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언어 몰입의 귀재, 키무라 히사오.

도보사랑 2018. 12. 25. 13:20


언어 몰입(Language Immersion)의 귀재, 키무라 히사오(木村 肥佐生きむらひさお)

 

일본과 티벳 관계사에서 두각을 남긴 이들 가운데 이민족(異民族)의 거친 일상에 직접 들어가 몽고와 티벳의 언어와 풍습을 익혀 이를 바탕으로 정밀한 기록을 남기고 평생을 연구에 바친 키무라 히사오(木村 肥佐生)란 인물이 있다.

 

키무라는 외국어 학습의 왕도라고 할 수 있는 언어몰입(Language Immersion)의 가장 이상적인 사례다. 1922년 나가사키 사세보에서 태어난 키무라 히사오는 미션스쿨인 큐슈학원을 졸업하고 영어, 중국어를 익혔다. 외국어 공부를 선천적으로 좋아한 그는 17세에 시모노세키에서 부관연락선을 타고 조선으로 건너간 뒤 다시 중국에 입국한다. 당시 일본 청년들 사이에서는 만주를 목표로 미지의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는 것이 하나의 유행

이었다.

 

키무라는 베이징을 거쳐 장쟈커우(張家口)로 가면서 그동안 익혔던 중국어를 실전에 활용하면서 주몽고일본대사관이 스파이 양성을 위해 세운 쑤이위앤(綏遠)의 흥아의숙(興亜義塾)의 몽고어반 2기생으로 입학한다. 그리고는 ‘차강도로가이 호랄’이란 인적이 드문 외몽고의 사찰에 들어가 1년 동안 머무르며 동자승과 유목민의 어린이들을 상대로 몽고어를 학습하는데 교실에서 5년 배우는 것 이상의 성과가 있었다고 후에 저서에서 밝히기도 했다.

 

“장난기 있는 어린이로부터 반응을 끌어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내 몽고어 발음이 기묘하다면서 재미있다고 웃는데 이 때문에 어린이는 나에게 훌륭한 교사였다. 성인이라면 체면을 차린다고 웃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맹훈련으로 키무라는 반년 뒤 완전히 듣는 귀가 열렸다고 한다. 몇 시간의 발음연습을 했는데 요령을 터득했더니 새롭게 방대한 수의 단어를 외우는 것은 별게 아니었다. 하루에 50에서 100단어를 암기하기 위해 노력했고 몽고어와 일본어는 문장의 구조가 상당히 유사해 일취월장하다 보니 매일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는 흥아의숙이 세운 실험농장에서 양을 사육하며 몽고어 방언까지 배우는데 노력했다. 10대 후반에 이민족의 문화와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파오를 방문해 현지인들의 모든 동작을 익힌다. 스파이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행동이 어색해 외국인이라는 신분이 드러날 수 있다는 생각에 바닥에 앉는 법부터 찻잔을 어떻게 받치고 마시는지 일거수일투족을 배운다.

 

키무라 히사오는 초원을 천지삼아 라마사원과 유목민의 천막에 기거하면서 웬만하면 쑤이위앤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장쟈커우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어쩌다 바람을 쐬러 장쟈커우로나올 때의 기분을 이렇게 회상했다.

 

“아무리 초원에서의 생활을 즐긴다고는 하지만 기차를 타고 1년에 두 번 휴가를 내서 장쟈커우로 돌아오는 것은 마음이 설레인다. 이때만은 몽고옷을 벗어버리고 장쟈커우의 밤거리에 몸을 맡긴다, 왜 장쟈커우가 일본인 거류민들에게 인기가 있는지 알 수 있다. 환락가에는 젊은 남자들이 바라는 욕망과 환상이 존재한다. 주머니에는 6 개월 치 봉급이 있고 상대로는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 여성이 있었다.”

 

키무라 히사오는 1942년 여름 몽고식의 머리를 밀고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서 징병검사를 받게 되는데 면접관은 엉뚱하게도 그의 키를 150cm라 적고 입영기준에 미달한다고 면제 판정을 내려준다.

 

당시 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중국으로 건너와 무역회사에서 근무한다면서 실제로는 환락가가 밀집한 장쟈커우에서 매춘부를 알선한다든지 하는 건전하지 못한 일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징병검사관은 키무라 히사오가 초원에서 남들이 안하는 일을 하고 있어 병역을 면제해주는 것이 국가에 봉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키무라는 몽고인민공화국의 수립으로 발생한 외몽고의 피난민 부락으로 말을 달려가며 현지인 친구를 만들며 다양한 몽고의 방언을 배운다. 당시 일본군부는 몽고일대에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몽고인민공화국에 의해 축출된 활불(活佛)을 찾기 위해 자금을 쏟아 붇고 있는 상황이었다.

 

1943년 21세의 키무라는 ‘다와 산보’라는 가명으로 그동안 사귀었던 몽고인들 여러 명과 함께 내몽고를 떠나 반년만인 1944년 2월 칭하이성 시닝 서쪽 30킬로미터에 위치한 ‘타르’사(塔爾寺)에 도착한 뒤 다시 티벳의 라사로 향한다. 이 때 달라이 라마는 현재 다름살라에 망명해 있는 14세로 키무라가 도착한 시점은 일본의 패전 직후인 1945년 9월이었다.

 

라사에서 일본의 패전 소문을 접한 키무라는 반신반의했다. 어릴 때부터 황군은 퇴각하지 않는다고 배워왔던 터여서 일본이 원폭이라는 신무기에 항복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라사는 외부와 단절된 곳이어서 사실 확인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인도로 건너가 확인해 보기로 하고 히말라야 남쪽 다즐링에 인접한 칼린퐁(kalinpong)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키무라는 영화관의 선전뉴스를 통해 일본의 패전을 확인한다. 공습으로 초토화된 토쿄와 허허벌판이 된 도시의 빈곤, 완전히 사라진 공업문명, 토조 히데키 총리의 자살미수, 일본군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대동아 공영권을 위해 자신이 바친 노력은 무엇인지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는 인도 캘커타에서 자수해 1950년 일본에 귀국한다. 이후 외무성 아시아국 중국과를 찾아가지만 외무성은 조사보고서를 제출할 필요가 없다면서 의원면직 발령과 함께 일본귀국시점까지 계산한 퇴직금을 준다.

 

반면 연합군사령부GHQ는 그의 흥아의숙 1년 후배인 니시카와 카즈미(西川一三)와 마찬가지로 키무라를 불러 상세히 조사한다. 6.25사변으로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는 미국이 중국변경지대의 정보를 취득하는 것은 당연했다. 미 CIA는 키무라의 재능을 아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CIA 산하 외국어 방송정보서비스(FBIS)는 이후 그를 26년동안 고용해 모스크바, 울란바토르 베이징 방송의 몽고어 방송을 청취하고 영어로 개요를 정리하는 일을 맡긴다.

 

만주에 꿈을 품고 건너가 몽고어를 배우고 티벳연구에 천착한 키무라의 경험은 32년의 간격으로 두고 두 종류의 책으로 출간된다. 첫 번째는 1957년에 집필을 시작해 이듬해에 초판이 나온 티벳잠행10년(チベット潜行十年)으로 이는 일본산악회가 마나슬루봉 등정의 여세를 몰아 칭하이성 암네마친(Amne Machin阿尼瑪卿山)등산을 계획하면서 마련한 강연에서의 기록을 기초로 한 것이다.

 

또 다른 저작은 1989년 8월에 나온 “JAPANESE AGENT IN TIBET by Hisao Kimura as told to Scott Berry”다. 이는 카와구치 에카이의 전기를 작성은 스콧 베리가 키무라 히사오를 인터뷰해 쓴 것으로 일본어로는 1994년 “티벳 위장의 10년”(チベット 偽装の十年)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출간된다.

 

이 책의 영문판은 아주 아슬아슬하게 출판됐다. 책이 나온지 2개월만에 키무라 히사오가 세상를 떠났기 때문이다. 키무라 히사오는 CIA 산하 외국어 방송정보서비스(FBIS)뿐만 아니라 아시아대학에 몽고어 강사로도 활동하며 1977년 이 대학 아시아연구소 교수가 돼 몽고, 티벳, 중앙아시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한다. 그는 1989년 학생들을 인솔하고 신쟝 위구르에 가던 도중 베이징에서 쓰러져 본국으로 이송돼 3차례나 대수술을 받다가 세상을 떠난다.

 

치바 국립병원에서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 사망하기 직전 그가 남긴 말을 상당히 인상적이다. 의사가 이름을 묻자 키무라는 “본명은 말할 수 없고 ‘다와 산보(몽고가명)’라고 합니다. 도망이 아니라 잠행입니다.”라고 나지막하지만 힘주어 대답했고 이것이 그가 최후에 남긴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