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도보사랑 2013. 12. 17. 09:30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류 동 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헤겔은 어디에선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소극으로!" 칼 마르크스가 프랑스혁명사 3부작에 남긴 말이다. 아마도 마르크스의 문구들 중에 요즈음 주위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것일 듯하다.

  "그"는 찢어지도록 가난한 집에 태어난 똑똑한 소년이었다. 자신의 머리와 결기가 아니고서는 험난한 세상을 견뎌낼 수 없는 배경 속에서 자라났으므로, 그는 세상 권세 가진 자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그것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투지를 키워나갔다. 숨쉬기조차 답답했던 억눌린 공간을 벗어나는 것만이 그의 꿈이었다. 광활한 만주 벌판은 그에게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것, 그 살아남음을 성취하는 방법, "밥벌이"와 "생존"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비웃음이나 냉소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현실 세상의 철칙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러하였으므로 그에게 이념 따위란 그저 차려입은 옷 위에 필요에 따라 바꿔 붙이는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았다.

반증 불가능의 정치

  그리고 그는 도둑처럼 다가온 해방을 맞이한 조국으로 돌아왔다. 어려서부터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살면서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자란, 학벌과 문화자본을 갖춘 엘리트들 사이에서, 그는 예의 생존본능으로 마침내 권력을 움켜잡는다. 무자비함. 그것은 그로서는 삶을 위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었다. 그에게 2인자란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철저하게 익힌 정치란 동지와 적을 구별하는 것, 반증 불가능한, 즉 적임을 증명할 수도 적이 아님을 증명할 수도 없는 낙인찍기에 다름 아니었다. 자신의 권력에 의문을 나타내는 자는 안보의 적이자 인민의 적으로 몰아붙였다.

  그런 그로서도 만고불변의 법칙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영원할 것만 같던 권력은 생물학적 죽음을 넘어서지 못했다. 대의명분 싸움에 지친,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달픈 삶에 지친 인민들은 그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혀 바로 그 혈육을 다시 지도자로 추대했다.

  그 "혈육"이 배운 것이라곤, 그러나 2인자를 두지 않는 냉혹함, 정적에 대한 철저한 숙청뿐이었다. 배고파 본 적이 없는 엘리트들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란 말인가! 지식인이란 얼마나 서글픈 존재인가? 그저 개인적 치부라도 드러내어 굴욕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명분은 어디에서건 찾아내면 되는 것이었으므로. 그저 도망갈 곳이 없을 정도로 실컷 능욕하고 나면, 알아서 사라져 갔고, 알아서 고개를 조아렸다. "혈육"은 의회 따위는 무시하고, 아니 적대하며, 공고한 체제를, 선조가 이루지 못했던 저 불멸의 권력을 꿈꾸었다. 안보의 적, 인민의 적은 의회 안마당에서 개 끌어가듯 끌어냈다. 언론은 그 장면을 생중계하며 나팔을 불어댔다.

  그러나 권력 또한 “사람의 일”이라면 역사는 두 번이 아니라 몇 번이라도 되풀이될 것이다. 그 "혈육"의 원조쯤 되는 이는 성난 인민의 손에 폐위되어 적국의 포로로 지내다가, 회한과 번민 속에서 숨졌다. 누군가의 예언처럼 그 선조의 동상은 길거리에 내팽겨졌고 역사의 반면교사로 길이 남았다. 마르크스에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나폴레옹 1세)이 "그"의 이름이고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이 그 "혈육"의 이름이었다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나폴레옹들이 있으되, 어찌 되었건 두 번 반복되는 역사의 대단원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미래가 불현듯 찾아오더라도 돌고 돌아 제자리로 와버린 인민들의 삶, 그 비루한 삶은 계속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De te fabula narratur!

  인용으로 시작한 글, 인용으로 맺는다. 『레미제라블』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말했다. "그가 역사에 남긴 최대의 해악은 스스로 독수리인 줄 아는 칠면조를 키운 것이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영국노동계급의 비참한 상태를 동정하며 위안을 구하는 독일인들에게 남긴 또 다른 한 마디. "이건 바로 네 얘기야(De te fabula narratur)!"

▶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글쓴이 / 류동민
·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 서울대 경제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