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오쿠보 도시미치

도보사랑 2025. 5. 26. 23:09

오쿠보 도시미치

대선을 앞두고 후보자들의 회견, 토론, 거리유세를 보면서 후보자들의 현실과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참으로 많은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한다. 선택의 주체자 국민들은 후보자들이 내건 공약이 통찰, 진정성, 애국심에 기반한 대국민 약속이냐, 아니면 당장 한표라도 더 얻기위한 기만적 일시 약속이냐를 매의 눈으로 가려내야 한다. 엄중한 국제정세와 국내 경제상황하에서 후보자를 선택하는 문제는 국가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가급적 뛰어난 혜안과 섬기는 양심을 가진 후보가 선택되면 좋겠다.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큰 일을 해낸 한 인물이 생각난다. 당대의 국제정세와 일본 국내 내부상황에 대해 정확한 식견과 판단력을 가졌던 인물, 오쿠보 도시미치. 오쿠보(1830.9.26~1878.5.14)는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주역으로,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유신3걸로 불리우는 인물이다. 그는 근대화의 길로 들어선 日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을 원치않았던 조선을 정벌하고자 했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征韓論)에 반대했다. 7가지 이유를 들어 조선 정벌이 불가하다는 그의 글은 명문장이기도 하지만 당시 30대 젊은 나이의 그가 가진 정치, 경제, 외교, 국제정세에 대한 해박한 식견엔 놀라움을 금치못한다. 이 장문의 명 문장 글은 일본 근대화 과정을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에 직접 찾아서 읽어보면 좋겠다.

1830년 큐슈 남단 사쓰마번에서 태어난 오쿠보는 같은 고향 출신 사이고 다카모리, 조슈번 출신 이와쿠라 도모미와 사쓰마-조슈동맹(삿초동맹)을 맺어 에도막부를 무너뜨리고 1867년 천황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정부를 수립, 근대화의 길로 나아간 메이지유신을 주도했다. 미래를 바라보는 그의 뛰어난 통찰력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장한 정한론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1871년 7월에 단행된 폐번치현(廢藩置縣)에 이어 12월 이와쿠라 사절단을 이끌고 근 2년 동안 선진 유럽 각국을 시찰하고 난 뒤 그가 시행한 여러 개혁정책에서도 나타난다. 정한론 이후 사이고가 일으킨 서남(세이난) 전쟁을 평정했지만 사이고의 부하에 의해 48세의 나이에 암살당했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를 닮고 싶었던 당대의 개혁자가 뜬금없이 생각난 것은 비상한 시기엔 사건과 인물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고, 역사는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미래를 결정하는가? 한중일 근대화의 차이점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일본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완전히 서양식으로 바꾸어야겠다는 과감한 생각으로 근대화에 성공했고, 중국은 일부만 받아들이는, 소위 東道西器(中華는 유지하고, 技術만 서양 것을 빌림)적 반쪽짜리 근대화로 실패했고 , 조선은 아무 대안없이 무조건 위정척사(衛正斥邪)만 하다 강제 개방되어 식민지의 길로 갔다. 중요한 시기에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여전히 선두에서 이끄는 지도자와 이를 선택하는 국민이다.

대선 후보자들을 보면서 뜬금없이 정한론과 관련된 인물들이 생각난 것은 조직의 두목같은 기질을 가지지 않으면서 가급적이면 국제관계, 경제분야에서 좁고 편협된 시각에서 벗어난 후보가 대한민국號를 이끌었음 하는 바램때문이다.

20250526, Song s y

비스마르크처럼 수염을 길렀던 오쿠보 도시미치
오쿠보와 같은 사츠마(지금의 가고시마) 출신으로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 세이난전쟁에서 패배해 할복자살했다
메이지유신의 주역들. 기도 다카요시(제일 좌측), 이와쿠라 도모미(일본 전통복장, 이와쿠라 사절단을 이끌었다), 이토오 히로부미(이와쿠라 우측), 오쿠보 도시미치(제일 우측 앉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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