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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던 인생

도보사랑 2013. 5. 8. 12:01

폼 잡던 '갑' 인생이여 안녕, 꿈꾸던 '을' 인생 산다

[중앙일보]입력 2013.05.08 03:30 / 수정 2013.05.08 11:35

외교관 접고 우동집 낸 신상목 기리야마 대표

한 외교관이 있었다. 8학군 명문고를 나와 명문대를 거쳐 외무고시 합격이라는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승승장구하던 남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다 내려놓고 우동집을 냈다.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가족은 더더욱 그의 편이 될 수 없었다. 그나마 아내는 반쯤 체념했지만 딸은 한동안 그와 말도 섞지 않았다.
온갖 면책 특권을 누리던 갑(甲) 인생에서 때론 치사함도 견뎌야 하는 을(乙) 인생으로의 바뀜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그는 말했다.
이게 내가 진짜 원하던 일이라고.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고 가슴이 설렌다고. 역삼동에 있는 일식집 기리야마 신상목(43) 대표의 인생극장 2막 얘기다.

신 대표을 만나고 나서 든 생각은 ‘아, 이 사람 헨진(變人·괴짜)이구나’였다. 헨진이란 재능은 있지만 다소 별난 사람을 말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짱’ 경력도 범상치는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일본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불법 복제본 『씨티헌터』(선정적이고 폭력적이라 19금 딱지가 붙은 만화)라거나 ‘폼’ 날 것 같아 외교관이 됐다는 답변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는 “외교부에 있을 때도 천재와 싸가지라는 양 극단의 별명으로 불렸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사직서를 내자 ‘돌아이’라는 별명이 추가됐다. 그런데 우동집 사장이 된 지 5개월째인 신 대표는 자신을 돌아이라고 부른 옛 동료들을 향해 “내심으론 내가 부러울 것”이라고 했다. “나이 40이 되니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칠까 하는 미혹에서 벗어나더라”는 이 불혹(不惑)의 남자에게 우리가 뭘 부러워하면 되는지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사진 위로부터 준비기획단 의전과장으로 참여했던 2012년 서울핵안보정상회의를 마친 후. 2011년 1월 신상목 대표가 도쿄의 기리야마를 찾아가 우동 뽑는 기술을 배우는 모습. 2012년 9월 역삼동에 기리야마를 오픈 하자마자 도쿄 기리야마 관계자들이 방문했다. 신 대표의 딸(중 3)이 그린 그림.
-우동집을 창업한 결정적 계기가 2008년 9월 파키스탄에서 벌어진 테러사건으로 알고 있다.

 “당시 주파키스탄 대사관에 있었다. 그해 여름 200여 명이 테러로 사망했을 정도로 정정이 불안했다. 치안 문제로 부임 직후부터 한 달 동안 외교단지 안에만 처박혀 있는 게 하도 답답해 큰 맘 먹고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메리어트 호텔 일식당에 가족과 함께 가기로 했다. 원래 예약시간은 오후 6시였다. 그날따라 좀 늦게 출발했는데 6시10분에 폭탄이 터졌다. 100명이 넘게 죽었다. 다음날 사망자 명단을 확인하면서 죽음은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구나 깨달았다. 예약시간에 맞춰 갔다면 사망자 명단에 내가 있었을 게 아닌가. 문득 불안해졌다. 죽을 때 하고 싶은 일을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 늦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테러 발생 열흘 정도 지난 뒤 일본 도쿄에 있는 우동집 기리야마의 사장 할아버지(※신 대표가 이렇게 부른다)에게 손편지를 써서 보냈다. 우동집을 열고 싶다고.”

-원래 인연이 있었나.

 “2000년 일본 연수 시절에 우연히 갔다. 메이지 시대부터 3대째 영업하고 있는 유서 깊은 가게다. 진하고 깊은 우동 맛이 인상 깊었다. 2006년 주일대사관에 1등 서기관으로 부임해 다시 찾았는데 그때 충격을 받았다. 맛·정취·사람, 모든 게 6년 전 그대로였다. 한국처럼 악다구니를 써가며 급하게 개발하고, 부수고, 바꾸지 않는 게 무척 좋았다. 2년간 일본에 있으면서 시간 날 때마다 찾아갔다. 주인 할아버지를 비롯해 그 집 가족과도 친해졌다. 그러면서 언젠가 이런 우동집을 차렸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됐다. 공무원을 10년 넘게 해보니 안정적인 건 좋지만 너무 뻔한 미래가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안정성이 공무원의 최고 장점 아닌가. 그것 때문에 지원한 게 아닌가.

 “대학에 와서야 외무고시라는 걸 알았다. 합격하면 사회적으로 ‘폼’도 좀 날 것 같고 외국 생활을 한다니 좋아보이더라. 갑자기 외교관을 동경하게 됐다. 치열한 고민 없이 쉽게 결정을 내버렸다. 이미지에 좌우된 거다.”

-그래도 잘 이해가 안 된다. 조직에서 잘나가지 못해 내린 결정 아닌가.

 “솔직히 외교관으로서 일본 근무 경력은 좋은 코스다. 외교부에서 일본통은 일종의 지분이다. 하지만 난 조직생활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인간은 모이면 어리석어진다. 예컨대 위에서 어떤 지시를 내린다고 치자. 그게 단계를 거쳐 내려오는 동안 완전히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개인이 바보라서가 아니다. 조직이 갖는 필연적인 약점이다. 성격상 난 그냥 넘어가기가 어렵더라. 그래서 내 가게를 차리게 된 것 같다.”

-한국에서 우동집을 열겠다고 하니 기리야마 주인은 좋아했나.

 “전혀. 말렸다. 대사 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으니 외교관으로서 충실하라고 하더라. 일본 사회도 관직, 특히 외교관에 대한 동경이 있다. 하지만 테러 이후 내 가치관이 이미 완전히 바뀐 상태였다. 진지하게 계속 부탁하니까 결국 허락했다. 별다른 조건을 걸지 않고 최선을 다해 도와줬다. 상호는 물론이고 국수·간장을 비롯한 각종 재료도 기리야마와 같은 것을 사용한다.”

-장사는 잘 되나.

 “지난해 11월 개업 이후 계속 적자다. 버티는 중이다. 내 목표가 오는 손님의 20%만 잡자는 거다. 확실한 단골 손님만 확보하면 성공할 수 있다. 우동은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음식이기 때문에 타깃 층이 넓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구상했던 대로 흘러가는 것 같다. 내가 마흔 살 넘어 확신하는 진리가 있다.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거다. 물론 전제가 있다. 설계가 잘 돼야 한다. 난 설계를 잘 했기 때문에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있다.”

-한국 샐러리맨 다수가 창업을 로망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돈이 없어 현실에 옮기지 못한다. 당신은 경제적인 형편이 여유로운 덕을 본 게 아닌가.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강남에서 잘 사는 축에 속하진 않았다. 아버지가 직업군인이었는데 별을 달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지금 집도 청담동에서 제일 싼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다. 아내는 전업주부라 따로 수입도 없다. 청담동에 살게 된 건 처가(삼성동)에서 가까워서다. 2008년 테러 사건 이후 가족을 한국으로 먼저 돌려보냈을 때 장인어른이 편찮으셔서 아내가 간호를 해야 했다. 가게를 내는 데는 6억원이 들었다. 절반만 내 돈이고 나머지는 다 여기저기서 빌렸다. 돈이 아까워 내 가게에서도 아사히 맥주 못 마시고 맥스 마신다. 와인은 회원제 할인매장인 코스트코에 가서 2L에 3만원 정도 하는 걸 사다 마신다.”

-개업할 때 가족들 반응이 궁금하다.

 “어휴…, 반대가 엄청났다. 처음에는 내가 장난치는 줄 알더라. 테러 사건 후 내가 사업하겠다고 했더니 아내는 ‘그래, 이혼 도장 찍고 나서’라고 태연하게 받았다. 나중에 진심인 걸 알고는 기겁했다. 설득하는 데 4~5년 걸렸다. 특히 딸(현재 중 3)이 제일 싫어했다. 개업 날까지 나랑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외교관이면 폼이 나기도 하겠지. 그보다 내가 가만히만 있으면 자기는 한국식 공부 안 하고 외국에서 국제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는데 그게 안 되니 실망이 컸던 모양이다. 딸이 면(麵)을 좋아해 ‘아주 맛있는 우동집을 하면 좋지 않으냐’고 꾀었더니 ‘사먹으면 되지’라고 차갑게 되받아쳤다. 딸 설득이 가장 힘들었다. 내가 이기적인지는 몰라도 가장인 내가 행복해야 가족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계속 딸을 설득했고, 지금은 괜찮다. 친구들도 데려온다.”

-외교관을 그만두며 당장 떠오른 문제가 교육일 것 같다. 강남에서 중학교 3학년 자녀를 키우려면 신경써야 하는 게 한둘이 아닐 텐데 어떻게 뒷바라지하나.

 “딸이 일본(5년)·미국(1년)·파키스탄(2년)에서 교육을 받다 보니 한국식 교육시스템에서 공부하는 걸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은 적응해 잘 다니고 있다. 특별히 사교육을 받는 건 없다. 단지 딸이 그림을 좋아해 미술 교습은 시킨다. 미국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한국 화가에게 배우는 건데 주로 미국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한 학생들이 같이 배운다. 일반 학원과는 다르다. 입시를 위한 데생 교육 같은 게 아니라 어떻게 그리면 표현력이 더 좋아지는지를 가르친다.”

-당신은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을 다녔는데 아이한테 너무 무심한 거 아닌가.

 “부모가 자식의 사회생활까지 감당하는 건 한계가 있다. 설령 부모 도움으로 수퍼 학벌을 가진다 해도 결국 회사에 가면 자기의 퍼포먼스(성과)로 평가받는다. 조바심이 나더라도 자식의 잠재력을 믿고 맡겨야 한다.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갖춰야지 강요와 지시로 아이를 만들면 아이가 소극적으로 성장한다. 요즘 애가 무슨 소질이 보인다 싶으면 학원부터 알아본다. 대학생도 무슨 시험 보기로 하면 학원부터 찾아다닌다더라. 기가 막힌다. 내 자랑 하나만 하자면 나는 고시 공부할 때도 신림동에 안 들어갔다. 그래도 만 26세에 합격했으니 실패하지 않은 것 아닌가. 뭔가 부닥쳐 보고 실패하면서 배워가야 하는데 쉽고 빠른 요령만 익히려고 한다. 그렇게 크면 사회에서 성공하기 어렵다.”

-자기 확신이 강한 것 같다. 자신감이 느껴진다. 학창시절이 궁금하다.

 “말썽꾸러기였다. 일본에 관심을 가진 것도 1980년대 불법 번역본 만화책(『씨티헌터』)을 보면서부터다. 싸우고 교무실에 불려가고 부모님께서 소환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원촌중·휘문고에서 ‘짱’을 먹었다. 고등학교 때는 밴드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름이 야간비행이었다. 생텍쥐페리 소설 제목을 비틀어본 거다. 여기서 ‘비행’은 飛行이 아니라 非行이다.”

-짱? 싸움을 그렇게 잘했나.

 “사연이 있다. 초등학교까지 강북에서 다녔다. 종로에 있는 청운초를 나왔다. 전학 와 보니 강북과 강남의 레벨이 다르더라. 강북에서 짱 먹으려면 정말 죽도록 패야 한다. 그런데 강남에 갔더니 상대가 코피만 나도 이긴 걸로 쳐주더라. 어쩌다 보니 본의 아니게 짱이 됐다. 고등학교에 가니 마냥 놀 수만은 없었다. 강남 고등학교의 면학 분위기라는 게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따라가다 보니 자각도 하게 되고, 뒤늦게 공부해 대학(연세대 법학과)에 갔다.”

-외교관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아마 외교부 과장 정도 하고 있겠지.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신상목 1970년생(43세) 서울 출생
서울 청운초-원촌중-휘문고-연세대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 준비위원회
행사기획과장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1996년 제30회 외무고시 합격
2000년 일본 와세다대 아시아태평양대학원 연수
2006년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영사과장·경제과장)
2008년 주파키스탄대사관 참사관
가족
아내: 이진선(44·전업주부·연세대)
딸: 청담중 3학년

사는 곳: 청담동 삼성1차아파트
근무하는 곳: 역삼동 기리야마
장 보는 곳: 청담동 신세계 SSG 푸드마켓
자주 가는 식당: 삼청동 부영도가니탕, 도산공원 앞
영동돌곱창, 동부이촌동 타츠미
추천하는 일본술: 아사히(맥주)·자쿠(作·사케)

 

글=유성운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