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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최측근부터 치십시오”

도보사랑 2016. 11. 3. 16:11

      

   1794년은 정조대왕이 임금에 오른 18년째의 해로 다산은 세는 나이로 33세의 한창때였습니다. 6월에 아버지의 집상(執喪)이 끝나 복(服)을 벗게 되자 그만 두었던 벼슬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성균관 직강(直講) 벼슬을 제수하더니 10월에는 홍문관 교리(校理)라는 참으로 귀한 직위를 부여받았습니다. 벼슬하던 선비로서 홍문관 교리야말로 한 번쯤 꼭 하고 싶어 하던 벼슬임은 세상에 잘 알려진 일입니다. 옥당(玉堂)인 홍문관 벼슬이야 어떤 벼슬도 좋지만 교리야말로 학사(學士) 벼슬로는 가장 높이 여기는 직위였습니다.

   교리에서 수찬(修撰) 벼슬로 옮겨주더니 사나이라면 모두가 바라는 암행어사의 임무가 맡겨졌습니다. 10월 29일의 일이며, 11월 15일까지 복명(復命)하라는 어명이었습니다. 경기도 북부지방인 연천현, 삭녕군, 적성현, 마전군 등 4개 고을이 담당지역이고, 들어가던 양주목과 나오던 파주목의 형편까지를 암행하도록 하명을 받았으니, 실제로는 6개 고을에 대한 암행 업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진주목사를 역임하다 떠난 아버지 때문에 다산은 사또 자제로 농촌의 실상을 제대로 모르다가 농촌의 피폐한 참상을 보고 놀랐던 것도 사실이지만, 몇몇 수령들의 탐학과 착취의 실상을 직접 목격하고는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연천현감 김양직(金養直)과 삭녕군수 강명길(康命吉)은 그때 다른 곳으로 옮긴 뒤였으나 그들이 재임 중에 저지른 탐학과 착취는 참으로 심했습니다. 그래서 다산은 “수령(守令)이라는 제도가 생긴 이래로 이보다 더 나쁜 수령은 없었습니다”(誠有守令以來 所未聞也)라고 말할 정도로 아주 극악한 수령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복명보고서에서 다산은 그 두 사람은 무섭게 처벌해야 한다고 했지만, 김양직은 궁중의 지관(地官)으로 임금의 최측근이었고, 강명길은 궁중의 어의(御醫)로서 임금의 환후를 돌보던 정말로 가까운 측근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에 대한 처벌이 쉽지 않으리라는 소식을 듣자, 다산은 곧바로 임금에게 직보(直報)하는 상소를 올려, “법의 적용은 마땅히 최측근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用法宜自近習始)”라 말하여 그들에 대한 법의 적용이 없다면 법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임금은 다산의 주장대로 그들에 대한 엄한 처벌을 내려 법의 가치를 분명하게 밝혀주었습니다.

   며칠 전 신문 보도에, 절대왕정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왕자가 법을 위반하여 사형을 당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현대의 왕조국가에서도 아무리 가까운 측근이라도 중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구나라는 생각과 더불어 다산의 옛날 일이 떠올랐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왕조국가라도 정치를 제대로 하려고 한다면 법의 적용은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정조와 사우디 국왕이 보여주었습니다. 측근들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그냥 봐주면서 측근이 아닌 사람들만 처벌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법의 집행이 되겠는가요.

   지금 이 나라에는 권력자 최측근들이 온갖 불법을 자행하고 있어도 그들은 건재하면서 권력만 휘두르고 있으니 사우디의 국왕이나 정조에게 미안한 일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