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구엔 지압
AFP 등 외신은 베트남 정부 관리와 지압 장군 측근의 말을 빌어 지압 장군이 베트남 하노이의 한 병원에서 숨졌다고 보도했다.
고인은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 지배를 끝내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던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식민지 피지배 세력이 게릴라전에서 시작해 정규군으로 무장, 유럽 제국주의 군대와의 싸움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라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월맹군은 3개월에 걸친 치밀한 준비로 압도적인 무기를 보유한 프랑스군을 55일 만에 퇴각시켰다. 전투가 시작되자 밀림 속에 숨겨뒀던 105mm 곡사포를 발사해 프랑스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이 전투의 승리는 베트남 독립뿐 아니라 인도차이나 식민지주의 붕괴를 가져왔다.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고, 적이 좋아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고, 적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그의 ‘3불 전략’은 병법에서뿐 아니라 경영학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79년 2월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했을 땐 10만 명의 지역 예비군으로 약 20만 명의 중국군을 물리쳤다.
지압 장군은 1911년 베트남 중부 꽝빈성 지역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쇼팽을 좋아하고 프랑스 역사에 심취했던 사학도였다. 알렉산더에서 손자에 이르기까지 명장들의 병법에 통달했다. 역사 교사와 신문기자를 지낸 그가 무장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39년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인 호치민(胡志明·1890~1969)을 중국에서 만나면서다. 75년 베트남 통일 이후엔 국방장관과 교육과학담당 부총리 등을 지냈다. 91년 은퇴 후 호치민 사상을 연구하면서 베트남 정부의 고문으로 일했다.
100세를 맞은 2011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3월 7일자 1면)에서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이유를 “우리는 프랑스군과 미군을 정확히 파악했지만, 그들은 베트남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 못했고 알려고 들지 않았다. 우월한 무기만으로 충분히 이길 것으로 오판했다”고 말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가 아닌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아무리 첨단 무기로 무장했더라도 우수한 두뇌가 없으면 다 헛일”이라는 것이다. 또 “자유란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불굴의 의지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다. 더 이상은 미국과 프랑스를 미워하지 않는다. 한국군들이 베트남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고 있지만 역시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고인의 장례식은 오는 12~13일 이틀간 국장으로 열리며 시신은 고향인 꽝빈성 지역에 안장될 예정이다. 장례식 기간 중엔 베트남 전국의 관공서와 공공시설에 조기를 게양하고, 모든 종류의 연예오락 활동이 중단된다.
박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