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조림사업으로 시대를 움직였던 도쿠라쇼자부로

도보사랑 2018. 12. 25. 16:31


조림사업(造林事業)으로 시대를 움직였던 도쿠라쇼자부로(土倉庄三郎どくらしょうざぶろう)

 

긴키지방부터 큐슈에 이르기까지 일본전역의 숲은 상당히 울창하다. 잘 가꾼 일본의 숲에서 가장 대표적인 수종은 삼나무(杉)인데 그 중에서도 명품이 나라현의 요시노스기(吉野杉よしのすぎ)다. ‘요시노스기’가 울창하게 된 데는 일본의 삼림왕(森林王)으로 일컬어지는 도쿠라쇼자부로(土倉庄三郎どくら しょうざぶろう)의 공적을 빼놓을 수 없다.

 

나라현 요시노군(吉野郡)에서 1840년에 태어난 도쿠라쇼자부로는 대대로 삼림경영을 하는 가문출신으로 전통임업을 집대성해 임업재벌로 성장했다. 그는 임업뿐 아니라 메이지시대 교육과 정치 경제 등 다방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임업에 있어서는 도쿠라식조림법을 고안해냈다. 나무를 촘촘히 심는 밀식(密植)을 하면 잘 자라지 않는다는 통념을 깨고, 밀식을 하되 자주 간벌(間伐)을 해주면 나무의 생장을 촉진하고 뿌리부터 나무상단까지 마디도 드물고 고른 두께의 양질의 목재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벌한 나무는 나름대로 상품이 된다.

 

그는 도쿠라식조림법을 집대성한 450페이지분량의 요시노임업전서를 편찬하고 이 매뉴얼 대로 사가, 군마, 효고, 시즈오카, 나라현의 삼림개량을 하고 타이완 타이베이현에도 진출한다, 타이완에서 자란 나무는 전후 오키나와의 전신주용으로 수출되기도 한다,

 

특히 도쿠라의 차남 류지로(龍次郎)는 타이완에서 1만 헥타르의 산을 조차(租借)해 임업과 장뇌삼사업을 벌였고 나중에는 발전사업(発電事業)에도 진출해 성공했다. 쇼자부로는 이후 타이완 고사족(高砂族)추장을 포함한 원주민들을 대거 일본까지 초대해 자신의 회갑연을 벌였다는 일화도 있다.

 

도큐라쇼자부로는 조림뿐만 아니라 잘 자란 깊은 숲속의 목재를 운반하는 방안도 제시한다. 1873년부터 8년에 걸쳐 요시노가와(吉野川)의 수로를 만들고 준설공사와 강폭을 넓히는 공사를 한다, 또 도로도 정비하는데 공사비용은 산림평가액의 20분의 1일 출자하도록 산림주들을 설득해 이를 관철시키고 자신도 사재를 쾌척한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도 있었다. 메이지시대 불교억압정책인 하이부쯔키샤쿠(廃仏毀釈はいぶつきしゃく)의 광풍이 불면서 사찰로 가는 길목의 사쿠라(櫻)를 보는 인파도 크게 줄었다. 오사카의 상인이 가난해진 산주인으로부터 요시노사쿠라(吉野櫻)를 땔감으로 사들이려 했다. 그러자 도쿠라는 “이제 일본은 세계 각국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게 될 것이고 사쿠라는 외국에 알려야 할 일본의 상징”이라면서 오사카 상인에게 대금을 지불하고 사쿠라가 땔감으로 팔리는 것을 막았다.

 

도쿠라쇼자부로는 교육입국에도 앞장섰다. 1875년에는 카와카미무라오타키(川上村大滝かわかみむらおおたき)에 사비로 소학교를 설립한 뒤 학생들에게 교과서와 문구는 물론이고 당시로서는 보기 힘들었던 서양식 교복까지 지급했다. 또 1882년에는 자택부지 인근에 芳水館이란 사숙(私塾)에서 시작해 규모가 커지자 나중에는 漢學과 算術, 英語 武道 등 여러 학과를 망라한 중등교육기관으로까지 발전시킨다.

 

그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대학설립과정에서도 거액의 사재를 털어 돕는다, 1881년에는 니이지마죠(新島襄)를 도와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에 출자하는가 하면, 일본여자대학교(日本女子大学校)설립에도 거액의 기부를 한다. 도시샤대학에는 그의 차녀 마사코(政子)가 입학하게 되는데 그녀는 졸업 후 미국유학을 거쳐 나중에 청나라주재 공사가 된 우치다코사이(内田康哉うちだこうさい)와 결혼한다. 도쿠라쇼자부로는 사위와 딸이 국제외교의 사교무대에서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일찌감치 차녀의 국제화교육에 정성을 쏟은 결과 차녀 마사코는 영어뿐 아니라 중국어에도 능통했으며 베이징 외교가에서 자희태후(서태후)와 친해진 유일한 외국인여성이 돼 외교관 남편을 돕는다.

 

도쿠라쇼자부로는 메이지시대 원훈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그들을 요시노의 산중으로 불러들여 여러 조언을 했다. 아마가타아리토모(山形有朋)、이노우에가오루(井上馨)、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오쿠마시게노부(大隈重信)등 당대의 쟁쟁한 인사들이 험한 산을 넘어 그를 찾아 가르침을 청했는데 이를 ‘도쿠라케이’(土倉詣 : ‘詣’는 방문 참배의 의미)라고 한다.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조선의 김옥균도 그의 신세를 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특히 메이지시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추구한 자유민권운동(自由民権運動)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이 운동의 핵심인물인 이타가키타이스케(板垣退助いたがきたいすけ)가 서양으로 건너가 배우고 오겠다고 하자 2만엔이라는 거액을 쾌척했다.

울창한 숲을 가꾸며 국가와 인재를 생각하고 글로벌한 시각까지 가졌던 도쿠라쇼자부로가 남긴 명언은 걸작이다. “재산의 3분의 1은 국가를 위해, 3분의 1은 교육을 위해, (나머지)3분의 1은 자기 사업에 쓴다.”(財産の三分の一は国のため、三分の一は教育のため、三分の一は自分の仕事のために使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