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호치민을 이끈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애국심이었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62]호치민의 베트남, 외세를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하다
사이공에 있는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베트남에서 탈출하려는 미국인과 베트남인들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 마지막 외세 '아메리카', 대사관 옥상을 통해 베트남을 떠나다
1975년 4월 29일 아침 7시 53분,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옥상.
11명의 미국 해병대원들이 마지막 미군으로 대사관의 성조기를 접어들고 헬리콥터를 탔다.
1945년 미군 정보장교 아르키메데스 패티 소령이 미래의 베트남 대통령 호치민을 만나기 위해 이 땅에 들어온 후 30년만에 미국이 떠난 것이다.
이에 따라 1858년 프랑스 전함이 다낭에 닻을 내린 이후 베트남 국민들은 비로소 외세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지나간 117년 동안 베트남은 프랑스에 이어 일본군이, 2차대전이 끝나자 영국군과 중국군이, 다시 프랑스군에 이어 미군의 점령을 경험했다.
사이공 중심가로 들어오는 북베트남군의 소련제 탱크
미국의 마지막 철수 헬리콥터가 미 대사관 옥상에서 이륙하고 2시간 후. 북베트남 정규군이 몇 발의 로켓포를 발사한 후 일제히 사이공 시내로 진입했다.
남베트남 군대의 저항은 전혀 없었다.
오전 11시 탱크 1대가 대통령궁의 반쯤 열린 문을 밀어제끼고 들어섰다.
병사 1명이 발코니로 뛰어 올라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의 깃발을 걸었다.
한 병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의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모든 인민들은 숨을 다시 한 번 내쉬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다. 무엇보다 우리가 우리 땅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우리 힘으로 독립을 쟁취한 것이다"
통일 베트남 정부는 즉각 '사이공'시 이름을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통일운동에 바친 國父 '호치민'으로 바꿨다.
그제서야 베트남 국민들과 병사들은 오늘의 승리를 보지 못하고 6년전 세상을 떠난 '호 아저씨'를 떠올렸다.
◈ 호치민, 조국해방을 위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다
일본군을 인도차이나에서 몰아내기 위해 합동작전을 벌이던 호치민(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과 미국 OSS요원들.
일본의 패망이 멀지 않은 1945년 4월 30일. 미국 OSS(미 중앙정보국 CIA의 전신)가 베트남 정보 책임자로 파견한 아르키메데스 패티 소령은 중국 윈난성의 국경 지대에 있는 허름한 시골 찻집에서 흥미로운 인물을 만났다.
구부정한 등, 가냘픈 몸매, 영롱한 눈동자, 듬성듬성한 턱수염, 짚으로 만든 샌들, 고무줄을 넣은 헐렁한 바지 차림의 촌로가 인사를 했다.
"Welcome, my good friend~"라는 완벽한 영어였다.
그가 20세기의 전설이 된 호치민이다.
베트남과 미국의 운명적인 만남의 첫 순간이었다.
패티는 이 첫 만남에서 호치민의 깊은 동포애와 강한 애국심을 보고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날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미군과 호치민이 이끄는 조직이 합심하여 베트남에서 일본군을 축출하기 위한 합동작전을 벌이기로 했다.
100여 년 전 프랑스에게 점령당한 베트남은 이번에는 일본의 침략을 받아 은밀하게 항일전쟁을 벌이고 있던 중이었다.
미군은 호치민의 게릴라부대에게 기관총, 브라우닝 자동소총, 수류탄, 화염방사기를 제공했다.
또 200여 명의 정예요원을 선발해 군사훈련을 시켰다.
1945년 6월, 호치민이 이끄는 게릴라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는 OSS요원.
호치민의 게릴라들은 곳곳에서 일본군 외곽초소를 공격하는 등 미군과의 합동작전을 벌여 나갔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하고 프랑스가 다시 인도차이나를 점령하려고 나서자 미국은 발을 빼기 시작했다.
소련과의 냉전에 돌입한 미국은 동맹국인 프랑스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호치민은 서신과 인편을 통해 루즈벨트, 트루먼 대통령에게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종식시키는데 도움을 달라고 애원했으나, 미국의 대답은 'NO'였다.
◈ 다시 돌아온 프랑스군, 신생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공격하다
베트남에 진군한 프랑스의 기갑부대. 베트남군과 8년간 전쟁을 벌인다.
일본이 패망하자 하노이로 돌아온 호치민은 1945년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새 공화국의 독립선언문 첫 구절은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인용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람들은 모두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천부의 권리를 조물주에게 부여받았다"
이때만 해도 호치민은 미국은 프랑스와 달리 영토에 대한 욕심이 없고, 필리핀처럼 독립을 도와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신생 공화국의 처지는 암담했다.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다는 명목으로 남베트남에는 영국군이 진주했고, 북에는 중국군이 몰려 내려왔다.
다시 베트남에 상륙한 프랑스는 영국과 중국으로부터 통치권을 넘겨받은 뒤 계속 군대를 상륙시켰다.
곳곳에서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군대가 충돌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파리에서 평화회담이 열렸다.
1946년 여름 파리에서 프랑스의 조르주 비도 수상(앞줄 왼쪽)과 악수하는 호치민
그러나 '베트남 독립의 공식 인정'과 '국민투표 실시'를 둘러싸고 이견을 좁히지 못해 회담이 결렬됐다. 1946년 12월 17일 프랑스의 장갑차들이 하노이 시내로 진입했다.
호치민은 프랑스군과 시설을 공격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12월 19일 밤 8시를 기해 베트남군은 발전소 폭발을 신호로 공격을 개시했다.
이렇게해서 8년에 걸친 프랑스와의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호치민과 참모들은 산악지대의 옛 기지로 피신해 장기전에 대비했다.
베트남 병사들은 도시를 떠나면서 숯이나 깨진 벽돌로 요새의 벽에 '우리는 돌아온다'는 글을 남겼다.
호치민을 수행했던 한 부하는 산속 생활을 이렇게 회고했다.
"호와 부하 8명은 소박하게 생활했다. 대나무와 짚을 이용해 긴 오두막을 지어 방을 두 개 만들었다. 나물을 살짝 튀겨 소량의 밥과 함께 먹었다. 가끔은 소금에 절여 얇게 썬 다음 후추를 뿌린 고기를 먹기도 했다. 호는 웃음을 터뜨리며 이것을 '베트남 통조림'이라고 불렀다. 식량이 부족해 먹을 것을 직접 재배했다"
처음에 고전하던 베트남 군대는 엄청난 호재를 만났다.
그것은 바로 이웃한 중국의 '공산화'였다.
중국을 방문한 호치민에게 마오쩌뚱은 이렇게 약속했다.
"베트남에 필요한 것이 중국에 있다면 무엇이든 제공하겠습니다"
중국으로부터 군사고문단과 각종 군사 장비가 쏟아져 들어왔다.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베트남 군대 16만 명은 총공세에 나섰다.
프랑스와 미국과의 전쟁에서 수많은 베트남 여성들도 자원해 전투에 나섰다.
베트남 군대의 공세에 시달리던 프랑스는 디엔비엔푸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다 전원 항복하고 베트남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 통한의 제네바회담…베트남 남과 북이 분단되다
강대국이 주도한 제네바 회담은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으로 양분하고 2년 안에 통일을 위한 전국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를 도출했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남베트남의 고 딘 디엠 정부나 프랑스를 대신해 남베트남에 상륙한 미국은 선거를 실시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선거를 실시해봐야 전 국민의 신망을 받고 있는 호치민이 새 지도자로 뽑힐 게 뻔하기 때문이다.
디엠 정부는 반대파와 불교도를 탄압하고 농촌지역의 게릴라 근거지 소탕에 나섰다.
미국은 군사고문단을 증파하고 군사지원을 늘려나갔다.
여기에 맞서 북베트남은 남쪽 출신의 훈련된 요원들과 각종 전쟁물자를 '호치민 통로'를 통해 내려 보냈다.
호치민 통로는 남부의 혁명조직들에게 인력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동맥이었다.
게릴라들의 공세가 강화되고, 곳곳에서 남베트남 정부군이 참패하자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전쟁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965년부터 북베트남에 대한 무자비한 폭격이 시작됐다.
해병대를 시작으로 남베트남에 미군들이 대거 상륙하기 시작했다.
1965년에 18만 명을 넘어서더니, 68년에는 48만 명, 가장 많았을 때는 54만 명에 달했다.
이 모든 것이 '밑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호치민은 미국과의 전쟁을 이렇게 비유했다.
"그것은 코끼리와 호랑이의 싸움이 될 것입니다. 만일 호랑이가 가만히 서있다면 코끼리가 그 거대한 발로 호랑이를 짓누르겠지요. 그러나 호랑이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낮에는 밀림에 숨어 있고, 밤에 나타납니다. 호랑이는 코끼리의 등에 뛰어올라 코끼리의 가죽을 찟어놓고 다시 어두운 밀림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러면 코끼리는 천천히 피를 흘리며 죽어갑니다. 인도차이나의 전쟁은 이렇게 될 것입니다"
1968년 1월 옛 도시 후에에서 북베트남 정규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미군
미국은 질 수 밖에 없는 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7만 명이 지하 30m에서 보낸 3년 반의 세월, 밥 한 공기만으로 미군의 공습을 피해 험난하기 그지없는 산악지대를 하룻밤에 50km를 달리는 게릴라 전사들, 6개월 동안 걸어야만 통과할 수 있었던 미로 같은 호치민 통로, 포신을 여러 사람의 허리에 묶고 하루에 반 마일씩 3개월을 끌고 갔던 정글 속의 대포…
여기에다 베트남의 독립이라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안 했다는 촌로 '호치민'을 중심으로 뭉친 민족주의를 현대식 무기와 군대가 깰 수는 없는 것이다.
◈ '레닌'과 '간디'를 합한 인물이라는 호치민의 소박하고 수수한 말년
전투 중에 보 구엔 지압 장군(뒷줄 왼쪽)이 호치민 주석(오른쪽 두번째)과 서류를 보면서 웃고 있다.
호치민은 언젠가 당 중앙위원회를 구성하는 31명 위원들의 경력을 회고한 적이 있다. "이들이 감옥에서 보낸 복역 기간을 합해보니 222년에 달한다"
어느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그 분들은 똑같은 여건에서 싸웠습니다. 똑같은 감옥에 있었고요. 그 분들은 베트남 민족을 위해 항상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있었습니다"
말년의 호치민은 전쟁과 국내 행정을 이들 유능한 부하들에게 맡기고 주로 외교에 매달렸다.
숙소는 호화로운 주석궁을 버리고 연못 옆에 자그마한 2층집을 지어 수수하게 살았다.
호치민의 유일한 취미는 연못의 금붕어에게 밥을 주는 일과 찾아오는 어린이들과 어울려 노는 일이었다.
이이들이 수염을 잡아 당기면서 '파파~호호'라는 애칭을 부르면 미소지으면서 베트남 고유악기를 연주하며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불러주었다.
호치민은 산악부족의 집처럼 지은 이 자그마한 집에서 말년을 보냈다. 호는 위층의 조그만 서재 옆의 작은 침실에서 생활했다. (사진=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1969년 9월 2일, 베트남의 독립 24돌을 기념하는 그 날 오전 9시 45분 호치민은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유품은 지팡이 하나와 옷 두벌, 몇 권의 책이 전부였다.
평생 결혼을 안했으니 유족도 없었다.
1960년대 말 호치민은 유언장을 작성했다.
"내가 죽은 후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서 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도자기 상자에 담아 하나는 북부에, 하나는 중부에, 하나는 남부 베트남에 뿌려다오.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다만 단순하고 넓으며 튼튼하고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이 쉬어갔으면 좋겠다.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이 유언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국부 호치민이 베트남 민족에게 미치는 영향력과 상징성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하노이 바딘 광장에 세워진 호치민 영묘. 수많은 인파들이 호치민 주석의 시신을 만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사진=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베트남 정부는 하노이 바딘 광장에 대규모 영묘를 짓고 호치민의 시신을 방부처리한 뒤 안치했다. 지금도 국내외의 수많은 참배객들이 참배하기 위해 하노이를 방문한다.
호치민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렇고 베트남을 다녀온 관광객들도 똑같은 질문을 한다.
"왜 우리에게는 호치민 같은 지도자가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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