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감상

김용택의 강가에서 (26) 일상을 존중하다/소소한 감동을 가꾸며 살고 싶다

도보사랑 2008. 11. 10. 18:14

2008/11/10 오후 3:00 | 시와 산문

이런저런 이벤트에 왁자한 세상
가정사는 무딘 부엌칼 되어가고…

자잘한 배려가 서로에게 스미면
신뢰의 강물이 흐르지 않을까요

나는 여태 결혼기념일을 따로 챙겨보지 못했습니다. 결혼한 날은 알고 있지요. 그때가 5공 때였습니다. 고은 선생님께서 주례를 서주셨지요. 지리산을 가셨다가 전주로 오시는 길이라 양복이 없어서 전주의 모 시인 양복을 빌려 입고 주례사로 제 시를 한 편 낭독해주셨습니다. 하객이 엄청 많이 왔습니다. 그런데 결혼 축의금이 다 밥값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지요. 결혼식을 하는 여성회관 근방 방위 수십 명과 교육청 직원들이 제 결혼식을 방위(?)한 수고로 축의금도 안 내고 밥을 먹어버렸거든요.

결혼한 지가 꽤 되었습니다만 지금까지 결혼식날 극장을 간다거나 근사한 데 가서 식사를 한다거나 꽃다발을 ‘짠’ 하고 주어본 적이 없지요. 결혼기념일도 그렇고 아내 생일이나 내 생일에 따로 ‘식’을 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나는 그런 ‘식’이 정말 쑥스럽습니다. 아내의 생일이 음력으로 열이렛날이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밤 지리산을 가고 있었는데, 한쪽이 약간 기운 달이 높이 떠 있었습니다. 내가 “야, 달 봐라!” 그랬더니, 아내가 “가만히 있어봐, 오늘이 내 생일인갑다” 해서 “그래, 거 참. 여기서 시방 어떻게 하지?” 하고 달만 보고 만 적이 있습니다.

나는 식을 싫어합니다. 축제도 싫어합니다. 나라의 커다란 기념식에서부터 개인들의 이런저런 식에 이르기까지 식장이란 식장은 될 수 있으면 참석을 안 하려고 합니다. 마지못해 가기는 가도 식장에 도착해서 전할 것만 전하고 얼른 와 버릴 때가 많습니다. 살다가 보면 식이 필요하겠지요. 또 바빠서 평소에 다하지 못한 서운한 일들을 어떤 날을 잡아 풀고 심기일전 새출발 하기도 하겠지요. 또 반드시 식을 해야 할 일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대개 식을 위한 식이 되는 그런 식들이 더 많지요. 새로울 것도 감동도 없는 형식적인 식은 정말 지루하지요. 살아오면서 많은 식을 보았지만 감동적인 식과 ‘식사 내지 축사’는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대통령 취임식에서부터 졸업식도, 결혼식도 그렇고 출판 기념회도 그렇고. 그렇게 감동 없는 식을 피하고 지루해하다 보니, 사람들로부터 무심하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처세를 잘 못한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일상을 존중하며 살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그렇게 펄펄 뛰어놀다가도 왜 식을 하며 애국가 부르면 모두 기죽잖아요.

사람들이 일상보다는 무슨 특별한 날이나 이벤트를 좋아하며 살다 보니, 자잘한 가정일에서도 양심에 ‘털’이 나버린 일들이 참 많습니다. 아주 가까운 집사람에게 잘한다는 게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잘하는 것인지 각자 인생관이나 가치관, 또는 살아온 집안 분위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아내에게 별로 바라는 게 없습니다. 아내가 이렇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없어요. 나는 그냥 삽니다. 아내도 나에게 바라는 것이 그리 없는 듯합니다. 나에게 이러저러 해라, 아니면 이렇게 저렇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말과 같이 그리 쉽지는 않지만, 서로 독립된 인격체로 살 일과 부부로 살 일을 잘 정리하면 살기 편하지요.

평생을 같이 살 사람에게 많은 것을 바라면 이루어지는 것보다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이 더 많지요. 날이면 날마다 같이 살다가 보면 상대를 귀찮고 짜증나게 하는 이런저런 아주 사소한 잔소리 거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욕망과 욕구가 몸과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젊은 날들은 더 그렇지요.




가정에서는 너무 사소하고 미미한 일들이 많아 그 작고 사소한 일들이 나도 모르게 ‘기정사실화’ 내지 ‘토착화’되어서 무디어진 부엌칼 같은 감정들 때문에 생각지 않은 일들이 돌출해 관계를 터덕거리게 하지요. 자기는 가만히 앉아서 텔레비전 보고 놀면서 밥을 하고 있는 아내에게 아무 생각 없이 “여보 신문 어디 있어, 좀 갖다줘” 아니면 “여보 재떨이 좀. 라이터, 돋보기” 하는 친구들을 더러 봅니다. 요새 젊은 부부들은 관계가 ‘쿨’ 해서 그러진 않겠지만 우리 나이 또래들이 대개 그렇지요. 밥을 먹으면서 아내더러 여보 국 좀 더 줘 라든가, 여보 물 좀 이라든가, 이런 사소한 잔심부름을 시키지 않고 국도 더 먹고 싶으면 내가 먹을 만큼 떠다가 먹고, 물도 먹고 싶으면 내가 가져다 먹으면 아내가 얼마나 한갓지게 밥을 먹을까요. ‘미세스 문’이 없는 집안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잘한 일들을 스스로 한다면 아내들이 편안하겠지요. 말하자면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아주 사소한 잔일로 한 인간을 존중하고 존경해 주는 일은 생활에 평화를 주는 일이겠지요.

부부간에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거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답답합니다. 어쩌면 그렇게나 모두 무뚝뚝한 얼굴들인지, 겁이 납니다. 사람들 얼굴이 왜 그리들 ‘권위주의적’으로 딱딱하게 굳어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권위주의는 실은 자기 약점을 감추기 위해 가장하거나 위장한 ‘뻥’이 대부분이지요. 권위는 저절로 몸과 마음에서 생겨 우러나는 것이니까요. 권위란 여유있고, 유머러스하고, 내추럴하고, 엘레강스하고, 뷰티하고, 뭐 그런 자유롭고도 자연스러운 ‘힘’ 아닌가요. 우리 어머니는 늘 ‘여우하고는 살아도 소하고는 못 산다’고 하십니다. “여보 저 노을 좀 봐!” “저기 들판 끝에 저 흰 억새 좀 봐!” 하는 한가한 말들로 감동을 줄 필요가 있지요. 세상에는 무엇을 보아도 감동할 줄 모르는 ‘죽은 나무토막’들이 너무 많지요. 감동은 작고 사소한 것들에서 옵니다. 크고 거대한 것들은 사람을 놀라게 하지요. 말을 안 해도 그냥 조용하고도 잔잔하게 통하는 사이도 좋겠지요.

≫ 김용택의 강가에서
그러나 말을 해서 서로 마음을 섞는 사이가 더 좋은 사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작은 감동이 큰 감동을 불러오거든요. 사소함이 서로에게 큰 힘으로 작용하기도 하지요. 세세함이 든든한 신뢰를 가져오기도 하니까요. 무엇이 좋으면 그 좋은 것은 싫어질 수도 있지요. 사랑 ‘땜’이 끝나며 끝인 관계가 세상엔 많고 쌨습니다. 힘들여 가꾸고 보살필 사랑이 더 많겠지만, 힘들여 가꿀 필요가 없는 사랑, 바닥이 안 나는 사랑, 낡을수록 좋은 사랑, 그런 사랑은 ‘그냥 좋은’ 사랑뿐입니다. 그냥 좋아야 무엇이 좋은지 모르고 좋아하며 오래오래 살지요. 나는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물드는 가을 풀밭 속에 노란 햇살처럼 소소한 일상을, 그 풀밭 속에 이는 잔바람 같은 작은 감동의 순간들을 가꾸며 살고 싶습니다. 태어났으니, 기왕이면 잘살고 싶지요. 이런 날 저런 날뿐 아니라 나는 그냥 일상이 편안한 날들이었으면 하는 것이지요. 어느 날 홀로 집에 있을 때 마루 위에 떨어진 해맑은 햇살을 볼 때처럼 그렇게 잠잠하게요. 그러나 말이 쉽지 노골적으로 ‘글로벌’하고 ‘버라이어티’한 우리들의 일상에서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요.

시골에서 살 때 나는 강 길을 걸어서 직장을 다녔습니다. 봄·여름·가을 강가에는 수많은 풀꽃들이 피어나지요. 길을 가다가 예쁜 붓꽃을 본다거나 탐스러운 구절초 꽃을 보면 몇 송이 꺾어 들고 집에 가지요. 집 가까이 가면 아이들이 뛰어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꽃을 주지요. 아버지에게 꽃을 받아든 아이는 꽃을 들고 집으로 먼저 달려가 아내에게 내가 준 꽃을 안겨 줍니다. 부엌문을 열고 꽃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은 아름답지요.

어느 봄날은 아이가 논두렁에서 자운영 꽃을 한줌 꺾어 들고 집으로 와서 나를 준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커서 중학생이 된 어느 봄날 학교 길에 있는 개나리꽃 잔가지를 하나 꺾어 들고 집으로 와서 “엄마!” 하며 꽃을 주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는 이따금 그렇게 작은 풀꽃 몇 송이를 들고 집에 오곤 했지요. 나는 그렇게 꽃 주고 꽃 받는 그런 소소한 일상을 가꾸고 존중하며 살고 싶습니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