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플라톤을 읽으며

도보사랑 2018. 10. 2. 11:20
플라톤을 읽으며
고 세 훈 (고려대 명예교수)

  추석 연휴에 플라톤의 『국가』(Republic)를 읽었다. 주로 이차자료를 통하던가,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만 접하다가, 이참에 통독에 나섰던 것. 대학원 시절 수강한 정치철학강의에서 멋진 인품의 교수가 자신은 매년 꼭 한 번은 『국가』를 읽는다던 말이 문득 생각나기도 했지만, 시절이 수상한가, ‘기본’을 찬찬히 되새겨보자는 심리가 막연히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플라톤이 누구보다 사랑했던 스승 소크라테스를 아테네 민주주의가 죽음으로 내몰고, 정치에 대한 그의 환멸이 가장 고조됐던 무렵에, 그가 가장 정치적인 책을 썼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국가』는 도덕 혹은 정의의 의미와 그것이 구현되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집요하게 탐구한 책이다. 대부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두 형제-글라우콘과 아데이만투스-간 대화로 채워진 책에는 도덕, 행복, 선한 삶 등에 관한 추상적이고 규범적인 개념과 언명들이 넘친다. 그러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쉼 없이 동원하는 사례와 비유들에다, 좀 난해하다싶으면 거의 어김없이 되묻는 질문들과 뒤이은 소크라테스의 겸손하고 세밀한 부연으로 인해, 많은 점에서 논쟁적인 책이지만, 나같이 아둔한 독자도 흐름의 줄기를 좇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시장적 욕망이 길들인 대중

   플라톤이 꿈꾼 사회는 철인왕이 다스리는 공동체다. 도덕의 기본은 각자가 주어진 직분과 기능에 충실한 데서 출발하되(‘전문성의 원칙’), 대중을 교육하고 양육하는 주된 책임은 도덕과 선한 삶의 본질을 꿰뚫는 철학자 왕에게 주어진다. 가령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는 동굴에 갇혀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현실로 착각하며 평생을 사는 보통사람들과, 과감히 바깥세상으로 나와 태양이 비추는 만물의 실상(reality)을 경험하는 철인왕이 대비되어 있거니와, 가족, 재산 등 사적 삶을 포기한 채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추구해야하는 철인왕은 다시 어두운 동굴로 돌아가 미망을 벗어나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설득하는, 지난한 작업을 수행해야한다.

  도시국가라면 철인왕 통치를 꿈꿀 수도 있겠다. 그러나 철인왕을 키우고 찾는 일, 대중을 계몽하고 훈련하는 문제에 이르면, 우리 현실은 플라톤이 그린 세상을 암울한 시절이 낳은 낭만적 상상-가령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류(類)의-혹은 거기 비추어 현실을 재는 이념형(ideal type) 정도로 보이게 만든다. 무엇보다 사적 이기심을 공적 선을 위한 제1의 모티브로 긍정하는 시장체제에선, 대중들에게 새삼스레 도덕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난센스이기 쉽다. 얼마 전 작고한 평론가 황현산의 말대로 “가장 신실한 말이 가장 허망한 말”이 될 수 있거니와, 맨더빌 이래 자유주의 경제사상이, 그 수많은 변형들에도 불구하고, 자애적(自愛的) 개인의 시장적 자유를 금과옥조로 감싸 안는 한, 시장의 융성이 동시에 도덕의 쇠락을 조장하리라는 역설은 능히 예견할만하다.

  플라톤에게도 당대의 대중은 이미 욕망의 과잉에 끌려 다니며 마음의 평정과 조화를 잃은 불안정한 존재였다. 그런데 자유주의의 공격적 표출인 신자유주의가 길들이고 거기에 편승해온 ‘지구적’ 대중인데다, 좌우의 포퓰리즘마저 극성을 부리는 오늘의 현실에서, 도덕과 이타적 배려에 입각한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이란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우리의 남루한 자화상

   개체적 소비자가 부상할수록 공동체적 시민은 추락하기 마련이다. 이방 족속에 종살이하며 산지사방으로 쫓겨 다니던 때가 엊그제인데, 비교마저 민망한 한국의 난민수용 실태 앞에서도 상투적이고 구차한 변명으로 난민 반대를 선동하고, 장애인시설 하나 들어서려면 저마다 머리띠를 두르고 필사적인 ‘항전’에 나서는 것이 우리 모습이다. 재건축대상 아파트주민들의 토론방에는 가격담합과 임대비율축소를 위해 뭉치자는 욕망들이 날 것 그대로 들끓는다. 약자에 대한 멸시와 강자에의 동경이 일상화되면서, 우리 의식은 자연스럽게 가해자 문화에 동화된다. 재벌행태를 비난하면서도 내 자식만은 대기업의 일원이 되길 불철주야 선망하며, 불로소득자를 향한 도덕적 질타는 일확천금으로 인생역전을 꿈꾸는 욕망들과 한통속으로 얽힌다.

  심지어 윤리적 계몽을 선도해야 할 종교마저 물질적 이기(利己)를 앞장서 부추긴다. 잊을만하면 터지는 종교인들의 추문은 그렇다 쳐도, 웬만한 유명사찰은 사천왕문을 나서면 바로 불심을 돈으로 흥정하고, 대형교회 세습은 교회가 얼마나 물신주의의 오만에 포획돼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지오웰은 지옥을 암(癌)보다 더 무서워하는 기독교인을 만나보지 못했노라며 비아냥댔지만, 오늘날 돈의 힘은 내세(來世)에 대한 두려움마저 일거에 제압할 정도로 막강하다.

  그리하여 “핏빛으로 물든 이빨과 발톱들”(A.테니슨)이 뒤엉켜 싸우는 이 욕망의 아수라에서, 영악한 계산을 성공적 생존방식이라 뽐내며 오늘도 인간성의 마지노선을 넘나드는 우리는, 구조에 치이고 삶에 지친 무고한 희생자, 합리적 행위자일 뿐인가. 그런데 왜 그 인품 좋은 교수는, 수양서도 종교적 진리도 아니며 현실적합성도 없는, 플라톤을 오늘도 읽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