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가 있다면 천리 밖을 두루 날고 싶다”고 했던 타카스기신사쿠(高杉晋作)
“翼あらば 千里の外も飛めぐり よろつの国を見んとしそ おもふ”(날개가 있다면 천리 밖을 두루 날아가 여러 나라들을 보고 싶다).
막부말기 바람처럼 살다간 메이지유신의 지사 타카스기신사쿠(高杉晋作)가 20세이던 1859년 해외로 나가 견문을 넓히고 싶다는 간절함을 표현하며 남긴 와카(和歌)구절이다.
당시 타카스기는 양학(洋學)을 배우고 싶다면서 베트남을 가고 싶어 했다. 배우기만 할 수 있다면 해외 어디든 나가고 싶은 마음의 발로였는데, 3년 후 그는 베트남대신 막부가 마련한 중국 상하이 시찰단에 참가하게 된다.
1862년 23세의 타카스기신사쿠는 센자이마루(千歳丸せんざいまる)란 배에 몸을 실었다. 센자이마루는 358톤급의 목조범선으로 일본이 영국인에게 3만4천량을 지불하고 구입한 배였다. 타카스기는 출항 때부터 심한 배 멀미를 앓았고 항해 도중에는 거센 광풍과 폭우를 만났지만 매일 일기를 써서 위도와 경도는 물론이고 항해 기술까지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긴다.
센자이마루호는 에도막부의 해금(海禁)이후 2백여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으로 향한 일본선박으로 이 배에 탄 막부관리들과 청년무사들은 대중국 무역관계 가능성을 타진하고 중국의 정세를 파악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8일간의 항해 끝에 타카스기의 눈에 들어온 상하이의 첫 모습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그는 유신고로쿠(遊清五録ゆうしんごろく)란 일기에 이렇게 기록 했다.
“상하이는 중국에서 가장 번화한 항구로 구미제국의 상선과 군함 수천척이 정박해있고, 육상에는 각국의 상관이 늘어서 있어 그 장관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하이에 정작 상륙해 보니 별천지란 첫인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장관이 아니라 더러움이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상하이의 도로 곳곳의 지저분함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작은 골목은 그 정도가 심해 쓰레기와 배설물이 켜켜이 쌓여있어 발을 디딜 곳이 없다, 청소하는 이도 없다. 시가를 나오면 광야(曠野)로 풀로 뒤덮여 길이 없다. 관(棺)이 여기저기 널려있거나 멍석에 말린 시신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혹서의 날씨에는 악취가 코를 찌르니 청국(淸國)의 어지러운 꼴은 이것으로 알 수 있었다.“
이튿날 타카스기는 동이 트기 전 멀리서 들려오는 요란한 총소리와 대포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이를 장발족(태평천국군)과 지나인의 전쟁소리라고 적었다, 바로 중국근대사 최대의 반란사건인 태평천국의 난이었다.
타카스기는 상하이 서문 밖으로 나가 청군의 병영을 관찰했다. 청군은 여전히 청룡도를 무기로 쓰고 있었고 낡은 화승총을 들고 있었다. 병사들의 군복은 낡았고 세수를 안 해 얼굴은 지저분했으며 맨발에 무기력한 모습은 거지나 다름없었다. 용감하고 강건한 모습이라고는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중국역사에도 정통했던 타카스기는 태평천국이나 영국군에 맞서 싸운 청군의 진법이 명조때 왜구 토벌로 명성을 떨쳤던 척계광(戚繼光)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반면 첨단무기로 무장한 외국군은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영국군은 중국인이 만세사표(万世师表)란 편액을 내건 공자묘의 묘당에서 총을 베개 삼아 잠을 잤다. 청조가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는 영국군에게 성인(聖人)이 모셔진 장소까지 제공했다.
시간을 아껴가며 상하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식견을 넓히려고 노력했던 타카스기는 서점에도 들른 소회까지 기록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해국도지(海国图志 : 웨이위안(魏源)이 린저쉬의林则徐 주문으로 편찬한 세계지리역사서)원본을 구하려 노력했다. 해국도지는 일본에서는 아주 불티나게 팔린 베스트셀러여서 청국(淸國)여행 기념으로 중국어판을 구입하려 한 것인데 결국은 구하지 못했다.
청국에서는 예전에 소수의 출판업자가 이 책을 냈지만 아예 수요가 없어 파산했고 이후로는 책을 구경도 할 수 없다는 서점주인 설명에 타카스기신사쿠는 기가 막혔다.
아편전쟁에 관한 서적을 찾았지만 그 역시 없었다. 서점주인은 시를 지을 때 수사어의 출전이나 압운을 찾아보는 시작(詩作)기능서인 패문운부(佩文韵府)가 베스트셀러라면서 사라고 권했지만 무사인 타카스기는 관심이 없었다.
타카스기는 자신이 우상으로 여기는 중국인물에 관한 책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아편전쟁때 상하이 오송포대(吴淞炮台)에서 전사한 천화청(陈化成)이나 린저쉬(林则徐)에 관한 책이 있으면 가격이 비싸더라도 구입하고 싶다고 했지만 서점주인은 역시 없다고 대답했다.
타카스기는 한학에 밝아 중국인들과는 필담을 나눴고 기록을 남기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중국의 문명을 흠모했던 타카스기는 크게 실망했다, 나라가 내우외환으로 망해가고 있는데 부국강병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서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나라의 반식민지 상황도 직접 보고 느꼈다, 영국인 프랑스인이 거리에서 걸으면 중국인들은 모두 도로양편으로 물러서 그들에게 길을 양보했다, 상하이는 중국인데 영,불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신사쿠는 상하이에 있는 동안 ‘신대교’(新大橋)라고 하는 영국인이 보수한 교량에 대한 일화도 적었다
“7년 전에 낡아서 오래된 다리가 붕괴했는데 지나인들은 이를 재건하지 못했다. 영국인이 이 다리를 건설했기 때문에 지나인들은 지나갈 때마다 영국인들에게 1전씩을 납부했다.” (今去七年前、古橋朽崩、支那人不能再建、因英人建此橋、支那人毎通行、貢壱銭于英人云)
타카스기신사쿠는 생각했다. “중국은 예로부터 숱한 영웅을 배출하고 예의지도가 매우 현명한데 왜 지금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상하이의 견문과 베이징에서 온 각종 정보를 종합해보면 중국인들은 만리(萬里)의 파도에 견디는 군함이나 수 십리 밖의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대포를 만들 수 없다.”
타카스기신사쿠는 두 달동안의 상하이견문을 마치고 귀국해 그 소회를 유신고로쿠(遊清五録(ゆうしんごろく)라는 저작물로 남긴다. 그리고 자신이 본 청나라의 현재는 일본의 미래가 될 수 있다면서 막부타도를 통한 부국강병을 외친다.
타카스기신사쿠의 유신고로쿠(遊清五録(ゆうしんごろく)는 젊은이들이 세계에 나아가 견문을 넓혀야 한다는 취지로 일본 내에서 종종 언급되는 고전이기도 하다.
'세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림사업으로 시대를 움직였던 도쿠라쇼자부로 (0) | 2018.12.25 |
---|---|
삼궤구고두를 물리친 소에지마타네오미 (0) | 2018.12.25 |
100년전 상해 (0) | 2018.12.25 |
어김없이 반복되는 역사, 일본의 탈아입구 (0) | 2018.12.25 |
료마를 벤 남자 이마이노부오의 회심 (0) | 2018.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