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o Hae-woo, a researcher at the private think tank Korea Institute for Future Strategies, said he used to be a hard-line, pro-Pyongyang student activist during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in the 1970s and 1980s. He said he feels that most former activists haven’t changed their positions on North Korean affairs.
Koo Hae-woo, who converted from pro-Pyongyang ideology, discusses pro-North activists. By Ahn Seong-sik |
“At the center of the problem is the Workers’ Party of North Korea. And the ideology of a person never changes easily.”
When it came to some members of the opposition Unified Progressive Party, criticized for their public remarks in favor of the North Korean regime, Koo said that the former pro-Pyongang activists are still working among the South Korean liberals, including the UPP and the main opposition Democratic United Party.
“The former pro-North activists who once operated behind-the-scenes in the party have now appeared before the public, moving to the center of politics,” Koo said.
He was one of 20,000 students who were members of the so-called “Group for Independence, Democracy and Unification,” known as a secret organization that was in active contact with the North Korean regime.
The group’s members were arrested on charges of violating the National Security Law in 1990, and Koo was sentenced to two years and six months in prison at the time.
Koo said that members denounced the U.S. government because they believed that the U.S. allowed South Korea’s dictatorial administration to commit the May 18 Gwangju Massacre.
“When the Korean Air flight was blown up by North Korean spies in 1987, Pyongyang ordered us to condemn the incident as a ‘plot of the U.S. CIA and the South Korea’s national intelligence agency,’ through a North Korean state radio station,” Koo said. “We believed that was the truth.”
“We spread Pyongyang’s propaganda nationwide,” Koo said. “An Hee-jung, the incumbent governor of South Chungcheong provincial government, was a member of an anti-U.S. student group and directed the work.”
After being released in 1994, he went to China and met some North Korean officials and workers there, realizing the reality of the failed state.
In 2000, when the historic inter-Korean talk was held, the SK Group assigned him to a business negotiation with North Korean officials. He took a business trip to Pyongyang in June 2001. At the time, Koo said a North Korean official told him, “Comrade Koo, the ‘dear leader’ Kim Jong-il wants to see you,” but he rejected the invitation, saying “I don’t have anything to negotiate with him anymore.”
During the negotiation with the North, Koo said, “You have to think about your regime if you indeed want to live independently.” A North Korean official threatened, “You son of a bitch, we won’t let you leave Pyongyang.”
“Those former pro-North activists strategically create suspicions,” Koo said. “We need to think about how they create and spread the suspicions and whether the North Korean Workers’ Party is behind the move or not.”
By Kang In-sik [heejin@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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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적 주사파 리더에서 자본주의 첨병으로. 구해우(47·사진) 미래전략원구원 이사장의 변신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는 ‘강철서신’의 김영환(49)만큼 유명하진 않으나, 1980년대 자생적 주사파를 이끌었다. 90년 2만 명 규모의 자주민주통일그룹(자민통) 사건으로 징역 2년6개월형을 선고 받았다. 2001년엔 SK그룹의 대북교류 담당 상무가 돼 북을 오갔다. 26일 서울 서소문동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주체사상과 결별하고도 그 잔영이 10년은 가더라”며 말문을 열었다.
구씨는 “주사파를 이해해야 한국 사회와 정치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87년 KAL기 폭파 사건과 음모론을 예로 들었다. 당시 주사파의 주류 지하조직은 반미청년회(책임자 조혁)였다. 주사파는 ‘총책’이란 표현을 안 쓰고 ‘책임자’라고만 했다. 중심은 오직 북한 노동당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중앙방송(단파 라디오)과 ‘구국의 소리’를 통해 지하조직에 ‘KAL기 폭파 사건은 미국 CIA와 안기부의 음모’로 규정하는 지침을 내렸다. 그땐 그걸 진실이라고 믿었지만…. 조직의 방송팀은 방송 녹취록을 만들어 전국에 뿌렸다. 반미청년회 조직부장이던 안희정 현 충남지사도 그 일을 지휘했다. 주사파는 전략적으로 사회의 약한 고리를 치고 들어온다. 밑에서부터 의혹을 양산하고 사람들을 의심하게 만든다. 천안함 사건을 보면서 이때가 생각났다. 그런 의혹이 어디서 생산되고, 어떻게 확산되는지, 혹시 그 배후에 주사파와 북한 노동당이 있는 건 아닌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KAL기 사건 때 주사파의 메커니즘을 직접 작동시켰던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다.”
구씨에 따르면 주사파가 조직의 목적을 ‘노동당과 연계된 사상적·조직적 활동’이라고 명확히 규정한 것도 이때다.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해서는 “간접적 영향을 미치던 주사파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주사파가) 직접 권력의 중심으로 간 거다. 그게 느껴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거다.”
그는 이어 부정경선 의혹으로 사퇴 압력을 받고 있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당선인을 “한 스테이지의 스쳐가는 인물일 뿐 본질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본질은 북한 노동당이다. 그리고 사람의 사상은 절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는 이번 사태를 매개로 한국 정치에 대한 주사파의 영향을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합진보당뿐 아니라 민주통합당도 주사파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이란다.
그럼 그는 어떻게 주사파가 되고, 지하조직의 책임자에까지 오르게 됐을까. 광주 민주화운동의 사진 한 장이 84년 고려대 법대 1학년이던 그를 움직였다. 사시 패스가 꿈이었던 빈농의 아들은 그 길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60~70년대 서클 수준이던 종북단체가 대규모 지하조직의 틀을 갖춘 건 80년대 들어서다. 그 배경엔 광주가 있었다. ‘미국의 용인 하에 독재정권이 광주시민을 학살했다’는 인식에 따라 반미와 반독재가 동거를 시작했다. 사상적으로 이를 뒷받침한 게 ‘강철서신’과 ‘예속과 함성(소책자)’이었다.
북한 중앙방송의 ‘주체사상 교육방송’은 주사파의 경전이었고, 또 다른 북한 방송 ‘구국의 소리’는 투쟁지침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80년대 주사파 3대 조직이 구학련·반미청년회·자민통이다. 90년대엔 남파 공작원이 적극 개입한 지하조직이 생겨난다. 대표적인 게 구학련에 뿌리를 둔 김영환씨의 민혁당이다.
주사파의 비주류였던 구씨는 87년 새로운 주사파 조직을 결성해 나갔다. “87년 10월 인천의 주사파 노동운동 조직을 찾아가 ‘당신네 조직의 책임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들은 내 행적과 사상을 수차례 검증했다. 두 차례 연결고리를 거쳐 책임자와 만나, 주체사상 중심의 노학(勞學)연대를 이끌어냈다.” 그렇게 자민통이 구성됐다. 그는 다른 주사파 조직인 ‘새벽그룹’과 연계하면서 전국적인 지하조직을 형성했다. 지하조직원은 200명이었지만, 그들의 지침을 받는 전국의 활동가는 수만 명이었다. 반미청년회를 능가하는 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다 90년 10월 자민통 내 한국외대 방송팀이 안기부에 발각됐다. 그는 3개월마다 거처를 바꾸며 1년5개월간 도망 다니다 92년 2월 검거됐다. 2년6개월형을 선고 받은 후 1년3개월로 감형됐다. 그는 감옥에서 앨빈 토플러와 제러미 리프킨을 읽기 시작했다. 소련과 동구권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던 때다. 사회주의가 역사의 마지막 발전단계가 아니라는 팩트가 머리를 쳤다. 94년 출소 뒤 10년 전 자신을 지하조직으로 이끌었던 선배와 중국에 갔다. 당 간부와 공장장과 노동자를 만났다. 사회주의를 보고서야 사회주의와 결별했다.
하지만 주체사상의 잔영은 남아 있었다. 인간 중심의 자주적 세계관에 빠졌던 20대 청년에겐 마치 종교였다. 그런데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됐고, SK그룹이 경협 업무를 그에게 맡겼다. 2001년 6월 평양공항. 하늘에서 본 북한은 온통 민둥산이었다. 헐벗은 북한, 그리고 젊은 시절의 이상향. 그 사이의 괴리감이 참담했다. 고려호텔로 지도원 한 명이 찾아왔다.
“자민통 지도원 동지. 존경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님께서 보고 싶어 하시오.”
“위원장님을 만나도 더 협의할 게 없소.”
그는 북한 간부들과 사업 논의를 했다. 계약조건을 깐깐하게 따졌다. “자주적으로 살려면 당신들 더 고민해야 한다”고 쓴소리도 했다. 북 간부가 말했다. “너 이 새끼, 그냥 안 둔다. 평양에서 못 나가는 수가 있어.” 그렇게 SK에서 2년반 동안 대북 사업을 하며 북한을 알아갔다. 지금은 ‘북한 선진화 운동’을 하고 있다.
◆자민통=‘자주민주통일’의 준말로 민족민주해방(NL) 학생운동 계열의 분파 중 하나. 1987년 이후 ‘반미청년회’가 해체된 뒤 ‘조통그룹(조국통일촉진그룹)’ ‘반제청년동맹’ ‘관악자주파’ 등과 함께 대학가 4대 NL 주사그룹으로 성장했다. 북한 방송을 들으면서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노동자·학생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