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일본 최초의 정교회 사제가 된 료마의 조카.

도보사랑 2018. 12. 25. 15:29

일본 최초의 정교회 사제가 된 료마의 조카

 

사카모토 료마 본인은 기독교에 귀의하지 않았지만 그와 관련된 인사들 가운데는 공교롭게도 일본 그리스도교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 여럿 있다.

 

일본 정교회 최초의 사제로 세례명이 바오로인 사와베 타쿠마(沢辺 琢磨)의 생애는 아주 드라마틱하다. 사와베 타쿠마의 본명은 야마모토 타쿠마로 사카모토 료마와 같은 도사번 출신이다. 야마모토 타쿠마 조부의 동생이 사카모토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사카모토 나오타리(坂本直足)로 개명하는데 그의 차남이 사카모토 료마(坂本 龍馬)다.

 

따라서 타쿠마는 료마의 조카에 해당하는네 나이로 따지면 료마보다 두 살 위다. 사카모토 료마와 마찬가지로 타쿠마도 검술에 능했고 두 사람은 같은 시기 에도에 진출했다, 료마는 에도의 치바도장에서 호쿠신잇토류(北辰一刀流)의 검법을 배워 명인이 되고 타쿠마 역시 에도의 3대 도장중 하나인 쿄신메이치류(鏡心明智流)의 모모노이도장(桃井道場)에서 실력을 연마해 사범대리가 된다.

 

그러던중 1857년 8월의 어느 날 운명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타쿠마가 술에 취해 행인에 시비를 걸어 싸운 것이다. 그리고 행인이 길거리에 흘리고 간 금시계를 습득해 팔아버린 뒤 마련된 돈을 유흥가에서 탕진했다. 결국 그의 행위는 범죄로 드러났다. 오늘날로 말하면 점유물이탈 횡령죄를 저지른 것이다. 타쿠마는 무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할복을 해야할 처지에 놓이는데 이 때 보다 못한 사카모토 료마가 그를 설득해 도주하도록 한다.

 

에도에서 벗어난 타쿠마는 토호쿠(東北)지역을 거쳐 에조찌(홋카이도)의 하코다테에 정착한다.

하코다테에서 타쿠마는 검술도장을 경영하면서 신사인 신메이샤(神明社)의 신관(宮司)이 되고

사와베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사와베 타쿠마로 개명한다.

 

당시 개항했던 하코다테에는 러시아 제국의 영사관 부속성당의 관할사제로 일본에 온 러시아 정교회 신부 니콜라이라는 이가 있었다. 니콜라이는 1811년 쿠릴열도 주변을 측량하던 러시아 군함의 함장으로 쿠나시리섬(国後島)에서 마쯔마에번 관리에 체포돼 2년 반 동안 감옥에 투옥됐던 바실리 골로브닌이 남긴 일본유수기(日本幽囚記)를 읽고 일본에 뼈를 묻는다는 각오로 일본에 온 이였다.

 

러시아 영사관원 가운데는 자제들에게 일본무술을 배우도록 하겠다는 이들이 있어 타쿠마는 니콜라이와 알게 된다. 니콜라이는 나중에 도시샤 대학을 설립한 니이지마 죠로부터 일본어를 배우면서 일본고전과 역사를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 극렬한 양이론자였던 사와베 타쿠마는 니콜라이가 일본침략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밀정이라 여겼다.

 

어느날 사와베 타쿠마는 여차하면 그를 참살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칼을 찬 채 그를 만나 일본에 온 목적을 심문하듯 따졌다. 과격한 타쿠마의 질문에 니콜라이는 침착하고 논리적으로 대응했다. 당신이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알기나 하느냐. 가르침을 안 뒤에 옳고 그름을 판단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당초 살의를 품고 니콜라이를 만난 타쿠마는 그의 대답이 확실히 일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후 타쿠마는 매일 그를 찾아가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가슴속에 받아들인다. 그리고 친구인 의사 사카이 토쿠레이(酒井篤礼)등을 설득해 함께 교리를 공부한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교가 금지된 시기였던 1868년 4월 사카이 토쿠레이와 우라노 다이조(浦野太蔵)와 함께 비밀리에 세례를 받는다. 세례명은 초대교회시대 박해 중 회심을 경험한 바오로였다.

 

타쿠마는 이 때 하코다테 신사에서 신관직을 한동안 유지했다. 신사의 제사를 지낼 때 한자어로 번역한 성서구절을 삽입하면서 정교회 신자라는 사실을 숨기다 어느날 개종을 선언하고 신사를 떠난다.

 

그리스도교 금지령하에서 그의 일가에 대한 박해는 엄혹했고 생활고를 겪었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그의 아내는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후 타쿠마는 처자를 남기고 하코다테를 떠나게 되는데 토호쿠 지역에서 두 차례나 체포돼 투옥되지만 메이지 정부의 종교금지가 해제되자 더욱더 전도에 힘쓴다.

 

정교회의 교세가 확장되고 일본인 사제 서품의 필요성이 높아지자 니콜라이는 1875년 토쿄에서 1차 공회를 열고 캄차카에 있던 동시베리아 담당 주교를 초청해 타쿠마를 일본인 최초의 사제로 임명한다. 타쿠마는 이후 임지와 일본 각지의 교회에서 성체의식을 치르고 세례 신자들을 양성한다,

 

니콜라이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토쿄의 부활대성당 건설당시 일본의 우익들은 교회첨탑이 황궁을 내려다 보는 불경스러운 시설이라고 공격했지만 한 때 검법의 고수였던 그가 건설현장에 나타나면 모두 겁을 먹고 사라졌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 신부를 참살하기 위해 만났다가 오히려 그에 감화돼 사제가 된 사와베 타쿠마는 사카모토 료마가 카츠 카이슈(勝海舟)를 암살하려다 크게 깨닫고 그의 제자가 됐다는 이야기와도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