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사령관 팽덕회의 비참한 최후
팽덕회[彭德懷-팽 데 화이] - 우리에게 제일 잘 알려진 중국 군부 인사이리라.
그는 1898년 10월 24일 빈곤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군인이 되고, 자기 실력으로 모택동 군의 간부가 되었다.
군인으로서 최고 영예인 국방부장까지 되었으나 모택동에게 버림을 받았고 나중에는 홍위병 난동 때 투쟁 대상으로 지목받아 갖은 모욕과 고통 속에 1974년11월 29일 쓸쓸히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에 문혁 세력인 사인방(四人幇)이 몰락하고 등소평이 집권하고 나서야 명예를 되찾을 수 있었다.
홍위병들에게 모욕당하는 늙은 팽덕회
그가 우리에게 특별 의미가 있는 것은 1950년 10월 UN군의 참전으로 김일성 패거리들이 패주하고 통일이 목전에 있을 때 참전한 30만 중공군의 사령관으로서 한반도 전쟁에 뛰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국전에서의 팽덕회
그가 통일을 방해하고 국군, UN군에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하게 한 중공군의 수괴라는 면에서 결코 달갑지 않은 인간이지만 한 인간이라는 차원에서 영욕의 삶을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 간 것에 대해서는 일면 동정심이 간다.
팽덕회의 젊은 모습
팽덕회의 초기 일생은 모택동이 연안에서 게릴라 전을 할 때 찾아갔던 젊은 미국 기자 에드가 스노우라는 기자가 쓴 ‘중국의 붉은 별'에 자세히 나온다.
그의 고향은 호남성 상담현으로서 모택동과 같은 동향이다. 어머니가 일찍 죽고 무능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할머니가 좌지우지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문제아였던 그는 무척이나 미움을 받았다.
그는 일찍 가출하여 막노동 직공 등의 힘든 일을 하다가 호남성 군벌의 군대에 들어가 열심히 근무하였다. 나중에 호남성 군벌의 사관 양성소를 졸업하고 간부가 되었다.
팽덕회의 첫번째 처- 대장정때 팽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갔다.
팽은 군벌들의 군대에서 진급을 거듭하여 소령이 되었다가 군벌을 흡수한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에 편입되어 군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공산주의를 접한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결국 모택동 군에 합류하게된다.
그는 모택동과 같은 호남성 상담현이 고향이므로 자연히 모택동의 신임을 얻었고 또 권력 투쟁 때 그를 열심히 지지하여
모택동이 중국 공산 운동의 맹주가 되게 하였다.
그는 모택동의 군대가 항일전쟁을 거쳐 성장하는 사이 군부 내에서 총사령원 주덕의 다음 가는 2인자가 되었다. 모택동의 신임이 두터웠기도 했지만 강소성 정강산 시절을 거쳐 대장정 그리고 항일전 등에서 큰 활약을 했던 전공의 영향도 컸다.
그의 전공은 그의 후배 임표와 군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툴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이 패배하고 장개석이 패퇴하자 팽덕회의 전공은 임표에 비해 다소 퇴색하였다.
임표가 만주 지방을 삼키고 북경으로 진격하며 장개석군의 붕괴를 유도하자 임표는 자연 최고의 무장으로 자리 매김하였다.
팽덕회는 전쟁이 끝난 후 군사 행정가로 변신하여 서북지방 개발에 몰두했지만 그가 전공을 세울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모택동이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자 그는 호출되어 한국 파견 중공군의 최고 사령원이 된다.
북한의 김일성과 팽덕회.-팽덕회는 김일성의 군사적 재능을 내심 크게 깔보았다.
북한으로 침투한 초기, 중공군은 맹진해오는 한국군 6사단 7연대를 초산에서 매복 공격해서 패배시키고 운산에서 미 1 기갑사단의 일개 대대를 섬멸하여 팽덕회는 그의 무명(武名)을 드높게 올렸고 중국인들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 이것이 중공군 전사가 말하는 1차 전역이다.
한 달 뒤에 미군이 정보 판단 미스로 잘못 시작한 총공세에 대항하여 팽덕회의 중공군은 덕천에서 한국군을, 군우리에서 미군과 터키군을 격파하여 북진한 유엔군을 총 퇴각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2차 전역이다 .
중공군이 후퇴하는 미군을 추격해서 남하하자 모택동은 팽덕회에게 서울을 점령하도록 지시하였고 팽덕회는 계속 남하하여 서울을 점령했다. 이 것이 3차 전역이다.
그리고 2월달에는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하여 한국군 8사단과 11사단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었다. 이것이 4차 전역이다.
1951년 1월 중앙청을 점령하고 즐기고 있는 북한군과 중공군
1951년 봄이 되자 팽덕회는 본국에서 충원을 받은 병력을 망라한 50만 대군으로 대 공세를 취했다. 중공군의 5차 전역[UN 측에는 춘계 공세로 알려져 있다.] 이었는데 팽덕회의 화려한 군공은 여기서 끝이 났다.
춘계 공세 초기에 중공군은 영국군과 한국군 6사단을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한미군의 대반격에 대패하고 북으로 패주했다.
포로가 된 중공군들
연천 북방에 총지휘소를 두고 5차 공세의 최종 목표인 대전 - 제천 선까지 진격을 꿈꾸던 팽덕회는 사령부가 위협 받게 되자 평안남도 성천까지 정신없이 도망쳐서 숨을 돌렸다.
한때는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욕심까지도 품어 보았지만 이 대공세 실패로 모택동과 팽덕회는 현 전선을 유지하다가 휴전을 하기로 합의 하였다.
휴전 협정문에 싸인하는 팽덕회
한국전이 끝난 1954년 팽덕회는 중국의 무인(武人)으로서 최고로 올라갈 수있는 중국 국방부장이 되었다.
그의 영화는 영원히 계속 될 것 같았다. 그러나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그의 인생은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모택동은 몽상에 빠져 인민들의 경제활동을 집단화 하는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집단화는 되지도 않을 급속한 공업화의 목표까지 같이 동반하고 있었다.
인민공사와 일도 같이하고 밥도 같이 먹고 소득도 공평히 나누는 공산주의 유토피아 같은 운동을 거국적으로 개시했는데 개인의 욕구와 차이를 무시한 이 몽상이 현실에서는 중국 경제를 거덜 내는 쪽으로 옮겨가게 하고 있었다.
중공군 사령관 주덕과 팽덕회
그러나 이런 현실의 실정을 모택동에게 보고하고 시정을 촉구하는 소리는 감히 아무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1959년 중국의 경치 좋은 여산에서 모택동과 중국 정권 간부들 이 모여서 회의를 열었다. 낮에는 그룹으로 토론하고 밤에는 여흥을 즐기는 회의였다.
그런데 그룹 토론 때 대약진 운동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고, 평소 대약진 운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팽덕회는 자기가 총대를 메고 이 문제를 모택동에게 직소하기로 마음 먹었다.
모택동의 숙소를 찾아간 그는 모택동이 이미 잠이 들어서 만날 수가 없다는 답을 듣자 무슨 생각에서 그렇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 자리에서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이의 개선점을 건의하는 건의문을 작성하여 남겨두고 돌아왔다.
그는 모택동의 고향 사람으로 이미 그를 30년간 형님처럼 모셔온 처지에 그 정도의 직소는 받아 줄 것으로 확신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무인의 생각이었을 뿐이었고, 이 건의문 형식의 편지는 팽덕회를 내리막으로 밀어버린 단서가 되었다.
그는 국방부장을 하면서 중국군이 공산주의 정신 교육이나 유격전술만 고수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소련군과 같이 신형장비로 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서 모택동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의 주장은 군에서 실시하던 모택동 우상화 교육을 그만 두자는 간접적인 주장을 담고 있었다.]
팽덕회의 두번째 처와 아들
아침에 그 건의문을 본 모택동은 격노하여 그 사본들을 회의 참가 간부들에게 배포하고 이를 비판하도록 지시했다.
그 전날까지 팽덕회와 같이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모택동에게 직소할 것을 말하던 간부들은 태도가 돌변하여 그를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그가 단순하게 생각했었던 편지가 그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는 반당분자로서 당에서 쫓겨나고 국방부장 자리에서도 면직되었다. 그리고 북경 인근 촌락으로 ‘유배’되었다. 국방부장 자리는 그의 후배 임표에게 주어졌다.
자기의 잘못을 지적한 팽덕회를 숙청한 모택동은 아사자가 수천만명씩 속출하는등, 대약진 운동의 문제점이 폭발하자 할 수없이 주석직을 이미 넘겨준 유소기에게 수습을 맡기고 당 의장직만 가지고 2선으로 후퇴하였다. 팽덕회가 나서지 말고 조금만 참았더라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였었다.
실용파인 유소기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수습하며 그의 권력 기반을 서서히 넓혀갔다.
유소기는 모택동의 눈치를 보다가 농촌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팽덕회를 사면하고 다시 불러들였고, 복권 된 팽덕회는 남서지방의 국방 산업을 증진하는 임무를 띄고 사천성으로 파견되었다.
그에게 이제 고생 끝의 말년 인생이 보장된 듯 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가 결국 죽어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던 끔직한 수모와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소기 일파에게 점점 소외 되던 모택동은 드디어 권력 외곽의 젊은이들을 유소기 타도의 도구로 쓰는 '문화혁명'에 발동을 걸었다. 거리는 홍위병의 광란으로 넘쳐 흘렀다.
유소기 - 모택동이 졸업했던 장사 사범학교 동문이다. 69년도에 사망했다.
소위 문혁으로 불리던 이 광란은 중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유소기는 갖은 수모를 당하고 권좌에서 쫓겨났다가 몇 년 뒤 죽고 말았다. 등소평도 이때 실각하고 농촌으로 쫓겨났다.
문혁을 주도하는 세력은 모택동의 처 강청과 왕홍문, 도원문, 장춘교 등 네 명으로 사인방이라 불렸다.
모택동의 처 강청은 팽덕회를 지독하게 미워하는 인간이었다. 사인방은 문화혁명이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홍위병을 시켜서 팽덕회를 사천성 성도에서 체포하여 북경으로 압송하게 하였다 .
팽덕회는 이 때부터 홍위병들에 의해 구금상태에 들어갔다.
그는 수도 없이 군중대회에 끌려나와 고깔 모자를 쓰고 묶인채 아들 딸 같은 어린 아이들에게 모택동과 공산당에 지은 죄를 고백하라는 다그침을 받았다. 뿐만아니라 툭하면 심문당하고 구타도 당했다. 그가 구타당한 것만도 130여회나 된다고 한다.
팽덕회가 당한 수모 중에 아마 최대의 굴욕적인 것은 수만명의 중국군이 운집한 대형 운동장에 전시되며 그의 무공 라이벌이지만 후배인 임표에게 공식적으로 매도당한 것이었으리라.
임표 - 팽덕회보다 9살이 어리다.
임표는 그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지명한 모택동에 속아 철저하게 이용당한 것이었는데, 그는 모택동에게 아부하기 위해 선배 팽덕회를 매장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홍위병 난동이 끝난 뒤 필요없게 된 임표는 모택동에게 내침을 받게 되자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소련으로 도주 중 내몽골에서 추락하여 죽고 말았다.
팽덕회는 끝내 홍위병들이 말하는 그의 '죄상'을 자백하지 않고 목숨을 이어갔다. 1970년 그는 홍위병들이 장악한 중국 정부에 의해서 정식 재판을 받고 무기 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는 교도소에서 병약한 목숨을 이어가다가 1974년 구타의 후유증인 폐렴과 혈전증으로 죽었다. 인생 마지막 부분인 8년의 세월을 죄수로서 살다가 전장 아닌 감방에서 비참한 인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죽고 2 년 뒤 모택동도 죽었다. 1976년 사인방을 몰아내고 집권한 등소평은 팽덕회를 재평가하고 복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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