기심과 읽고 배우고 싶다는 희망으로 나아가는 욕망이 마음속에 깃들어 있으면서 어쩐지 다른 사람처럼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적인 감정은 내가 아버지의 서재를 바라볼 때마다 느꼈던 것과 관계되면서 당시 이스탄불에 살았던 모든 사람처럼 중심권에서 멀어져 산다, 달리 말하면 지방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불안스럽고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에 대한 이유도 달리 있습니다. 나는 화가와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관심을 별로 보여주지 않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점을 잘 알았습니다. 그런 생각은 내게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했습니다. 1970년대에 아버지에게서 용돈을 받아 낡고 먼지가 붙어 있고 모서리가 해진 책을 이스탄불의 고서점에서 탐욕스럽게 구입하였을 때 가난한 고서점의 모습과 절망적일 정도로 흐트러진 가난하고 옷이 해진 책방 주인들과 모스크 광장의 길바닥과 허물어져 내리는 벽 모퉁이에 쌓여진 물건들을 보았을 적에 나는 그들이 파는 책에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삶과 문학에 있어서, 그리고 세상 속의 내 위치에 관해 말하자면 기본적인 느낌은 내가 중심부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중심에는 내 생활이나 이스탄불의 모든 것보다, 아니 터키의 모든 것보다 더 풍요롭고 더 흥미진진한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밖에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과 이 기분을 공유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세계 문학이 있으며 그 중심부는 나에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실제 내가 의식하고 있는 것은 서구 문학이 아니라 서구이며 우리 터키인들은 그 밖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아버지의 서재가 그 증거입니다. 서재의 한쪽 끝에는 이스탄불에서 발간된 책인 우리의 문학과 문화와 모든 사랑스러운 내용들이 놓여 있고 다른 곳에는 유럽과 다른 세상들 그리고 우리가 전혀 닮지 않고, 닮지 않으므로 우리에게 고통과 희망을 주는 것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쓰고 읽는다는 것은 위안을 찾기 위해 하나의 세상에서 떠나 낯설고 경이로운 세상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도 그 삶에서 탈출하여 서구로 도망치기 위해서 소설을 읽었다고 느끼며 나도 나중에 그렇게 되곤 했습니다. 아니면, 그 당시 책들은 우리 자신의 문화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주었진 것, 그렇게 부족한 것이 담긴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스탄불의 생활에서 벗어나 유럽으로 여행하기 위하여 책을 읽는 것은 아닙니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파리로 가서 호텔방에 자신을 가두고 노트에 글로 가득 채운 후에 그것을 터키로 가져왔습니다. 아버지의 작은 여행 가방을 지켜볼 때면 이런 사실로 인해 나는 불안해집니다. 터키에서 작가로 살아남기 위하여 방에서 글을 쓴 25년 후에 조차 아버지가 그러한 생각을 가방 속에 숨겼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고 글이 사회의 눈과 국가와 사람의 눈에서 벗어나 비밀스럽게 쓰여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집니다. 아마 이것이 바로 내가 그랬던 것과 달리 왜 아버지는 문학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는가에 대하여 화를 내는 주된 이유입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나와 같은 삶을 영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삶과 투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친구들과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 웃으며 행복하게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한 귀퉁이에서는 화를 내기보다 질투를 하는 게 아닌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두 번째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기에 나는 더욱 불안해집니다. 흔히 그랬듯이 조롱 투의 화난 목소리로 자문할 때와 같습니다. 행복이 뭔가? 행복은 고독한 방에서 깊게 사색하며 사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행복은 사회 속에서 편안하게 살고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믿으며 처신하는 삶입니까? 겉으로 보면 주변의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는 것 같으면서 남모르게 글을 쓰며 평생을 보내는 것은 행복입니까, 아니면 불행입니까.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전적으로 유쾌하지 못한 질문들입니다. 어디에서 성공적인 인생의 척도가 행복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까? 신문들과 모든 사람들과 누구나 다 가장 중요한 인생의 척도가 행복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것만이 그 정반대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요. 결국 아버지는 여러 차례나 가족에게서 도망을 쳤습니다. 그렇더라도 내가 어떻게 그분이 부정직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아버지의 작은 여행 가방을 처음 열었을 때 내가 느낀 생각입니다. 아버지의 인생에는 내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던 어떤 비밀이나 불행이 있는가, 아니면 아버지에게는 작품에 담으면서 참아야 했던 어떤 것이 있었던가. 나는 가방을 열자마자 그 여행의 냄새를 회상했고 몇 년 전에 내게 보여주었던 몇몇 공책들을 알아차렸지만 그런 부분은 오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내가 손에 쥐고 있는 대부분의 공책은 우리를 남겨 두고 파리로 떠났을 때의 젊은 시절에 적은 글 들입니다. 내가 숭배하며 읽었던 전기 속의 작가들처럼 아버지가 내 나이였을 때 쓰고 생각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비슷한 것은 아무데도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불안스럽게 만든 것은 아버지의 노트 여기저기서 작가다운 목소리를 만나게 된 때 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목소리이거나 독창적인 것이 아니며 적어도 내가 아버지로서 알고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글을 쓸 때 아버지가 알고 있었을 두려움의 밑바닥보다 더 뿌리 깊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깊숙이 간직된 그 두려움은 내가 독창적이지 못하고 아버지의 글에서 좋은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아버지가 다른 작가들로부터 지나치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키워 내가 절망 속에 빠지고 끝내 내가 어렸을 때의 삶과 글을 쓰고 싶은 욕망 자체를 던져 버리면서 내 작품을 의문시하도록 만드는 두려움 그것이었습니다. 작가로서 첫 십년 동안 이 두려움을 점점 깊게 느끼게 된 나는 그것을 떨쳐 버리려고 할수록 불쑥불쑥 그 두려움을 더 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내가 그림을 그만두었을 때처럼 패배를 인정하고 두려움에 짓눌리어 소설 쓰기마저 포기해 버린다고 인정할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가방 뚜껑을 덮은 다음, 그것을 치웠을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두 근본적인 감정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방으로 유배되었다는 느낌과 내 정체성이 결핍되어 있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분명코 그런 것을 저절로 느낀 첫 번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수 년 동안 책을 읽고 쓰는 가운데 다양하고도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이러한 감정들을 연구하고 발견하면서 두려움이 더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예민한 감정이 끝났다가 다시 촉발되면 여러 색깔을 띠게 됩니다. 분명히 내 혼들은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러하듯이 삶과 혼동과 예민함과 순간순간의 고통으로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책을 씀으로써 (『내 이름은 빨강』, 그리고 『검은 책』에서처럼) 진정성에 대한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고, 주변인으로서의 내 삶의 문제(『눈』그리고『이스탄불』에서 처럼)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있어 작가가 된다는 것은 우리들이 마음속에 있는 비밀스러운 상처, 너무나 은밀하여 우리 스스로도 좀처럼 알 수 없는 상처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상처와 아픔을 인내심으로 탐색하고 알고 조명하고 소유하여 의식적으로 우리의 혼과 작품의 일부로 만드는 것입니다.
작가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으나 알고 있다고 모르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지식을 탐색하고 그것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독자는 친숙하면서도 기적과 같은 그 세계를 방문합니다. 작가가 수년간 계속하여 글 쓰는 솜씨, 즉 세계를 창조하는 기능을 연마하기 위해 자신을 방안에 가둘 때 이 비밀스런 상처를 글쓰기의 출발점으로 사용한다면 부지불식간에 인간에 대하여 깊은 믿음을 품게 됩니다. 나의 경우에는 모든 인류는 서로 닮아 있다는 사실과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상처를 지니고 있어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진실한 문학은 사람은 서로 닮아 있다는 어린애 같지만 희망적인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작가가 수 년 동안 이러한 몸짓을 가지고 방에 은둔하고 있다면 그는 단 하나의 인간애 즉, 중심부가 없는 세상을 제안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내 아버지의 작은 여행 가방이 보여주듯이, 이스탄불에 지닌 창백한 색조의 삶에서 보면 세상에는 중심부가 있습니다. 그 중심부는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내 책에서 나는 기본적인 이 지방주의가 어떻게 체코주의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상세하게 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정체성에 대한 의문으로 나아가는지도 묘사하였습니다. 나는 이 지구상에 사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똑같은 감정을 갖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물자의 부족, 안전의 결핍, 퇴화되었다는 느낌으로 더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류가 여전히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딜레마는 땅도 없고 집도 없어 굶주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텔레비전과 신문은 문학이 수행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재빠르고 단순하게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을 이야기할 따름입니다. 문학이 오늘날 이야기하고 조사해야 할 가장 긴급한 부분은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공포입니다. 버려졌다는 두려움, 무시되고 있다는 두려움, 별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감정이 이러한 두려움과 어울려 있습니다. 즉각적인 모욕감, 상처받기 쉬운 마음, 경시된다는 느낌, 불평 거리, 민감성 그리고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모욕, 국가주의자들의 거만, 불경기도 그들 옆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러한 감정에 직면할 때마다, 그것들을 피상적으로 표현하는 불합리하고 과장된 표현에 직면할 때 마다 그것들이 내 마음속의 절망을 건드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은 종종 서구 사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 사회와 국가들을 목격할 때면 그들과 쉽게 동일시되어지면서 그들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게 되는 그들의 공포에 굴복하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은 모욕감과 불평 거리가 가져다 준 두려움에 기인합니다. 나는 또한 쉽사리 똑같이 동일시될 수 있는 서구 사회라는 세상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룬 부와 우리들에게 가져다 준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와 모더니즘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자만심을 가지고 있는 국가와 국민들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기만족에 굴복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내 아버지만의 경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들은 중심부의 세상을 너무 지나치게 중요시 합니다. 반면에, 수년간 계속하여 방에 갇혀 책을 쓰는 일은 반대의 신념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은 서로 닮아 있으므로 우리가 쓴 글이 언젠가는 읽혀지고 이해되어질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글을 쓰고 내 아버지가 글을 썼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주변부로 넘겨져 아웃사이더가 되어 버렸다는 분노로 상처받은 고통스러운 낙관주의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일생 동안 서구의 대하여 느꼈던 사랑과 증오를 나는 숱하게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의 근본적인 믿음이 있다면, 내가 낙관주의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서구에 대한 애증의 관계 속에서 그가 다른 쪽에 세웠던 세상을 지키기 위해 살아온 이 위대한 작가와 함께 여행하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이러한 과업에 바친 작가라면 엄숙한 이 현실을 압니다. 우리 본래의 목적이 무엇이든, 희망을 지니고 글을 쓴 수년 후에 우리가 창조한 세상은 결국 매우 다른 장소로 이동할 것입니다. 슬픔과 분노 속에 글을 썼던 우리들은 테이블에서 벗어나 슬픔과 분노의 다른 곳이자 다른 세상으로 안내받을 줄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가 그 세상에 스스로 도달할래야 할 수 없었을까요? 안개 속에서 모든 색조를 지닌 채 서서히 솟아올라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는 육지처럼, 또 오랜 항해 끝에 다다른 섬처럼 이 다른 쪽의 세상이 우리를 매혹시킵니다. 우리들은 서구 여행자들이 남쪽으로 여행한 끝에 이스탄불이 안개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본 것처럼 기만되고 있습니다. 여행이 끝날 즈음 희망과 호기심이 시작됩니다. 그들 앞에는 사원과 사원의 탑과 집과 거리와 언덕과 다리와 산과 모든 세계가 뒤엉켜 있습니다. 그것을 본 우리들은 그 세상 속으로 들어가 몰두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마치 책과 같습니다. 테이블 앞에 앉은 후에 우리들은 지방화 되고 배제된 주변인이 되어 화가 나고 매우 우울해지기 때문에 이러한 감성을 초월하는 완전한 세상을 수립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은 내가 소년과 청년이었을 때와 반대입니다. 나에게 세상의 중심부는 이스탄불입니다. 평생 동안 그곳에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지난 33년 동안 나는 그 거리와 다리와 사람과 개와 집과 사원과 분수와 낯선 영웅들과 가게와 유명한 인물들과 어두운 장소와 밤과 낮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내 일부로 만들고 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내 손으로 만든 이 세상,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이 세상은 실제로 살았던 도시보다 더 현실적이 되는 순간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도시와 사물과 건물이 스스로 말하기 시작하는 때이며, 내 상상이나 책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스스로 상호작용하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바늘로 우물을 파는 사람처럼 내가 창조한 이 세상은 어떤 다른 것보다 더 진실해집니다.
아버지도 글을 쓰면서 세월을 보낼 때 이런 종류의 행복을 발견했을 겁니다. 아버지의 여행 가방을 응시할 때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선입관을 갖고 아버지를 보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에게 감사할 것도 많습니다. 아버지는 결코 명령하지도, 하지 말라고 하지도, 지나치게 위선을 부르거나, 벌을 주는 보통의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항상 나를 자유롭게 놓아두면서 내게 최대의 존경을 보여 주었습니다. 내가 자유의 상태이든 또는 순수한 상태이든, 상상력을 끌어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내 어린 시절과 젊었을 때의 많은 친구들과 달리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아버지도 젊었을 때 혼자 있고 싶어 했기 때문에 내가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가슴 깊이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글을 인내심을 갖고 읽어야 하고 호텔방에서 썼던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희망적인 생각을 품으며 그 가방으로 다가갔는데 그때까지 가방은 아버지가 놓아두시던 곳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나는 의지력을 동원하여 몇몇 원고와 노트를 끝까지 읽었습니다. 아버지는 무엇에 대해 썼을까요? 나는 파리의 창문을 통해서 바라본 몇몇 풍경과 몇 편의 시와 역설적인 이야기와 분석한 내용들을 기억합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막 교통사고를 당하여 어떻게 그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하려 애쓰면서도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환자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부 싸움을 하셨는데 두려운 침묵 속에 빠져들 때면 아버지는 즉시 라디오를 켜서 집안의 분위기를 바꾸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음악은 우리들이 그 모든 것을 재빨리 잊어버리도록 도와주곤 했습니다.
이제 그 음악과 같은 역할을 할 것 같은 달콤한 언어로써 분위기를 바꾸어 보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 작가들이 가장 빈번하게 자문하기를 좋아하는 질문은 왜 당신은 글을 쓰는가 입니다. 나는 글을 씁니다. 글에 대한 타고난 욕구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같은 일상적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쓴 책들과 같은 책들을 읽고 싶기 때문에, 여러분 모두에게 화가 나서 결국 모든 사람에게 화가 나기 때문에, 하루 종일 글을 쓰며 방에 앉아 있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삶을 바꾸어야만 진정한 삶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우리 모두와 모든 세상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하여 터키에서 이스탄불에서 계속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종이 냄새와 펜과 잉크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다른 것보다도 문학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고 소설 기법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것이 내 버릇이며 열정이기 때문에, 잊혀질까 봐 두렵기 때문에, 그리고 문학이 가져다주는 영광과 관심을 좋아하기 때문에, 홀로 있고 싶기 때문에 글을 씁니다. 나아가 왜 여러분 모두에게 그렇게 화가 나는지를 이해하고 싶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화가 나는가를 알고 싶기 때문에, 읽혀지고 싶기 때문에, 소설과 에세이와 한 쪽 분량의 글을 일단 쓴 것을 끝내고 싶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내가 글을 쓸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서재의 불멸성에 대하여 어린애 같은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 책이 그 서가에 놓여지리라는 믿음 때문에, 아름답고 풍요로운 모든 삶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흥미롭기 때문에 글을 씁니다.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하여 글을 씁니다. 나아가 내가 꿈속에서처럼 가야 하지만 다다를 수 없는 어떤 장소가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내가 어떻게 하더라도 행복해질 수가 없기 때문에, 행복해지기 위해서 글을 씁니다.
아버지가 내 사무실에 와서 여행 가방을 주고 가신 일주일 뒤에 한 차례 찾아 오셨습니다. 한 통의 초콜릿을 가져 오셨는데 아마 내가 마흔여덟 살임을 잊으셨나 봅니다. 항상 그랬듯이 우리들은 인생과 정치와 가족간의 사소한 사건에 대하여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순간 아버지의 시선이 가방을 두셨던 모퉁이로 시선이 쏠렸고 내가 그 가방을 옮겼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나는 글을 읽어보려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시선을 외면했습니다. 아버지는 알아차렸습니다. 내가 아버지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듯이, 아버지는 자신이 알아차렸다는 것을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눈치는 단 몇 초 동안 일지라도 갈 수 있을 만큼 멀리 뻗었습니다. 아버지는 느긋하고 자신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면서 편하게 살아가는 분이었기 때문에 항상 그랬듯이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아버지가 내 사무실을 떠날 때도 아버지로서 항상 그랬듯이 아버지로서 따뜻한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행복하고 태평스럽고 침착한 아버지의 성품을 부러워하며 평소처럼 아버지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날 나를 부끄럽게 하는 순간적인 환희가 마음속에 떠올랐음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내 삶이 아버지만큼 편안하지 못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버지만큼 행복하거나 구속 없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만 나는 그 삶을 글을 쓰는데 바쳤습니다. 여러분도 이해하다시피 아버지를 희생시켜 그런 생각을 하였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모든 사람 가운데서 아버지는 내 고통의 원인이 결코 아니었으며 오히려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들에게 문학과 글쓰기는 우리 삶의 중심부에 있는 결핍과 연관이 있고 나아가 행복과 죄의식에 연관되어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나 내 이야기에는 그날 다른 어떤 것을 즉시 떠올려 주는 균형감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더 깊은 죄의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아버지가 가방을 나에게 주시기 23년 전, 22살에 내가 작가가 되어야 겠다고 결심한 4년 후에, 모든 다른 것은 포기하고 방에 갇혀 처녀 소설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을 탈고하였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에게 아직 출판되지 않았던 그 소설의 원고를 바쳤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읽고 생각한 바를 말해 주실 분이었습니다. 단순히 아버지의 문학적 취향과 지적인 능력을 신뢰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와 달리 내가 작가가 된다는 소망에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살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며, 2주 후에 아버지가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대문을 열기 위해 나갔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하셨지만 모든 내용을 매우 좋아한다고 말하려는 듯이 두 팔로 나를 감싸 안으셨습니다. 잠시 동안 우리들은 일종의 어색한 침묵에 빠져 들었지만 그것은 크나큰 감정의 순간에 따라오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감정을 삭이며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아버지는 아주 고조되고 과장된 말로써 나와 내 첫 소설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언젠가 지금 여기서 이토록 행복스럽게 갖고 있는 이 상을 받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좋은 평가하여 나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거나 혹은 이 상을 목표로 하라는 취지로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말을 터키인다운 부정으로 자식의 뜻을 지지하면서 언젠가 너는 높은 정치가가 될거야라고 말하는 식의 격려였습니다. 수년 동안 아버지는 나를 보실 때마다 늘 같은 말로 격려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2002년 12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이토록 큰 상을 주신 스웨덴 한림원의 저명한 의원들과 내외 귀빈 앞에 내가 서 있는 오늘, 아버지가 우리들과 함께 계셨으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Orhan Pamuk)는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다른 분야 수상자 8명과 함께 노벨상을 받았으며 시상식에 앞서 7일 스웨덴 한림원에서 행한 아버지에게 바치는 수상 연설로 청중을 감동시켰다. 이후 세계 문단의 화제가 된 연설 제목이 터키어로
--------------------------------------------
모린 프리리(Maureen Freely)가 영어로 번역한 글을 박양근이 재 번역함
박양근(부경대학교 영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번역가), 무단 전재를 금함
ykpark@pknu.ac.kr
-------------------------------------------------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Orhan Pamuk)는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다른 분야 수상자 8명과 함께 노벨상을 받았으며 시상식에 앞서 7일 스웨덴 한림원에서 행한 아버지에게 바치는 수상 연설로 청중을 감동시켰다. 이후 세계 문단의 화제가 된 연설 제목이 터키어로
--------------------------------------------
모린 프리리(Maureen Freely)가 영어로 번역한 글을 박양근이 재 번역함
박양근(부경대학교 영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번역가), 무단 전재를 금함
ykpark@pknu.ac.kr
'세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는 물었다, "오늘은 무슨 실패를 했니?" (0) | 2012.05.08 |
---|---|
자유주의자 이광재 (0) | 2012.04.24 |
[스크랩] 어떤 아이로 키우고 싶으세요? (0) | 2011.03.27 |
[스크랩] 부모님 살아 계실 때 꼭 해드려야 할 45가지 (0) | 2011.03.27 |
[스크랩] 내 아이 창의력 키우는 법 5가지 (0) | 2011.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