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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연재에 규칙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는 급기야 19941님께 “당신의 결점은 인내심이 없다는 것이다”라는 개인적(?)인 충고를 듣기에 이르렀다. 나에게 개인적으로 충고까지 하는 이분은 대체 ‘뉘신쥐?’ … 곰곰 생각해 보니 누구신지는 나도 모르겠고, 이 모든 게 교화위원이라는 말을 내가 쓴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분 말의 요지는 “교화위원이라도 오래 하지 않으면 우리는 너의 결점인 인내심이 정말로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말 것이다”가 아닐까 싶다. 나는 이분 말에서 “위원”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얼마나 위압적일까 하는 것을 교훈으로 얻었다. 우리 아이들이 싫어하는 학교의 “선도위원”에서 멀리 혹은 가까이 “방송위원” 등등. 그러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이것이라도 오래 지키라는 말씀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위원’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얼마나 억압적일까
밝히자면 내가 법무부로부터 “교화위원”으로서 받은 것은 래미네이팅이 된 주민등록증 크기의 ‘쯩’ 하나뿐인데, 이것은 내가 구치소를 방문할 때 지문을 찍지 않고 그곳을 출입하는 용도로 사용될 뿐 아무런 권한도 없다. 그리고 오래 할 수밖에 없는 게 뭐 누가 그것의 유효기간을 정해 둔 것도 아니고 적성검사를 5년마다 하는 것도 아니어서 내가 법무부로 찾아가서 담당 공무원을 붙들고 사정해서 그것을 수거해 달라고 하기 전에는 그냥 하게 되는 것이니까 그렇다.
아무튼 이름이라는 것에 대해 그래서 지난주 내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지난주 한 업체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내가 사장과 함께 그 회사를 들어갔는데 그 사장의 지정 주차공간이 없어서 우리는 주차할 곳을 찾아 몇 바퀴를 돌았다. 수위는 사장 차를 알아보고 인사만 했을 뿐 사장이 알아서 자리를 찾을 때까지 자기 고유(?)의 업무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사장실에서 사장이 나에게 직접 커피를 타다 주었다. 솔직히 방문한 나로서는 그리 편한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신선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사장을 비롯해 모든 사람이 서로를 ‘지영님’ ‘철수님’ 하고 부르는 걸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조직생활을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작은 출판사 하나만 방문해도 몇 달 만에 바뀌는 직위 때문에 ‘공 대리’가 몇 달 만에 만나면 ‘공 과장’으로 바뀌어 골치가 아팠는데,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큰 업체에서 이런 호칭을 쓰고 있는 게 참 신선했다. 젊은 직원들에게 물어보니까 처음에는 자신들도 이런 호칭들이 낯설었다고 했다. 회사를 창립한 회장에게까지 ‘지영님’ 하고 부르자니 약간 민망한 감도 없지 않았단다. 그런데 이것이 자신도 모르게 효과를 발휘하는 시간은 회의 시간이라고 한다. 예전의 회사 같았으면 분명 사장님 의견에 반대되는 생각이 있어도 잘 말을 할 수가 없었는데, 이곳에서 호칭을 ‘지영님’ ‘철수님’ 하고 나니까 왠지 말이 자유로워지고, 말이 자유로워지니까 생각이 자유로워지더라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독일인과 결혼한 내 후배의 딸이 제 아빠에게 “한스야, 나 오늘은 너랑 산책하기 싫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 아빠는 한국말을 할 수 있고 딸은 아빠에게 한국말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당연히 내가 알아들었던 거다. - 약간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만일 내가 어릴 때 우리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하고 생각하자 웃음부터 나왔는데, 그럼 우리 아이들이 내게 이런다면? 하고 생각하자 뭐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지영아, 대신 엄마아, 하고 나머지는 이하동문이니까 말이다.
내 친구 궁산 남궁산 선생
이름… 참 중요한 것이다. 실제로 요즘 새로 구상하고 있는 소설에서 주인공들 이름을 생각하는 데만 며칠 밤잠을 설치고 아직도 고민 중이니까 말이다. 우리가 중학교 때 수첩에다 적어 가지고 다니던 김춘수님의 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은 그래서 엄청난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게 확실하다. 성서에도 하느님이 사람을 만들고 나서 모든 동물들을 데려와 친히 이름을 붙여주라고 한다. 하느님이 붙여도 좋을 것을 굳이 사람에게 하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릴 때 내 성이 너무 특이한 것이 싫었다. 가뜩이나 여러 가지 일로 눈에 뜨이는데 성까지 특이하니까 어린 마음에도 숨을 곳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학교 다닐 때는 누군가 나를 기억할 때 시작이 늘 이런 식이었다.
“아, 그래 네가 말이야, 그래 네가 공…”
더 어린 시절 아이들과 우르르 몰려 영화관에 갔다가 들키거나 했을 때도 선생님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애들 여러 명 있었지. 거기 공…하고 또 몇 명.”
이래서 나는 내 품행에 비해 과도한 벌을 받았다는 억울함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내 성이 공씨만 아니었어도 만일 그 선생님이 “그 김…”이라든가 “그 이…”라든가 했으면 나를 찾아내지는 못했을 것 아닌가 말이다.
그때의 포한 때문인지 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다 평범한 성을 가졌다. ‘독고’니 ‘구보’니 ‘공’이니 ‘석’씨 같은 흔치 않은 성을 주인공으로 삼는 소설가들은 대개 그 성들이 김, 이, 박, 최, 정 등등의 작가들이다. 오늘 심심한 분들은 한번 읽은 소설들을 떠올려 보시기 바란다. 내 말이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 성은 특이하기는 해도 그래도 외자라서 좀 낫기는 하다. ‘남궁’이나 ‘황보’나 ‘독고’, ‘제갈’ 등등의 성을 가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애환이 많은 것 같다.
내 친구이며 판화가인 남궁산은 이름 때문에 애환을 겪는 대표적 선수이다. 그는 성은 남궁이며 이름이 산인데도 평소에 늘 ‘궁산’이라고 불린다. 그는 이것을 두고 늘 ‘성(姓)희롱’이라며 분개하고 있다. 거기에 대한 주변의 변명도 가지가지인데 가장 그럴듯한 대답은 궁산이 그의 호라고 하는 것이다. 즉 그의 이름은 궁산 남궁산 선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화를 풀 그도 아니어서 특히 그는 여자친구들인 우리에게 ‘산 오빠’라고 다정히 부르도록 강권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도 가끔 ‘산 오빠’ 하고 부르면 돌아보지도 않는다. 낯설어서 말이다.
한번은 여행 중에 그가 이름을 가지고 하도 심하게 화를 내서 우리 모두 차 안에서 몹시 반성을 하면서 이제 다시는 그의 성을 가지고 놀리지 않으리라, 다시는 그를 궁산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전라도 여행길, 그런데 하필 우리는 천안~논산 고속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그러자 침묵 속에서 그가 갑자기 소리쳤다.
“얘들아, 여기 남논산 아이시(IC)가 있네, 완존 남궁산 동생네 집이다.”
방금 전 우리에게 성희롱하지 말라고 화를 낸 것을 삼분 만에 잊어버린 대가로 그는 그 이후로 영영 자신의 성과 이름을 온전히 되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 집에 모두 7명의 황보가 있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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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오빠: 거기 황보네 집이지요? 저는 황보 친구인데 황보 좀 바꾸어 주세요.
여섯 형제의 아버지인 황보님: 그래 어느 황보를 바꾸어 줄까? 우리 집에 모두 7명의 황보가 있는데….
공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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