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정조 대왕과 다산의 소통(疏通)

도보사랑 2014. 2. 5. 07:54

정조 대왕과 다산의 소통(疏通)

 

  훌륭한 임금과 어진 신하의 만남을 ‘풍운지회(風雲之會)’라고 다산은 기록했습니다. 바람과 구름이 만나야 이슬이 되거나 비가 되거나 눈이 되는 조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역사발전의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는 회동(會同)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산이 22세 때에 진사과에 급제하여 임금께 사은(謝恩)하던 자리에서 만난 ‘풍운지회’로부터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학생 시절에 임금의 하명을 받아 학문과 정사(政事)에 온갖 지혜를 바치면서 임금과 신하가 마음이 맞아 새로운 역사 창조가 시작되고, 28세 때 마침내 다산이 문과에 급제하여 정식으로 벼슬길에 오르면서 다산의 지혜는 국가경영에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임금과 신하가 뜻이 맞아 긍정적인 역사 창조가 진행될 때의 두 사람 사이를 흔히 ‘어수지계(魚水之契)’라고 표현하여 임금이라는 물을 만나 신하인 물고기가 자유롭게 활동할 공간을 얻었음을 상징하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정조 시절의 어진 정치는 임금과 신하들과의 막힘없는 ‘소통’이 가장 큰 몫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793년(다산 32세)의 대정(大政) 며칠 전에 임금이 채제공에게 비밀스럽게 묻기를, 남인 중에서 대통(臺通)에 급한 사람이 누구냐? 라 하시고는 아울러 이가환·이익운·정약용 등에게 말해서 자신들의 소견을 피력하게 하였다.”(자찬묘지명)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산은 남인 중의 소장 벼슬아치 28명의 이력을 제대로 밝혀 이들을 우선적으로 대통시켜야 한다고 임금께 아뢰었습니다. 그랬더니 노론 세상이던 정권에서는 겨우 한차례 대정에서 1명의 남인이 겨우 끼었는데, 그해의 대정에서는 8인의 남인이 대통되었고 며칠 사이에 또다시 대통자가 나오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28명 모두가 대통되는 성과가 나왔다고 다산은 기록했습니다.

  대통이란 대관(臺官)의 직책, 즉 사간원이나 사헌부의 관원이 되는 길이 열리는 일인데 문벌 센 집안의 자제들이 아니면 불가능했고, 대부분 노론 측에서 독점하고 남인은 한차례 대정에서 1인 정도 끼이던 때였는데 정조의 소통정치로 몇 년 사이에 남인 28명이나 대통이 되었다니 얼마나 획기적인 인사정책의 변화였는가요. 전제군주 국가이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임금과 신하의 소통으로 편파적인 인사정책이 시정되고, 올바르고 능력 있는 인재들이 요직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실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대정(大政)은 매년 6월과 12월에 실시하던 인사발령]

  편파적이고 독단적인 인사정책의 시정, 그것이야말로 정조시대의 위대한 선정(善政)이었습니다. 공정하고 공평하며 청렴하기 이를 데 없었던 채제공·이가환·정약용 등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던 인사였으니, 그만하면 임금과 신하의 소통은 넉넉하였고, 인사정책도 정상궤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어진 신하들과 충분하게 소통하는 임금, 신하들의 사심 없는 추천에 전적으로 동의하던 임금의 결단, 그런 인사가 나라를 바르게 세웠습니다. 오늘의 우리나라 인사정책도 그런 훌륭한 소통을 통해, 바르고 공정하고 공평하며 청렴한 인재들이 등용되는 길이 열리기만 기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