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속에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가 그대로 스며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를 논하지 않고 우리의 역사는 그저 집안 살림쯤으로 여겨질 뿐이다.
백두산개발과 북한의 역사마저 중국의 역사로 귀속시켜려는 중국의 역사왜곡으로 또다시 한국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있지 않은 위대한 유산들이 있기에 그들 중국에의 부러움은 끝이 없을 듯하다.
영은사는 중국 동진(326년)때에 건립된 것으로 항조우의 오래된 고찰중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영은사의 제일 앞쪽에 자리잡고 있는 '대웅보전'>
대웅보전뒤로 약사전등 다수의 대전이 위치하며, 대웅보전은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는 보기드문 다층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 향을 피우며 그들의 소원을 빌며 기도한다.
<대웅보전의 불상>
높이 24.8M의 대웅보전에 위치한 목조좌식 불상으로 도금하여 은은한 금빛을 발하게 했다.
우리나라에도 몇M에 달하는 불상들이 있으나, 이곳 영은사에는 웅장한 규모의 불상들이 다수 존재한다.
<약사전.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본인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향을 피우며 이곳을 방문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며 피운 향 연기가 약사전 앞을 메우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물론 독자적 불교문화가 있지만,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되기전 중국의 불교는 이렇듯 발전되어 있었을 것이다.
<대웅보전 뒷편으로 많은 대전들을 지나 다시 계단을 오르면 또 다른 대전들이 눈에 펼쳐진다>
계단에 오르기전 계단 앞쪽에는 사진과 같은 조각들이 보는이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이러한 조각들을 영은사에는 곳곳에서 찾아볼수있다.
<영은사의 제일 꼭대기에서 바라본 영은사의 후경>
<은은한 금빛의 석가모니상. 이 불상 역시 목조좌식불상에 도금한 형태이다>
우리나라의 목조식 사찰은 많은 외침으로 인해 찾아보기 어려워, 그저 남의 나라에서나 볼수있는 목조양식에 경탄해야한다는 사실이 해결할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영은사의 경내에 위치한 수 많은 나한들이 도열되어 있는 나한당>
이곳의 나한들은 각기 다른 모습 다른 표정으로 보는 이에게 경이로움을 전해준다.
<용홍동>
다른 이름으로 관음동 또는 통천동이라고도 불린다. 동굴에 들어가 북쪽을 향해 바라보면, 틈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유명한 '일선천(가는 줄의 하늘)'이라고 한다. 동굴입구의 좌측 밑에는 송나라때의 대표작품으로 매우 세밀하며, 생동감있는 '현장(당나라때의 인물)동귀(동쪽에서 돌아오다)'와 '백마(현장의 말)태경'과 두개의 조각이 있다.
<옥류동>
박쥐동굴이라고도 한다. 동안에는 옥으로 된 죽순과 얼음기둥등이 있어 옥류동이라고 한다. 동안에는 석으로 된 책상이 있으며, 남북조시대의 '시에링윈'이라는 시인이 책을 읽을 때 사용했던 것이다.
북송초기의 작품이다.
<청림동>
금광동이라고도 불리, 동쪽은 호랑이 입을 닮았다 하여 로호동이라고도 불리운다. 동내에는 서방삼성(서방의 성수러운 삼인-아미타불, 관음, 다세지), 오대 후 주나라때(951년) 조각하였다. 이것은 비래봉의 현재 가장 오래된 조각상이다. 동내에는 또하는 116개의 조각상이 있으며, '지공(불상의 이름)'의 침상과 큰 손자국등이 있다. 동입구의 벽에도 조각상이 있는대 북송초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작품이다.
영은사 앞에 위치한 비래봉에는 조각된 불상들이 340여개가 있다.
<절벽 중간에 조각된 불상>
<많은 외침으로 잃어버린 우리의 유산들이 하루빨리 우리품으로 돌아와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