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 원' 박정희 사망 가장 먼저 안 전두환은…
[박정희 권력의 DNA] 박정희 후계, 보안사가 검경 지휘하는 병영국가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기사입력 2012-06-21 오후 1:24:03
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시국동향과 정치정보에 야생동물과도 같은 후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후각은 공부해서 얻는 지적 능력과 달리 일종의 체질이다. 정치군인으로서 체질을 타고났던 셈이다. 육사 재학 중 공부보다는 축구 같은 운동부 쪽에 더 열의를 보였다. 군 지휘관으로서도 야전 보다는 청와대를 지키는 수경사 30단장과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같은 박정희의 친위대 노릇을 한 것이 주요 보직이었다.
전두환 육사성적, 156명 중 126등으로 꼴찌 수준
노태우 67등 ㆍ 정호용 86등 ㆍ 권익현 55등 중간 정도
그의 육사 졸업성적은 126등으로 11기 전체 졸업생이 156명이었으니까 거의 꼴찌 수준이었다. 그러나 어떤 동기생보다도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전두환과 함께 군내 정치장교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한 11기생들의 성적은 대체로 중간 정도였다. 대구 출신으로 하나회 회원이었지만 가장 색깔이 약했던 김복동(예비역 중장. 국민당 국회의원 역임)이 13등으로 가장 좋은 편이었다. 나머지는 △노태우(전 대통령) 67등 △ 권익현(민자당 사무총장 역임) 55등 △정호용(국방장관 역임) 86등 △손영길(수경사 참모장 역임) 81등 등으로 중간 정도였다. 하나회는 아니지만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고위직 인사로는 수석졸업한 김성진이 과기처장관을 지냈고 전 국방장관 이기백 59등, 전 국방장관 이상훈 85등이다.
전두환의 그런 정치적 후각을 높이 사고 친위대장으로 키워낸 장본인이 대통령 박정희였지만 거기에는 영남군벌의 입김도 크게 작용했다. 박정희는 김재규의 10.26거사로 자신의 생애에 마지막 해가 된 1979년 초 친위대장을 곁에 두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 시국이 뒤숭숭할수록 친위대장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에 오르기 직전 박정희 정권의 권력구조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 보안사령관 진종채, 수경사령관 전성각, 그리고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73년 봄 윤필용 사건 이후 주요 군 인사는 서종철(육참총장 국방장관 대통령안보특보 역임), 노재현(육참총장 국방장관 역임), 진종채(보안사령관 2군사령관 역임) 등 영남군벌 3인방에 의해 요리됐다. 이들은 모두 경상도 동향 출신으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군 경력을 자랑했다. 이들은 하나회의 후원세력이었다. 하나회는 군 장교들의 성분을 4개로 분류했다. 첫째 핵심세력은 자신들 하나회 회원이고, 둘째로 하나회에 밀접한 후원세력, 셋째는 하나회에 간접적인 지원세력, 넷째가 하나회에 대한 견제세력이었다.
영남 군벌에서 특히 서종철은 군내 성골이라 할만 했다. 그는 1972년 육참총장을 마친 뒤 바로 청와대 안보특보, 73~77년 4년 이상에 걸쳐 국방장관, 78년 재차 청와대 안보특보로 들어갔다. 이같은 군부 고위직에 계속 중용되면서 그는 박정희의 군 통수권행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1군사령관과 육참총장을 지내면서 하나회 핵심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점이다. 전두환 노태우 대령이 그가 육참총장 시절 최측근인 수석부관 자리를 앞뒤로 인수인계했다. 이때 육사17기 하나회의 중심인물인 김진영 소령이 전속부관이었다. 자신의 직계부하가 둘씩이나 대통령에 오른 예도 그 이외에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재현 국방 등 영남군벌이 합의 추천
박정희에게 운명의 해인 1979년 2월 중순경, 국방부장관 노재현이 신임 보안사령관 인사안을 갖고 청와대로 올라갔다. 당시 보안사령관 진종채는 2군사령관 영전이 내정돼 있었다.
박정희는 인사자력표를 들여다보다가 약간 주저했다.
"이제 막 사단장을 마쳤는데, 너무 이르지 않을까 ‧ ‧ ‧ "
그는 특히 윤필용 수경사령관 사건 이후 보안사령관과 수경사령관의 위계서열을 정해야 군부내 질서가 잡힌다고 판단했다.
통상 두 명 이상의 복수안에 순위를 매겨 올려야 하는 인사안이 전두환 단독후보로 돼 있었다. 영남군벌 내부에서 이미 구수회의를 마친 노재현은 소신 있게 밀었다.
"각하, 이만한 적임자를 따로이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서종철 특보나 진종채 사령관도 같은 의견입니다."
박정희는 의심이 많아 막료들이 어느 하나의 안을 강력히 진언하면 그것을 다른 선택안으로 바꾸어 결정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그즈음 그는 주색으로 흐트러진 사생활 때문에 심약해진데다 의욕도 전만 못했다. 그는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인사안에 그대로 결재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임명에 이견
노재현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나오자 으레 그랬듯이 좀 만나고 가라는 전갈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호실장 차지철이 보안사령관 인사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각하께서 결재하실 때 뭐라고 안 하시던가요?"
노재현은 사실대로 얘기해 주었다.
"글쎄, 그것은 각하께서 이의를 표시하신 건데 그냥 결재를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차지철은 핀잔투로 말했다. 그는 영남군벌이 아니어서 그쪽 인물이 권력의 한 축인 보안사령관에 오르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노쇠한 박정희가 예전처럼 철저하게 챙기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파고들 여지는 많았다. 그러나 영남군벌이 버티고 있는 군부 인사는 관여하기가 쉽지 않았다.
박정희는 전두환을 전방 1사단장에서 일약 보안사령관으로 두 단계 이상 월반시켜 파격 중용했다. 보통은 사단장에서 군단장급 보직을 거쳐 계급도 중장이 돼야 보안사령관에 발탁했다. 그런데 이런 관례를 깨고 보안사령관에 조기 발탁된 것이 전두환의 경우였다. 군내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것이 박정희 권력의 DNA를 후계정권에 이어주는 끈이었음을 당시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에 진출했을 때 그를 견제해야 할 다른 권력자들은 그 이전 유신1기의 인물들에 비해 '자질'면에서 떨어졌다. 유신1기까지 박 정권의 핵심인사들은 그동안 권력경쟁이나 돌발사건의 와중에서 휩쓸려나갔다. 청와대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으로 박정희의 곁에 가장 오래 있던 이후락은 1973년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으로 실각했다. 종신경호실장처럼 보이던 박종규는 74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에 책임지고 물러나야 했다. 군내 책사로 써먹을 만하던 보안사령관 강창성도 하나회 수사를 강행하다가 영남군벌의 반발에 밀려 좌천당했다.
박정희의 속마음을 헤아리는 수족으로서나 통치권 관리의 기술 차원에서 이들 유신1기의 막료들이 일류라면 그 이후엔 핀치히터들이 등장한 격이었다. 거기다 박정희 자신의 심리불안정 상태와 판단력 상실까지 겹쳐졌다. 이것이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살해한 10.26사건과 반인륜적 군사반란인 12.12사건가 일어난 환경요인이었다.
합수부장 전두환,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 불러 회의
전두환이 10.26 이후 권력자로 떠오르는데 결정적인 요인은 합동수사본부장 자리였다. 박정희는 계엄령과 전시에 보안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정보수사기관들의 수장이 되도록하는 대통령령을 하달했다. 이것이 검토돼 오다가 수사기관간의 균형이 안 맞아 보류돼 있었다. 박정희는 이것을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으로 기용한 직후 시행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합동수사본부는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중앙정보부 차장이 참석하도록 돼 있었다. 아무리 비상시라고 해도 이야말로 병영국가 체제였다. 군 보안사령관이 검찰 경찰 정보부를 지휘하는 구조였다.
10.26 다음날인 10월27일 새벽 전두환은 보안사로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중정 차장 등 수사기관장을 불러 합동수사본부 첫 회의를 연다. 새벽 4시, 대통령 유고를 사유로 한 계엄령이 선포됐고 이어 바로 합수부가 구성된 것이다. 전두환이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했다. 이어 그는 청와대로 가 비서실장 김계원으로부터 사건 전모에 대해 경위를 청취한다.
"시신은 코드원"…전두환, 박정희 사망 맨 먼저 알고 대처
그때 전두환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박정희 사망을 그날 궁정동 비밀연회장에 참석했던 권력자들 외에 가장 먼저 알았던 사람이 전두환이었다. 그만큼 비상대처에 처신하는 기민성이 남달랐다.
박정희의 시신이 국군수도통합병원 분원에 도착한 것은 그날 밤 7시57분이었다고 병원장 김병수 준장이 법정에서 증언했다. 병원장 김병수는 시신의 얼굴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얼굴이 피로 흠뻑 젖은 수건으로 가려져 있었고 중정 경비원 둘이서 보안조치라며 들여다보지 못하게 제지했다. 그가 시신의 신원을 확인한 것은 사망진단을 하기 위해 복부를 들추어 보았을 때였다. 배꼽 아래 흰 반점이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박 대통령이 흰 반점을 제거할 수 없겠느냐며 보여 준 일이 있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하고 숨이 가빠짐을 느꼈다. 사태를 보안사에 알려야 하는데 중정 경비원 둘의 감시가 심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한 시간여 뒤에 전화가 아닌 인터폰이 울렸다. 보안사와 연결된 인터폰이었다. 감시원은 눈을 번득였다. 인터폰 목소리는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이었다.
△우국일 : 보안사 참모장입니다. 김 장군, 지금 상당히 위협적이고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 같은데요. 곤란하면 설명은 하지 말고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세요. 병원에 들어 온 환자는 돌아가셨습니까?
△김병수 : 네.
△우국일 : 혹시 실장입니까?
△김병수 : 아니, 그런 거 없습니다.
△우국일 : …? 그러면 코드 원입니까?
△김병수 : 네.
우국일은 전화기를 던지듯이 끊고 사령관 전두환의 자동차 무선전화를 호출했다.
△우국일 : 사령관님, 코드 원이 유고입니다. 지금 국군통합병원 분원에서 확인했습니다.
△전두환 : 무어라 코드 원…! 보안조치 철저히 하고, 내 지금 사령부에 들어가겠소.
전두환은 가던 길에서 차를 돌려 급히 보안사로 향하게 했다. 그의 권력 게임과 친위대로서 보복 행보가 시작되는 것이다.
전두환이 권력 전두환 육사성적, 156명 중 126등으로 꼴찌 수준
노태우 67등 ㆍ 정호용 86등 ㆍ 권익현 55등 중간 정도
그의 육사 졸업성적은 126등으로 11기 전체 졸업생이 156명이었으니까 거의 꼴찌 수준이었다. 그러나 어떤 동기생보다도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전두환과 함께 군내 정치장교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한 11기생들의 성적은 대체로 중간 정도였다. 대구 출신으로 하나회 회원이었지만 가장 색깔이 약했던 김복동(예비역 중장. 국민당 국회의원 역임)이 13등으로 가장 좋은 편이었다. 나머지는 △노태우(전 대통령) 67등 △ 권익현(민자당 사무총장 역임) 55등 △정호용(국방장관 역임) 86등 △손영길(수경사 참모장 역임) 81등 등으로 중간 정도였다. 하나회는 아니지만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고위직 인사로는 수석졸업한 김성진이 과기처장관을 지냈고 전 국방장관 이기백 59등, 전 국방장관 이상훈 85등이다.
▲10.26사건 합동수사와 12.12군사반란을 지휘한 전두환 보안사령부의 핵심 간부들은 대부분 하나회였다. 앞줄 왼쪽부터 기획조정처장 최예섭, 참모장 우국일, 사령관 전두환, 육군본부 보안부대장 변규수, 대공처장 남종웅, 뒷줄 왼쪽부터 인사처장 허삼수, 군수처장 이차군, 한 사람 건너 정보처장 권정달, 보안처장 정도영, 한 사람 건너 국방부 보안부대장 김병두, 비서실장 허화평, 교육대장 백제구, 감찰실장 이상연. |
전두환의 그런 정치적 후각을 높이 사고 친위대장으로 키워낸 장본인이 대통령 박정희였지만 거기에는 영남군벌의 입김도 크게 작용했다. 박정희는 김재규의 10.26거사로 자신의 생애에 마지막 해가 된 1979년 초 친위대장을 곁에 두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 시국이 뒤숭숭할수록 친위대장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에 오르기 직전 박정희 정권의 권력구조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 보안사령관 진종채, 수경사령관 전성각, 그리고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73년 봄 윤필용 사건 이후 주요 군 인사는 서종철(육참총장 국방장관 대통령안보특보 역임), 노재현(육참총장 국방장관 역임), 진종채(보안사령관 2군사령관 역임) 등 영남군벌 3인방에 의해 요리됐다. 이들은 모두 경상도 동향 출신으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군 경력을 자랑했다. 이들은 하나회의 후원세력이었다. 하나회는 군 장교들의 성분을 4개로 분류했다. 첫째 핵심세력은 자신들 하나회 회원이고, 둘째로 하나회에 밀접한 후원세력, 셋째는 하나회에 간접적인 지원세력, 넷째가 하나회에 대한 견제세력이었다.
영남 군벌에서 특히 서종철은 군내 성골이라 할만 했다. 그는 1972년 육참총장을 마친 뒤 바로 청와대 안보특보, 73~77년 4년 이상에 걸쳐 국방장관, 78년 재차 청와대 안보특보로 들어갔다. 이같은 군부 고위직에 계속 중용되면서 그는 박정희의 군 통수권행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1군사령관과 육참총장을 지내면서 하나회 핵심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점이다. 전두환 노태우 대령이 그가 육참총장 시절 최측근인 수석부관 자리를 앞뒤로 인수인계했다. 이때 육사17기 하나회의 중심인물인 김진영 소령이 전속부관이었다. 자신의 직계부하가 둘씩이나 대통령에 오른 예도 그 이외에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재현 국방 등 영남군벌이 합의 추천
박정희에게 운명의 해인 1979년 2월 중순경, 국방부장관 노재현이 신임 보안사령관 인사안을 갖고 청와대로 올라갔다. 당시 보안사령관 진종채는 2군사령관 영전이 내정돼 있었다.
박정희는 인사자력표를 들여다보다가 약간 주저했다.
"이제 막 사단장을 마쳤는데, 너무 이르지 않을까 ‧ ‧ ‧ "
그는 특히 윤필용 수경사령관 사건 이후 보안사령관과 수경사령관의 위계서열을 정해야 군부내 질서가 잡힌다고 판단했다.
통상 두 명 이상의 복수안에 순위를 매겨 올려야 하는 인사안이 전두환 단독후보로 돼 있었다. 영남군벌 내부에서 이미 구수회의를 마친 노재현은 소신 있게 밀었다.
"각하, 이만한 적임자를 따로이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서종철 특보나 진종채 사령관도 같은 의견입니다."
박정희는 의심이 많아 막료들이 어느 하나의 안을 강력히 진언하면 그것을 다른 선택안으로 바꾸어 결정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그즈음 그는 주색으로 흐트러진 사생활 때문에 심약해진데다 의욕도 전만 못했다. 그는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인사안에 그대로 결재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임명에 이견
노재현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나오자 으레 그랬듯이 좀 만나고 가라는 전갈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호실장 차지철이 보안사령관 인사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각하께서 결재하실 때 뭐라고 안 하시던가요?"
노재현은 사실대로 얘기해 주었다.
"글쎄, 그것은 각하께서 이의를 표시하신 건데 그냥 결재를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차지철은 핀잔투로 말했다. 그는 영남군벌이 아니어서 그쪽 인물이 권력의 한 축인 보안사령관에 오르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노쇠한 박정희가 예전처럼 철저하게 챙기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파고들 여지는 많았다. 그러나 영남군벌이 버티고 있는 군부 인사는 관여하기가 쉽지 않았다.
박정희는 전두환을 전방 1사단장에서 일약 보안사령관으로 두 단계 이상 월반시켜 파격 중용했다. 보통은 사단장에서 군단장급 보직을 거쳐 계급도 중장이 돼야 보안사령관에 발탁했다. 그런데 이런 관례를 깨고 보안사령관에 조기 발탁된 것이 전두환의 경우였다. 군내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것이 박정희 권력의 DNA를 후계정권에 이어주는 끈이었음을 당시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에 진출했을 때 그를 견제해야 할 다른 권력자들은 그 이전 유신1기의 인물들에 비해 '자질'면에서 떨어졌다. 유신1기까지 박 정권의 핵심인사들은 그동안 권력경쟁이나 돌발사건의 와중에서 휩쓸려나갔다. 청와대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으로 박정희의 곁에 가장 오래 있던 이후락은 1973년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으로 실각했다. 종신경호실장처럼 보이던 박종규는 74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에 책임지고 물러나야 했다. 군내 책사로 써먹을 만하던 보안사령관 강창성도 하나회 수사를 강행하다가 영남군벌의 반발에 밀려 좌천당했다.
박정희의 속마음을 헤아리는 수족으로서나 통치권 관리의 기술 차원에서 이들 유신1기의 막료들이 일류라면 그 이후엔 핀치히터들이 등장한 격이었다. 거기다 박정희 자신의 심리불안정 상태와 판단력 상실까지 겹쳐졌다. 이것이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살해한 10.26사건과 반인륜적 군사반란인 12.12사건가 일어난 환경요인이었다.
합수부장 전두환,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 불러 회의
전두환이 10.26 이후 권력자로 떠오르는데 결정적인 요인은 합동수사본부장 자리였다. 박정희는 계엄령과 전시에 보안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정보수사기관들의 수장이 되도록하는 대통령령을 하달했다. 이것이 검토돼 오다가 수사기관간의 균형이 안 맞아 보류돼 있었다. 박정희는 이것을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으로 기용한 직후 시행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합동수사본부는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중앙정보부 차장이 참석하도록 돼 있었다. 아무리 비상시라고 해도 이야말로 병영국가 체제였다. 군 보안사령관이 검찰 경찰 정보부를 지휘하는 구조였다.
10.26 다음날인 10월27일 새벽 전두환은 보안사로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중정 차장 등 수사기관장을 불러 합동수사본부 첫 회의를 연다. 새벽 4시, 대통령 유고를 사유로 한 계엄령이 선포됐고 이어 바로 합수부가 구성된 것이다. 전두환이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했다. 이어 그는 청와대로 가 비서실장 김계원으로부터 사건 전모에 대해 경위를 청취한다.
"시신은 코드원"…전두환, 박정희 사망 맨 먼저 알고 대처
그때 전두환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박정희 사망을 그날 궁정동 비밀연회장에 참석했던 권력자들 외에 가장 먼저 알았던 사람이 전두환이었다. 그만큼 비상대처에 처신하는 기민성이 남달랐다.
박정희의 시신이 국군수도통합병원 분원에 도착한 것은 그날 밤 7시57분이었다고 병원장 김병수 준장이 법정에서 증언했다. 병원장 김병수는 시신의 얼굴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얼굴이 피로 흠뻑 젖은 수건으로 가려져 있었고 중정 경비원 둘이서 보안조치라며 들여다보지 못하게 제지했다. 그가 시신의 신원을 확인한 것은 사망진단을 하기 위해 복부를 들추어 보았을 때였다. 배꼽 아래 흰 반점이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박 대통령이 흰 반점을 제거할 수 없겠느냐며 보여 준 일이 있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하고 숨이 가빠짐을 느꼈다. 사태를 보안사에 알려야 하는데 중정 경비원 둘의 감시가 심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한 시간여 뒤에 전화가 아닌 인터폰이 울렸다. 보안사와 연결된 인터폰이었다. 감시원은 눈을 번득였다. 인터폰 목소리는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이었다.
△우국일 : 보안사 참모장입니다. 김 장군, 지금 상당히 위협적이고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 같은데요. 곤란하면 설명은 하지 말고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세요. 병원에 들어 온 환자는 돌아가셨습니까?
△김병수 : 네.
△우국일 : 혹시 실장입니까?
△김병수 : 아니, 그런 거 없습니다.
△우국일 : …? 그러면 코드 원입니까?
△김병수 : 네.
우국일은 전화기를 던지듯이 끊고 사령관 전두환의 자동차 무선전화를 호출했다.
△우국일 : 사령관님, 코드 원이 유고입니다. 지금 국군통합병원 분원에서 확인했습니다.
△전두환 : 무어라 코드 원…! 보안조치 철저히 하고, 내 지금 사령부에 들어가겠소.
전두환은 가던 길에서 차를 돌려 급히 보안사로 향하게 했다. 그의 권력 게임과 친위대로서 보복 행보가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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