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의 외부필진인 김성구 한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미디어오늘을 통해 '경향신문의 이상한 자본론 강의'란 제목으로 경향신문에 연재된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해 비판하였습니다. 이에 '오늘 자본을 읽다'의 필자인 강신준 교수가 김성구 교수의 비판글을 반박하는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을 미디어오늘에 보내와 게재하였습니다. 이후 강 교수의 반박글이 게재된 후 다시 김성구 교수가 반박에 대한 재반박글을 보내왔고 다시 강신준 교수가 재반박글에 대한 반론을 보내와 게재합니다.

미디어오늘은 경제학의 고전으로 손꼽히며 전세계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인 맑스주의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두 노장 경제학자들 간의 논쟁을 통해 자본론 해석에 대
한 학문적 발전이 있기를 기대하며 두 경제학자의 논쟁을 지면을 통해 이어가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논쟁 글 순서>
1. 경향신문의 이상한 자본론 강의
2.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
3. 강신준 교수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김 교수께서는 원래 두 꼭지의 글을 계획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첫 번째 글이 나오고 두 번째 글을 올리기 전에 내가 답글을 내는 바람에 아마 두 번째 글은 잠시 중단되고 우선 내 답글에 대한 반론을 쓰게 된 모양이다. 이제 첫 번째 글에서 문제가 된 사항들에 대해 두 사람이 각자의 얘기를 한 셈이므로 이쯤에서 중간정리를 한 번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도 김 교수의 두 번째 글이 이어져야 할 것이고 지금까지의 얘기로 이미 우리 두 사람 사이의 견해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견해 차이 그 자체보다는 그 차이의 내용에 대한 것으로 얘기가 옮겨져야 우리의 얘기가 무언가 건질 것이 남는 생산적인 것으로 되리라 본다. 이미 드러난 차이를 계속 반복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지루한 일일 것이고 그것은 애초 신문 연재를 통해서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고자 했던 내 본래의 의도를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1. 지금까지 논의의 중간 정리

우선 그 동안의 글에서 드러난 두 사람의 차이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내가 썼던 답글에 대하여 김 교수가 반론을 제기하였고 거기에서는 크게 세 가지 문제가 다루어졌다.

첫 번째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해석 문제이다. 나는 마르크스의 글을 근거로 변증법적 발전이 유기체의 성숙과 비슷한 것이라고 하면서 “긍정적 이해”와 “부정”이 착종하는 이중적 의미로 설명하였고 김 교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를 표하였다. 따라서 독자들께서는 변증법의 이런 이중적 개념에 대해서는 두 사람 사이에 논란이 없다는 것을 이해했으면 한다.

김 교수와 나 사이의 차이점은 이들 두 측면 가운데 어떤 면을 강조하느냐에 있는 것 같다. 김 교수는 반론에서 자신이 “부정”을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준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막상 변증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면서 “긍정적 이해”와 이 “부정”이 서로 어떤 관련을 갖는지는 거의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사실상 “긍정적 이해”의 의미는 사라지고 “부정” 일변도의 입장이 드러나고 있다. 이를 위해 김 교수는 마르크스의 <혁명사 3부작>을 예로 들면서 마르크스가 “부정”의 관점에 줄곧 서 있었다는 “문헌적 근거”를 대기도 하였고 내가 변혁과 개혁이라는 용어를 혼용하면서 “긍정적 이해”의 빌미를 들이밀려고 하는 것에 대해 “해괴한 용어법”이라고도 주장하였다. 김 교수가 왜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는 두 번째 문제와 직접 관련이 있어 보인다.

둘째 김 교수는 이런 차이가 결국 그가 나에게 붙이려고 했던 “수정주의” 딱지와 관련된 것임을 곧이어 밝히고 있다. 단지 그는 내가 곧바로 수정주의인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에 대해 수정주의적 색채를 입히려 하였다고 한 발 물러섰는데(같은 말을 이처럼 다르게 표현한 까닭은 내가 지난번에 정의한 수정주의 개념 때문인 것 같다) 이것은 자칫 “언어의 유희”로 빠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어쨌든 그는 내가 수정주의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이들 두 가지 문제는 결국 김 교수와 나 사이의 관점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나는 이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얘기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김 교수의 글에 대한 직접적 반론보다는 독자들을 위한 설명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세 번째 봉건제에 대한 이해는 지난번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얘기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김 교수는 줄곧 수탈이 본격화되는 후기 봉건제만을 얘기하고 무엇보다 개미가 가난하다는 사실에 집착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를 예로 든 것은 가난 그 자체가 아니라 가난의 원인에 대한 것이다. 봉건제의 가난과 자본주의의 가난은 그 원인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자의 원인은 경제구조 외부의 문제들(자연재해나 영주의 경제외적 강제)이지만 후자는 경제구조 내부(교환구조를 이용한 노동력의 수탈)에 그 원인이 있다. 따라서 그 해법도 전자는 경제구조를 개혁할 필요가 없이 기우제를 지내거나 영주를 처단하면 해결되는 문제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자본가를 처단하거나 기업을 해체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구 소련과 크메르 루주의 사례를 참고할 수 있겠다) 경제구조 그 자체를 개혁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김 교수의 설명에서는 착취관계가 성립하지 않던 초기봉건제의 구조와 경제구조 내부의 요인에 의한 설명이 빠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봉건제 후기 농민들 가운데 부농으로 성장한 사람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고,(이들 부농은 영주권이 약화된 조건에서 생산력의 진보에 따른 농가 내부 잉여의 증가 때문이었다.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가 현실에서 실현되었던 것이다)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가 자본주의 이전에 만들어져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이유도 설명할 방법이 없다.(이 우화는 지배자들이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현실을 왜곡시켜 지어낸 신화 같은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누가 보더라도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문제는 이 정도에서 덮었으면 한다. 애초 얘기의 핵심이 아니라 설명을 위해 끌어댄 비유일 뿐이고 더 이상 계속되면 독자들에게 지루한 얘기가 될 가능성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부분에서 또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교환관계를 얘기하면서 생산관계를 함께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먼저 교환이라고 설명한 다음, 실은 이 교환의 배후에 숨겨진 생산관계가 모순의 본질이라는 내용을 “나중에(!)” 설명했기 때문에 앞부분의 설명만을 본 사람들이 헷갈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자본>의 설명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뿐이다. 가치를 설명하는 곳에서 마르크스는 교환만을 설명한다. 그런 다음 그 교환의 수수께끼(교환을 통해서 가치가 늘어나는)를 제기한 다음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에서 비로소 교환의 배후에 생산관계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아직 설명하지도 않은 것을 내가 미리 앞질러 설명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1층에서 2층으로, 그런 다음 다시 3층으로 순차적으로 올라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마르크스의 서술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3층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3층으로 올라가는 1층과 2층의 과정을 더욱 중요시했는데(그래서 “자본주의의 지양!”이라는 극히 단순한 결론을 위해 <자본>은 무려 3,000쪽의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 결론을 얻어내는 과정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이는 3층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긍정적 이해”와 관련된 부분이다. 이런 중간과정을 생략해버리고 결론에만 조바심을 내면 그것은 사실상 3층을 입으로만 되뇌일 뿐 실제로는 건설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2층이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노동조합 강의에서 많이 들었던 것처럼 “요컨대 결론만 얘기하소!”라는 것인데 그것은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얘기나 마찬가지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프랑스어판 서문에서 결론에 조바심내는 이런 태도를 우려했는데 어쩌면 김 교수와 나 사이의 차이점이 이 부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김 교수가 앞서 거명했던 나에 대한 비판의 글들이 모두 이처럼 결론에 조바심을 내는 글들이었기 때문이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보아야 한다”라는 우스개 얘기가 있지만 이것은 마르크스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 3,000쪽이 넘는 막대한 분량의 책을 특정 부분만 읽고서는 곧바로 결론을 추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오늘 얘기의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그것은 김 교수와 나 사이의 차이에 대한 얘기이다. 그 차이는 김 교수가 이미 구분했듯이 “수정주의”라는 딱지와 관련된 것이다.

2. 딱지의 종류와 기원에 대하여

독자들께서 김 교수와 나의 차이에 대해서 당장 궁금해 할 일은 아마도 “수정주의”라는 딱지일 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먼저 알아둘 점은 딱지의 기능이다. 공포영화를 보면 강시에게 부적을 붙이고 뱀파이어에게 십자가를 들이밀어서 무력화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딱지의 기능은 바로 그런 것이다. 상대의 입을 틀어막는 봉인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딱지는 사실 더 이상 말을 나누지 않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요즘 유행하는 말로 “닥치고!”) 따라서 다양한 의견을 모아서 이들 간의 합의점을 찾아내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끌어내려는 민주적인 운동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기능을 갖는다.

우리 보수진영은 자신들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 하는 사람들에게 습관적으로 “종북”이나 “좌파”라는 딱지를 남발하곤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 자신들이 반민주세력이라는 것을 만방에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 진영 내에도 이런 딱지 붙이기가 언제부터인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보수진영의 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 민주주의가 사라졌을 때 시작된 것이다. 바로 구 소련의 볼셰비키 독재체제 때부터였다. 김 교수께서는 이들 딱지의 차이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들 딱지에 대한 설명을 좀 드리고자 한다. 김 교수가 사용한 딱지는 수정주의, 개량주의, 사민주의의 세 가지이다.

우선 이들 딱지는 각기 용도가 서로 다르다. 그래서 그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난 번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마르크스는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 변혁의 목표(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변혁)를 제시하였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대립적 전술과 협조적 전술)을 함께 제시하였다. 김 교수께서 언급한 <프랑스 혁명사 3부작>(세 개의 조그만 팸플릿인데 <프랑스의 계급투쟁>, <루이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프랑스 내전>이 바로 그것이다)에 이들의 얘기가 주로 담겨 있다. 수정주의란 변혁의 “목표”를 논의할 때 내가 생각한 목표와 다를 때 상대편에게 붙이는 딱지이다. 반면 개량주의는 “수단”이 서로 다를 때 상대에게 붙이는 딱지이다. 사민주의는 이들 두 가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딱지이다. 사민주의는 구 소련의 볼셰비키가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붙인 딱지이다. 즉 세 가지가 각기 용도가 다른 것이다. 김 교수는 이들 세 가지 딱지를 한꺼번에 나에게 붙이고자 하였는데 아마도 이들 딱지의 용도를 정확히 구분하지 않아서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이 아닐까 싶다.

수정주의 딱지를 붙이려면 내 글에서 내가 목표를 포기했다는 증거를 함께 제시했어야 하는데 김 교수는 내 글 속에 그런 증거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았을 것이다. 개량주의라는 딱지를 붙이려면 내 글에서 전술적 수단의 내용을 찾아서 반대의견을 제시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특정 현실의 국면에서 내가 제시한 어떤 정책적 수단이 문제가 되는지를 얘기해야 하는데 그것은 이번 연재의 경우 해당 사항도 아니고 지면도 부족해서 내가 언급한 내용이 별로 없다. 물론 과거 내가 썼던 논문들에는 많이 들어있는데 김 교수께서 그런 글들을 본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개량주의라는 딱지의 근거는 김 교수의 글 어디에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들 두 딱지는 별다른 근거도 없이 김 교수가 자의적으로 붙인 것이다. 설마 우리 보수진영에서 딱지놀이를 배운 것은 아닐 것이므로 김 교수의 실수는 아무래도 마지막 딱지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마지막의 사민주의라는 딱지는 김 교수가 볼셰비키의 관점을 가졌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일인데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김 교수에게서 그런 그림자가 언뜻 보이기는 한다. 이들 볼셰비키가 바로 마르크스주의 진영 내에서 딱지놀이를 벌인 원조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구 소련이 왜 망했는지에 대한 설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의 관점이 옳았다는 주장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이것은 나에게 딱지를 붙이기 전에 먼저 김 교수 자신이 방어적인 변론을 해야 할 부분일 것 같다. 혹시 다음 글에서 이 부분의 얘기를 좀 전개한다면 독자들에게(나도 포함하여)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수정주의와 개량주의 딱지는 김 교수와 나 사이의 차이와 관련하여 좀 더 얘기할 부분이 있어서 뒤에서 따로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사민주의 딱지에 대해서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소련 공산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볼셰비키 혁명.
 
볼셰비키는 왜 사민주의 딱지를 사용하게 되었을까? 민주주의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보수진영과 볼셰비키는 사실 겉모습은 다르지만 혈관 속에는 같은 피가 흐르는 친족지간이기도 하다. 볼셰비키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게 된 이유는 1917년 러시아의 특수한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10월의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다음 실시된 제헌의회 선거에서 볼셰비키는 25%밖에 지지를 얻지 못하고 볼셰비키의 정적인 사회혁명당이 57%의 지지를 획득했던 것이다. 선거결과에 따른다면 볼셰비키는 권력을 사회혁명당에게 내어주어야 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1918년 1월 6일 개원한지 하루 만에 의회를 해산시키고 독재의 길로 접어들었다. 당연히 독재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만들어낸 개념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이고 그때부터 마르크스는 엉뚱하게도 공산독재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사민주의 딱지와 관련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역사적 진실을 알려두고자 한다. 마르크스가 살아 있을 당시 마르크스를 따르던 노동운동가들은 모두가 사회민주주의자임을 표방하였다. 자신들이 지향하는 운동의 목표가 사회화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1869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이었던 독일의 아이제나허 분파의 명칭이 사회민주노동당이었고 이후 마르크스를 따르던 조직은 모두 이 명칭을 뒤따랐다. 사실 원래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출발한 사회주의는 “경제적으로” 자본가가 독재를 행사하는 자본주의를 민주화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부르주아들이 봉건세력의 독재를 깨뜨리고 “정치적으로” 달성한 민주주의를 마저 완성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그래서 프랑스혁명의 정당성은 곧 사회주의 혁명의 정당성이기도 하였고 내가 “긍정적 이해”를 강조한 것도 모두 이런 의미에서이다) 오늘날 유럽의 주요 나라들의 노동자 정당의 명칭이 사민당인 까닭은 그것들이 모두 마르크스에게서 출발했다는 흔적을 알려주는 것이다.

볼셰비키 자신이 속해있던 정치조직의 명칭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포기하면서 이제 사민주의와 자신을 구분해야 했던 볼셰비키는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마르크스에게서 찾아내어 그것을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민주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민주주의에서 독재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당시 마르크스 진영의 최고 이론가로 손꼽히던 카우츠키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 1917년 11월 혁명 이후 러시아 노동자 평의회에서 좌파 사회혁명주의자들과 함께 다수파를 이루게 된 볼셰비키는 제헌의회의 해산 후 지금까지 한 계급의 투쟁 조직이었던 소비에트로부터 국가 조직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러시아 국민들이 3월 혁명에서 쟁취했던 민주주의를 폐기했다. 그럼으로써 볼셰비키는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자(Sozialdemokrat)라고 부르는 것을 중단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공산주의자(Kommunist)라고 부르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중에서

볼셰비키의 이런 변절은 당연히 마르크스주의 진영 내에서 문제가 되었고 이것은 논쟁으로 발전하였는데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논쟁”이다.(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다음 주에 출판될 <프롤레타리아 독재>(카를 카우츠키, 지만지)를 참고할 수 있고 논쟁에 대한 나의 해설을 참고하려면 한길사에서 출판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참고할 수 있다) 김 교수가 사민주의 딱지의 근거로 제시했던 문헌적 근거인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은 바로 이 논쟁에서 핵심저작을 이루었던 것들이다. 김 교수의 마르크스 해석이 이들 저작에서 일관성을 찾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문제는 깊이 다루면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위의 책을 참고하도록 소개하는 선에서 이만 그칠까 한다.

어쨌든 이 논쟁을 거치면서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정당성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들을 비판하는 모든 정치적 견해에 딱지를 붙일 필요를 느꼈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민주주의 문제가 특히 그러했고 사민주의 딱지는 그렇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볼셰비키의 소련이 붕괴한 것은 그들의 두려움이 결국 현실로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그들이 만든 딱지가 불행히도 효력이 없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그들이 마비시키려 했던 “사민주의자 강시 마르크스”는 결국 도로 살아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김 교수가 만일 나에 대한 사민주의 딱지의 정당성을 계속 주장하려면 그는 우선 그 딱지의 원조인 볼셰비키와 자신의 관계를 정확하게 밝혀야 할 것이고 자신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를 지지한다는 것을 밝혀야만 할 것이다. 또한 그런 볼셰비키가 왜 붕괴하였는지, 그리고 이미 붕괴를 통해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상실한 그것을 되살리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모두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김 교수는 아마 상당히 긴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3. 생산적 논쟁을 위한 제안

마지막으로 얘기할 점은 김 교수와의 얘기를 생산적인 것으로 끝내기 위한 나의 제안이다. 지난 글에서도 말했지만 김 교수와 나의 차이점은 마르크스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차이점이다. 마르크스의 진의 여부는 무덤 속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을 수 없어서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차이점은 당연히 각자의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제 확인된 바와 같이 그 차이는 변증법의 이중적 측면에서 내가 “긍정적 이해”를 강조하는 반면 김 교수는 “부정”을 강조하는 점에 있다. 이 차이를 통해 생산적인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제안을 이제 나는 드리고자 한다.

먼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는 이들 관점의 차이와 관련된 역사적 사례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긍정적 이해”와 “부정”이라는 관점의 차이는 사실 김 교수와 내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 이들 차이는 마르크스주의 진영 내에서 문제가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항상 문제가 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원래 산 위에서 보편적인 진리를 구명하다 나온 문제가 아니라 산 아래에서 당장의 실천과 관련되어 발생했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원조는 김 교수의 딱지에서 등장했던 수정주의와 개량주의의 문제이다.

이들 문제는 볼셰비키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에 이미 나타났고 볼셰비키가 문제로 삼았던 본래의 마르크스주의인 사회민주주의 진영 내부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딱지 문제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이들 문제를 둘러싼 논쟁의 내용은 복잡하고 일반 독자들에게는 지루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다루지 않는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한길사를 참고할 수 있다. 이 책의 앞부분에는 나의 해설이 실려 있다)

단지 논쟁의 배경은 내가 제안하려는 내용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간단한 설명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논쟁이 마르크스를 “올바로 해석하는”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논쟁에는 당대 최고의 마르크주의자들이 개입하였고 처음부터 “정답”을 찾기 위한 학술적 관심이 아니라 사민당이 당면했던 “실천적 진로”를 둘러싸고 이루어졌다. 개량주의와 수정주의는 서로 이어진 하나의 논쟁이다. 발단은 독일 사민당이 합법화된 데에서 시작되었다.(독일 사민당은 1878년∼1890년까지 공개 활동이 금지된 불법조직이었다) 합법화로 인해 당장 공개적인 실천(의회에 진출하는 정당은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선거공약을 내걸어야 하기 때문이다)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되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전술적 수단의 차이를 둘러싼 개량주의 논쟁에서 시작하여 결국 운동의 목표를 둘러싼 수정주의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이들 논쟁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산위에서 보면 산 아래 문제의 본질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해법도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 해법을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가 막상 실천을 하려 들면 산위에서는 보이지 않던 사소한 장애물도 많이 보이고 똑같아 보이던 문제도 곳곳에서 차이가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된다. 노동조직이 합법적 지위를 얻지 못하고 있는 조건에서는 실천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 논의는 현실과 거리가 먼 산 위에서 이루어지고 여기에는 마르크스 해석의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다. 산 위로 오르는 모든 길은 정상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집약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합법적 지위를 얻으면 노동조직은 산 아래로 내려가서 노동대중을 상대로 공개적인 실천을 하게 된다. 그런데 산 정상은 하나이지만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무수히 많은 갈래길로 나누어진다. 당연히 산 아래의 실천에서는 다양한 차이들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극히 단순해 보이는 “계급적 단결”만 하더라도 당장 대기업, 중소기업, 생산직, 사무직, 정규직, 비정규직 등의 이해가 모두 차이나고 이들 이해를 합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복잡하다. 최근 보듯이 비정규직 투쟁이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의 해석을 둘러싼 관점의 차이는 원래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장학퀴즈에서 정답을 맞추는 게임이 아니라 변혁의 실천을 위한 치열한 고민들의 차이가 만들어낸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 진영 내에서 있었던 모든 노선논쟁은 “정답”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천적 진로를 둘러싼 것이었다. 그래서 김 교수와 나 사이의 관점의 차이도 실천적 수단의 문제와 관련지어야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즉 현재의 실천과 관련하여 왜 “긍정적 이해”를 강조하고 왜 “부정”을 강조하는지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김 교수와의 논의가 이런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기를 희망하고 그것을 위해 내 얘기를 먼저 해 드리고자 한다. 나는 왜 “긍정적 이해”를 강조하는 해석을 하게 되었는가?

나는 1994년부터 노동운동과 실천적 고민을 함께 나누었고 우리 노동운동이 활동가들의 많은 헌신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막상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동안 나는 꾸준히 그 원인을 찾아보았고 결국 한 가지 조그만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노동운동은 “전술적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르크스의 과학적 유산을 계승하지 못한 데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고, 유산의 계승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변혁을 “단순한 부정”으로만 간주하는 내부의 경향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갑용 전 민주노총 위원장의 자서전 제목이 <길은 복잡하지 않다>(제목이 마침 적당해서 인용한 것일 뿐 이 위원장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니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였는데 실제로 노동현장에 이런 경향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수없이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노동운동이 “단순한 부정”에 매몰되어 전술적 성과를 얻지 못한 사례는 너무도 많다. 신경영전략, 노동법 개정, 비정규노동, 노사정위원회, 주간연속2교대제 등의 문제에서 우리 노동운동은 열심히 “반대”를 했지만 실질적인 전술적 성과를 거의 내지 못하였다. 물론 “단순한 부정”과 “반대”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87년 이전의 억압적 노동관계를 돌파하는 데에는 이런 “단순한 부정”이 중요한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이 합법화되고 자본의 전술이 극히 다양하게 계속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초기의 이런 “단순한 부정”이라는 전술만으로는 변혁은커녕 현상 유지도 어렵게 된 것이 우리 노동운동의 현주소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노동운동이 사물의 변화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사물의 이중적 측면을 적극 활용하는 전술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단순한 부정”과 “긍정적 이해”가 함께 결합된 입체적인 전술적 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이런 생각을 담아 각종 노동현안들에 대한 실천적 대안을 꾸준히 제시해왔고 그 대안 속에 “긍정적 이해”의 중요성을 담고자 노력해 왔다.(이와 관련된 내 글은 학회지나 인터넷 상에 모두 공개되어 있다) 마르크스의 해석에서 “긍정적 이해”를 강조하는 내 입장은 이런 실천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김 교수에게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김 교수께서 “긍정적 이해”보다는 “부정”을 강조하는 그런 해석이 어떤 실천적 전술로 활용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얘기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를 “부정”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지금 어떤 “쓸모”가 있는지를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따라서 김 교수의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리라 생각한다. 나는 노동운동사를 연구하면서 노동운동의 전술적 지도에는 “긍정적 이해”와 “부정”이 모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이 노동운동의 지평을 확장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국면에 대응하는 다양한 전술을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술적 지도에는 하나의 전술이 통하지 않을 때 사용할 수 있는 Plan-B의 전술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내가 지금까지 제시해왔던 실천적 전술들은 주로 우리 노동운동의 “긍정적 이해”의 부족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제 “부정”을 강조하는 방향의 새로운 실천적 전술들이 제시된다면 우리 노동운동의 전술적 지평이 한층 넓어지고 그것이 김 교수께서 시작한 이번 논쟁의 생산적 성과로 남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참고로 독자들을 위해 내가 그동안 제시해왔던 실천적 전술을 알려드린다면 임금체계, 월급제, 산업별 노동조합의 교섭정책, 주간연속2교대제, 정파분열 문제 등을 들 수 있다. 모두 우리 민주노조운동의 현안이 되었던 것들이며 이 가운데 일부는 우리 노동운동의 실천에 “극히 미미하게나마” 도움이 되었던 것들도 있었다. 독자들과 우리 노동운동을 위해 김 교수께서 풍부하고 적극적인 실천적 대안을 개진해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