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리더가 행복하다면 그나라는 무기력하거나 망해가는 나라일 뿐이다. 백성들의 먹거리를 위해 노심초사했던 대왕.. 나라를 책임진 지도자는 어떠해야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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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독일 상수시 궁전에서만큼은 근심을 내려놓으세요.
大王으로 불린 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안식처
"제군들, 모자를 벗어라. 이분이 살아계셨다면 우린 여기 서 있지도 못할 테니까."
1806년 10월 25일 포츠담의 개리슨(Garrison) 교회 지하 묘지에 들어선 나폴레옹은 낮지만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자신을 수행한 장군들에게 명령했다. 장군들은 일제히 모자를 벗어 무덤 안의 인물에게 경의를 표했다. 나폴레옹은 지난 며칠 동안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연이어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고 포츠담에 도착했다. 이제 곧 프로이센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입성할 참이었다.
이에 앞서 나폴레옹은 평소 존경해마지 않았던 한 인물의 무덤을 찾았다. 도대체 누구길래 전장(戰場)의 천재인 나폴레옹이 이토록 높이 평가하는 것일까?대상은 프로이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로 평가받는 프리드리히 2세였다. 나폴레옹은 프리드리히의 로이텐 전투(1757년 12월)를 '이동, 작전, 결단이 낳은 걸작'이라며 "이 하나의 전투만으로도 프리드리히는 불멸의 인물이 되기에 충분하며 가장 위대한 장군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극찬했다.
베를린 남서쪽 경계에 있는 소도시 포츠담에 있는 상수시 궁전. 불어로‘근심이 없다’는 뜻이다. 프리드리히 2세가 풍광에 반해서 자신의 여름 궁전으로 지었다. /위키피디아
베를린 남서쪽 경계에 있는 소도시 포츠담에 있는 상수시 궁전. 불어로‘근심이 없다’는 뜻이다. 프리드리히 2세가 풍광에 반해서 자신의 여름 궁전으로 지었다. /위키피디아
이 대단한 인물을 찾아 나폴레옹은 경의(敬意)를 표했다. 왕의 무덤은 한때 성역(聖域)이었으나 지금은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다. 다만 장소는 개리슨 교회가 아니라 상수시 궁전으로 바뀌었다. 생전에 프리드리히 2세는 상수시 궁전의 정원을 최후의 안식처로 지정했다. 그런데 사후(死後)에 후계자가 유언을 어겼다. 위대한 국왕의 무덤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것은 죽은 왕의 소망보다 지금 왕의 정치적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왕의 무덤이 유언대로 상수시로 옮겨진 것은 1991년 8월 17일, 그가 죽은 지 205년 만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왜 상수시를 최후의 안식처로 고집했을까?
자연미·단아함 넘치는 상수시 궁전
상수시 궁전은 브란덴부르크주의 주도(州都)인 포츠담에 있다. 베를린 남서쪽 경계에 있는 소도시 포츠담은 프로이센의 왕들이 가장 사랑했던 주거지였다. 이곳에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왕들의 별장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왜 포츠담이었을까? 베를린을 벗어나 주변을 돌아다녀 보면 깜짝 놀랄 만큼 물이 많다. 곳곳에 강이 흐르고, 도처가 호수다. 이런 풍광을 누가 사랑하지 않을까? 특히 포츠담이 그러하다. 하펠(Havel) 강을 비롯한 20여 개의 강과 호수가 도시를 감싸 안고 있기 때문이다.
상수시 궁전은 단층으로 지어졌다. 규모는 크지 않다. 대신 단아하다. 가까이 다가가면 화려함에 놀라게 된다. 궁전을 돌아 앞으로 나아가면 정원으로 이어지는데, 정원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특이하다. 좌우로 포도밭이 발코니처럼 놓여 있다. 그래서일까? 정원에서 바라본 궁전은 켜켜이 놓인 포도밭 위에 떠있는 디오니소스의 은신처 같다. 이 은신처의 주인은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Ⅱ·재위 1740~1786)였다.
그는 프로이센의 왕과 독일의 황제를 통틀어 '대왕(the Great)'의 칭호를 받은 유일한 군주다. 포츠담으로 피크닉을 왔던 왕은 풍광에 반해 이곳에 자신의 여름 궁전을 지었다. 그리고 '상수시(Sanssouci)'라 이름 붙였다. 프랑스어로 '근심이 없다'는 뜻이다. 의미심장한 작명이다. 프리드리히 2세의 삶은 근심이 없었을까? 아니면 이곳에서만이라도 근심에서 벗어나 쉬고 싶었던 것일까?
父王과 대충돌했다가 화해
왕의 청춘은 불행했다. 그가 꿈꾸던 자유와 그에게 지워진 책임이 공존할 수 없었던 탓이다. 왕은 어머니를 닮아 예술과 철학을 동경하는 '자유인'이었다. 하지만 '군인왕'이라 불린 엄격한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선제후국에서 유럽의 열강으로 발돋움하려는 신흥 강국 프로이센에 유약하고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는 왕은 쓸모없었다. 군인왕은 아들에게 군대·규율·근면·절약을 강요했다. 아버지와 아들, 군인과 예술가, 왕과 왕자. 너무나 다르고 미묘한 둘의 관계는 계속 악화됐고 공개적인 비난과 육체적인 체벌로 파탄에 이르렀다.
프리드리히 2세(왼쪽)와 그의 묘지를 찾아가 경의를 표했던 나폴레옹(오른쪽 사진 가운데). /위키피디아
프리드리히 2세(왼쪽)와 그의 묘지를 찾아가 경의를 표했던 나폴레옹(오른쪽 사진 가운데). /위키피디아
감수성 예민한 프리드리히는 모욕을 참지 못했다. 상처받은 왕자는 영국이나 네덜란드로의 망명을 계획했다. 1730년,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때였다. 십 대 왕자의 망명이 성공할 리 만무했다. 망명은 사전에 발각됐다. 아버지는 아들 대신 이 계획을 도운 왕자의 친구를 처형했다. 왕자가 보는 앞에서. 그리고 프리드리히 왕자는 무려 18개월 동안 감금됐다. 이 사건은 왕자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됐다. 프리드리히는 자유를 찾고자 하는 자신의 욕심이 주변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했다. 그는 아버지와 타협하고 군사와 정치를 배우기 시작했다. 프로이센을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아버지의 꿈도 받아들였다. 1740년 5월,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의 사망으로 프로이센의 세 번째 왕이 됐다. 28세의 청년 군주 프리드리히. 그는 정치와 군사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정치가와 장군으로서의 자질을 타고났다. 아버지가 갖고 있지 못했던 전략적 안목과 결단력, 용기도 갖췄다. 지독한 아이러니다.
요충지 슐레지엔 확보해 强國으로
프리드리히가 왕위에 오른 그해 10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인 카를 6세가 죽었다. 남자 상속인이 없었기 때문에 대공녀 마리아 테레지아(Theresia·재위 1740~1780)가 영지와 작위, 권리를 모두 상속받았다. 500년 합스부르크 역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탁월한 전략적 안목의 소유자였던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의 국제적 지위를 바꿔놓을 절호의 기회임을 직감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 가운데 가장 산업이 발달하고 부유하며 전략적 요충지인 슐레지엔을 노렸다.
객관적 전력과 명성에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자신이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8만 명의 최정예 군대와 풍부한 자금을 물려줬다. 거기에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죽음을 각오한 자신의 결의까지. 왕은 각오했고, 결단했다.
1740년 12월,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전격적으로 슐레지엔을 점령했다. 서전을 승리로 장식한 프리드리히는 프랑스, 스웨덴, 작센, 바이에른 등을 한편으로 끌어들였다. 외교전의 승리로 슐레지엔 침공전쟁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판이 커졌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강하게 저항했지만 상대는 천재 프리드리히였다. 제국의 나머지를 지키기 위해 마리아 테레지아는 결국 슐레지엔을 포기했다. 몇 년 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와 러시아와 손잡고 복수전에 나섰다. 이른바 7년 전쟁이다. 하지만 자살용 독약을 품에 넣고 전쟁터를 누빈 프리드리히를 무너트릴 수는 없었다. 슐레지엔을 차지하고 지켜냄으로써 프로이센은 단숨에 유럽의 강국으로 급부상했다. 프리드리히는 젊은 나이에 '대왕' 칭호를 얻었다. 전쟁을 끝낸 왕은 내정을 개혁했고,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에 전념했다.
일과 근심·걱정에 평생 묻혀 살다
언제나 일에 치여 살았던 왕은 상수시에서만큼은 짐을 내려놓고 싶어 했다. 그래서였을까? 이곳 궁전 현관에는 갑옷을 벗고 방패를 내려놓은 전쟁의 신(神) 마르스가 서 있다. 마르스의 발아래에서는 사랑의 신 큐피드가 놀고 있다. 상수시에서 마르스는 평화의 신처럼 보인다. 역설적이다. 사실 왕은 이 사랑하는 궁전에서조차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일에, 근심·걱정에 묻혀 살았다. 아내가 있었지만 사랑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자식도 없었다.
46년의 긴 왕 노릇은 상수시에서 끝났다. 긴 세월 동안 대왕은 행복했을까? '아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국민을 지키기 위해, 고민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삶이 어찌 행복할 수 있을까?
만약 리더가 행복하다면 그 나라는 무기력하거나 망해가는 나라일 뿐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삶은 힘겨웠다. 상수시에서도 그는 안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가로 프로이센은 활력으로 넘쳤고 성장했다. 상수시로 가는 길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그도 걸었을 이 길,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서 강대국에 다가가려는 대왕의 마음이 절절하게 읽힌다.
大王 무덤엔 항상 감자가…
대왕 프리드리히 2세의 무덤은 여러 면에서 특이하다. 우선 대왕의 이름이 적힌 작은 석판이 전부다.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언제나 무덤 위에 감자〈사진〉가 놓여있는 것도 특징이다. 의아하지만 사연이 있다.
그가 오늘날 독일의 대표 식재료인 감자를 들여왔기 때문이다. 감자의 영양학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간파한 대왕은 감자 농장을 건설하고 전국에 전파했다. 오늘날 독일을 '감자 나라'로 만든 사람이 프리드리히 대왕이었다. 국민의 먹거리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던 그를 프로이센 국민은 'Old Fritz'란 애칭으로 부른다. 옆에 자신이 사랑했던 애완견들의 무덤 9기가 있다는 점도 색다르다. 권력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냉소적이었던 대왕이 애완견들을 마지막 동반자로 선택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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