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팔고 황무지 농가 일궈 살았더니… - 송성영 『모두가 기적 같은 일』
덜 벌고 덜 쓰며 더 행복한 비결
우리가 만나는 인연, 삶에서 얻는 모든 것이 기적
글 쓰는 농부가 말하는 ‘진정한 사람의 삶’
답답한 도시의 삶 속에서 사람들은 문득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런 생각은 그때뿐인 것이 대부분이고, 설령 자연을 만끽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누리는 편리한 것들을 포기하길 원하지 않는다. 과연 진정한 생태적 삶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자유로운 삶이란 무엇일까.
그의 이야기에 앞서 고민해 볼 문제는 ‘과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다. 그러나 정작 요즘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이 아닌 가짜 행복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짜 행복에 안주하고 있는 이들은 보통 조금 더 많은 돈과 좋은 집, 좋은 차를 욕망하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 욕망은 끝이 없을뿐더러 채워지기 힘든 문제가 있다.
송성영 씨가 다른 이들과 달랐던 점은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오래전 그 역시 보통의 삶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잡지사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삶의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전국의 산과 섬을 떠돌며 야인의 생활을 선택했다. 그 와중에 아내를 만났고 아이가 잉태되었다. 적어도 그 당시까지는 그 역시도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을 했다.
형제들의 도움으로 아파트를 마련해 살림을 차리고 글 쓰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얼마 못가 큰 고민에 빠지게 됐다. 이미 산생활을 경험했던 몸이 아파트의 생활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원치 않는 글을 쓰는 일도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적잖은 수입이었지만 고지서는 계속 쌓였고 삶은 고단하기만 했다. 그에게 일탈의 용기를 준 것은 다름 아닌 2살 난 아들이었다.
“아파트 8층에서 살았는데 아기가 베란다 밖으로 뭔가를 계속 던지는 버릇이 생겼어요. 알고 보니 아이도 아파트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거더라고요. 저하고 심정이 비슷했던 거죠(웃음). 그때가 아파트 값이 조금씩 오를 때였지만,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던 일을 다 그만두고 시골로 무작정 들어갔어요.”
빈 농가에서 시작한 생태적 삶
결혼과 함께 한 번도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 못했던 그는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충남 공주의 빈 농가를 찾아 시골생활을 시작했다. 아파트를 처분한 돈을 지인에게 빌려주고 받는 몇 푼의 이자 외에는 수입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무작정 황무지로 버려진 남의 땅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처음 30평이던 것이 차츰 50평, 100평으로 늘어났다. 쓰러져가는 농가를 수리해서 살아가는 탓에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덜 쓰면서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덕분에 아내는 재활용의귀재가 됐고 그 사이 둘째도 태어났다.
“공주 시절이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요. 모두 노니까 시간이 많이 남잖아요. 물론 돈벌이는 안하는 만큼 산에서 나물 등을 채취하고 밭에서 일했죠. 그래도 기름 값만 있으면 도시락 싸들고 아이들과 놀러 다니곤 했어요. 물론 아내가 힘들었겠죠. 화장실도 불편했고 물도 끌어다 겨우 쓰고 빨래는 개울에서 해야 했으니까요. 처음에는 이런 저런 갈등이 있어 엄청나게 싸웠는데 아내도 한 3년이 지나니까 산에 가서 나무를 할 정도로 변하더군요(웃음).”
세월이 흐르면서 집은 차츰 틀이 잡혀나갔다. 이사 초기 장모가 찾아와 30분도 안 돼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일어섰을 정도로 볼품없던 집은 그와 아내의 노력으로 사람 냄새나는 집으로 바뀌어간 것이다.
“빈집의 장판 버리고 간 것을 씻어서 쓰기도 하고 아파트 단지에서 버린 것을 주워다 쓰기도 하고요. 솔직히 처음 결혼하고 얼마 뒤 내려왔을 때는 아이들이 걱정이었는데 옷이나 신발은 거의 물려서 입히고 아내가 재봉틀로 만들어 입히니 돈 들어 갈 일이 거의 없더군요. 사실 쓰지 않으면 버는 것이란 생각으로 생활을 했어요(웃음).”
빈손으로 이주하고 새집을 짓기까지
그렇게 10여년을 소작농 글쟁이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삶은 평온했고 행복했다. 그러나 그와 가족의 삶에 다시금 불가피한 변화를 주는 사건이 생겼다. 집 뒤쪽으로 호남고속철도가 개발 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쓰러져 가는 농가의 상황은 풍전등화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다시금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막상 수중이 돈이 없는 상황에서 막막함이 앞섰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아내는 그간 몰래 모아온 돈을 조용해 내밀었다.
“결혼하면서부터 집 옆에 외양간을 고쳐 만든 화실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모아왔다고 하더라고요. 무려 3000만원이나 되더군요. 수중에 고작 100~200만 원 이상 가지고 있어본 적이 없던 터라 저에게는 엄청난 돈이었죠. 그걸 가지고 전국을 돌며 집을 구하러 다녔어요. 그런데 살만하다 싶으면 전기가 안들어오거나 문제가 하나씩 있더군요. 지리산까지 갈 정도였어요. 그러다 고흥 쪽에 가보니 그만한 곳이 없더라고요. 공장 굴뚝도 없고 사람들 인심도 좋고요. 땅값도 싸더군요.”
뜻밖의 일은 연이어 이어졌다. 10여 년 전 아파트를 처분하고 지인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받게 된 것이다. 지인의 사업이 부도를 맞아 되돌려 받기를 포기한 돈은 무려 2000만원이라는 큰 금액이었다.
“고흥에 1천500평정도의 땅을 마련했어요. 그전에는 버려진 남의 땅에 농사를 지었다가 처음 갖게 된 땅이었죠. 제가 자연농을 하면서 한 3년 정도 걸려 땅을 기름지게 해 놓으면 주인이 나타나 다시 내놓으라고 하는 상황을 한 세 번 당하다보니 내 땅이 필요하더군요. 그전에는 똥고집이 있어서 내가 만들어 놓으면 내 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땅을 마련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집을 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 남았다. 하지만 목수인 막내 동생이 인도로 떠나면서 장비를 한 무더기 안겨주고 간 덕분에 ‘얼마가 걸리든 한번 지어보자’는 심정으로 시작했다고. 다행히 도움을 주는 인연은 연이어 나타났다.
“동생의 소개로 후배 목수 하나가 집 틀을 짓는 정도만 반값의 임금으로 해준다고 나섰어요. 돈이 3000만원 남은 상황에서 어쩔 도리가 없었는데 신기하게 도움이 이어지더라고요. 살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집을 진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게 해준 주변의 많은 사람들, 그 관계 속에서 살 수 있지 않았나 하는……. 그 와중에 제가 책을 세권 내고 많은 독자 분들에게 받은 것도 그렇고 보이지 않은 인연이 집을 짓게 했다고 생각해요. 사실 책 제목을 ‘기적 같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죠. 사실 기적이라는 것은 아주 사소해요. 농사를 지을 때도 작은 미생물들과의 인연으로 가능한 거거든요. 최근에는 규모가 커지면서 관리기를 써서 개구리며 뱀, 지렁이가 잘려 나오는데, 고민이 되요. 기계를 쓰지 않으면 수입이 안되니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데, 저한테는 숙제에요.”
일상에서 바라는 것이 생기면 언제나 약속한 듯 그에게도 다가왔다. 어떤 인연을 거치든, 사소한 우연이든 그는 그런 모든 것들이 기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생활이었지만 마치 순리를 따르는 듯 모든 일들이 이뤄져 온 것이다. 시골 생활을 하면서 그는 양심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또 그들과 마음의 여유를 갖고 시민사회 활동도 할 수 있었다. 마을을 위한 도서관을 짓고 아이들에게 자유로운 교육을 실천하기도 했다. 아내와 부부싸움을(?) 할 때를 빼고는 원하는 글도 마음껏 썼다. 아들들 역시 보통의 아이들과 다른 교육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믿음으로 지켜보는 것이 아버지로서 그의 방식이다.
“우리 애들도 어떻게 살지를 거의 걱정 안합니다. 학교도 가고 싶지 않으면 그만두라고 했어요. 애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엄마 몰래 돈을 줄 테니 가출한번 해봐라’해도 안하더라고요. 시간이 남으니 큰 아들은 기타를 치기 시작했어요. 지인이 기타를 하나 줬는데 벌써 기타를 치면서 작곡도 하죠. 어쨌든 노래를 불러 뭘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단 자기가 즐거우니까 좋아요. 저는 자기가 즐거우면 분명 즐거운 인연을 만날 거라고 생각해요. 그 인연 속에서 먹고살 방도가 생길 거라고 믿고요. 저도 땡전 한 푼 없이 시작했지만 형제들에게는 농사를 지으니까 좋은 먹거리로 보답을 할 수 있잖아요. 아이들도 그런 인연법 속에서 자라고 살아갈 테니 걱정은 안해요.”
대략적인 이야기가 끝나고 독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의 생각과 근황, 아들에 대한 교육방식까지 다양한 시각의 질문을 접하며 솔직하고 담백한 그의 대답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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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고흥화력발전소에 대해 관여를 하는 부분이 많이 나오는데, 해결됐는지요. (그가 정착한지 얼마 안 돼 고흥은 핵발전소 후보지로 지정 됐다. 그는 군민들과 힘을 모아 결사반대 운동을 펼쳤고 고흥을 후보지에서 제외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다시금 화력발전소 건립이 추진된 것이다. 그는 역시 반대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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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제를 많이 고민했어요. 지금 원자력 쪽에 사람들이 관심을 쏟는데 화력은 거의 뒷전으로 물러나 있거든요. 고흥의 문제는 심각해요. 현재는 잠시 물러서서 환경영향평가를 거들먹거리고 있더군요. 하지만 그것은 하겠다는 거거든요. 몇 십억씩 들여 하는 환경영향평가를 하는데 안되는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않겠죠. 지도를 보면 우리나라 해안선은 거의 발전소로 촘촘하게 표시돼 있어요. 발전소라는 것 자체가 전 욕망의 덩어리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에너지를 쓰는 것으로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생각해보자는 거죠.
제가 공주에서 생활할 때는 60만원 갖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었어요. 아파트에 계속 있었다면 발전소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편하게 살 수 있었겠죠. 그렇지만 과연 행복했을까요. 그런 의문부터 먼저 던져 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만약 핵발전소, 화력발전소가 돌아갔을 때 우리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치가 있다면 괜찮겠죠. 하지만 지금 상태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없어져야겠죠. 줄여나가고 다른 에너지원을 찾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더구나 화력발전소 부지의 자연은 고흥만의 아름다움이 아니거든요. 대한민국 전체의 강산이고 지구의 자연이거든요. 어딜 가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고흥의 님비현상이라고 하는데 전 발전소를 세우겠다는 생각 자체가 이기적이라고 봅니다. 후손을 생각안하고 당장 에너지를 쓰고 소비하겠다는 것이죠. 거기서 나오는 물질들이 인간에게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는 안중에도 없어요. 지역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근본적인 물음이 필요해요. ‘과연 행복한가, 과연 필요한가’ 에 대한 문제를 두고 고민해야 된다는 거죠. -
누구나 송 기자님과 같은 일탈을 꿈꾸고 있는데 사실은 용기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선택을 하게 된 힘이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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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책에도 언급했지만 저도 두려움이 있어요. 그래도 계속 가겠다는 생각이지만, 두렵죠. 사실은……. 그래도 이런 삶을 선택한 계기는 역시 산생활을 한 경험이었어요. 그때는 한 1년 가까이 하루 한 끼 정도 먹으며 살았어요. 그래도 산에서 기운을 계속 받으니 살만하더군요.
그런데 어느 날 무지하게 배가 고프더라고요. 결국은 오가며 봐둔 고구마 밭에 서리를 하러 갔어요. 손을 뻗었는데, 고구마는 이미 캐고 똥을 뿌려놓았더군요. 배고픔은 그저 참으면 그뿐인데 그 두려움 때문에 우스운 상황이 된 거죠. 그 후부터는 생활하면서 그런 두려움을 딱 끊어버렸어요. 물론 집사람과 부딪힘이 있었지만 그런 생활이 가능하다는 걸 체득해갔죠. 살아가며 노하우가 축적되다보니 두려움이 조금씩 줄어들더군요. 없이 살아도 나름대로 아이들도 건강하게 크니 겁도 없어지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두려움은 늘 있죠. 하지만 그건 잠시뿐이에요. 살아오면서 어느 순간 두려움이 감소되고 대처하는 배짱도 생기는 것 아닌가 싶어요. 물론 큰 아들이 대학에 간다고 하고 등록금이 없으면 고민이 생기겠죠. 그러나 저는 그때 가서 또 해결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살아요. 사람은 걱정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거든요. 두려워하면서 사는 것과 안 두려워하면서 사는 게 사실 똑같아요. 현재 두려움이 없다면 미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요. -
학생들을 지도하는 특별한 지도법이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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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고민이 많아요. 두 시간 수업인데 화를 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꼭 한번은 화를 내요. 우리 아이들 수업은 막 풀어놔요. 책상위에 올라가 쓰기도 하죠. 그러다 교감이나 이런 사람들이 감시처럼 지나가면 제자리로 후다닥 와서 앉거든요. 교육의 문제인데 애들이 자유로운 게 아닌 거죠. 그걸 생각하면서 저는 ‘누가 와도 괜찮다. 구석에서 뭐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해요. 지금은 조금씩 자유롭게 하고 있어요. 글이라는 게 사실은 저도 마누라랑 싸우면 절대 못쓰거든요. 제가 글을 오마이뉴스에 못 올릴 때는 싸울 때에요(웃음).
애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제 역할은 애들이 갖고 있는 것을 열어줄 뿐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가르치는 게 아니라 저도 동시에 마음을 여는 거죠. 저도 습관이 있으니까 그 것을 버리기 힘들죠. 저도 모르게 화를 내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에요. 그러다 아이들을 통해서 배우는 거죠. 물론 교육하는 입장에서 보면 무질서해 보이죠. 그래도 최소한 제 수업만큼은 열어주고 싶어요. 저까지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농사를 지을 때도 나까지 약을 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랑 같은 맥락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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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가 고등학교를 안간 이유가 궁금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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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풀무고교(대안학교)를 지원했는데 떨어졌어요(웃음). 그래도 저는 둘째는 믿어요. 제가 쓴 책 세권 중 삼분의 일이 둘째 이야기일거에요. 엉뚱하니까 저를 항상 열어줘요. 오히려 제가 의지하기도해요. 저는 아내와 종종 싸우지만 둘째는 엄마하고 부딪히기 싫으면 싫어도 해요. 그놈이 오히려 나보다 잘 살고 있는데 굳이 고등학교 가야된다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둘째 나름대로 걱정이 있겠지만 그것은 그 아이 몫이죠. 일단 전 자식을 믿어요. 저보다 낫다고 봐요.
저는 지식이라는 게 나이를 먹을수록 버리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버릴수록 자유로워진다고 느끼죠. 하물며 아들은 나보다 이미 더 버리고 있는데 그 이상 내가 뭘 주입할 이유가 없죠. 저는 부모 자식이 서로 자유로워야한다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부터 강요를 하지 않으며 키웠죠. 너를 자유롭게 대했으니 자유롭게 살아라인거죠. 그것 역시 생태적인 삶이에요. 그래야 서로 행복하지 않나 싶어요. -
좋은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는데, 싫은 인연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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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앞집하고 싫은 인연이 될 것 같은데(웃음) 그게 딜레마에요. 지나가며 인사는 해요. 그런데 사는 방식이 저랑 달라요. 보험회사 부사장을 하셨던 분이시라는데, 그냥 인사하고 지나죠. 가능하면 서로 괴롭지 않게 부딪히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그렇다고 속으로 꿍하고 그런 것은 없어요. 내가 괴로우면 나만 손해니까요. 내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 그 양반도 해코지할게 생길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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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새기고 사는 구절이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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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 선생님의 책, 『나락 한알 속의 우주』를 보고 존경하게 됐어요.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제가 배추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쓰는데 배추 하나 속에 다 있더라고요. 8년째 심고 있는데 필요한 것을 쓰고 나머지는 거름으로 만들어요. 얼마 전에는 그 밭에 콩을 심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배추가 쫙 나있더라고요. 배추씨가 떨어지면서 생긴 거죠. 때 마침 어떤 할머니가 찾아와 약 안치고 농사하는 사람을 찾아왔다며 며느리가 위암에 걸려 음식을 해주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많이 있다면서 듬뿍 드렸죠. 그런 인연들이 수없이 많아요. 또 배추가 잡풀을 막아주더라고요. 벌레도 콩에 안 붙게 하고요. 배추가 모든 것을 다 주더라고요. 전 그런 게 기적이라고 봐요.
그는 말이 끝날 때 마다 버릇처럼 기적을 이야기했다. 삶 속에 오가는 모든 스침이 그에게는 기적처럼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런 그의 말을 들으며 독자들의 표정 또한 처음에 비해 조금 더 편안해진 듯했다. 모든 편리함을 다 누리며 사는 도시인들은 과연 일생에서 몇 번의 기적과 마주할까. 행복의 잣대는 드리우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달리 보이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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