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쯔시타 미쯔히로(松下光廣)의 다이남공사(大南公司), 그리고 베트남의 황태자
중국에 이은 대체 시장으로 베트남 열기가 한국에서도 뜨겁다. 베트남은 일본도 상당히 눈독을 들이고 있다. 고속철과 원자력발전소, 그리고 벚꽃 수천그루까지 심을 하노이의 최첨단 과학단지에 일본에 참여하고 베트남의 위성발사계획에도 NEC와 미쯔비시가 기술 제공을 한다고 한다.
베트남에 대한 일본의 연고는 상당히 깊다. 그 연원은 적어도 메이지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해외로 나간 이들은 아마쿠사와 시마바라 출신이 많았다. 어촌인 아마쿠사는 기독교인이 유독 많아 기근이 발생하면 식구를 줄이기 위해 어린아이를 죽이는 동북지방과는 달리 마비키(間引き 원뜻은 작물 재배의 솎아내기)관행이 적어 인구가 급격히 늘었고 상당수가 탈출구인 해외로 나갔다.
해외 성매매 여성 1세대인 카라유키상도 그래서 아마쿠사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멀리 마다가스카르까지 갔었던 카라유키상은 동남아 곳곳에도 일본 상인과 군대에 앞서 진출했다. 이때
15세의 나이로 아마쿠사에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건너가 사업으로 대성공을 거둔 이가 있었으니 마쯔시타 미쯔히로(松下光廣)라는 인물이다.
베트남 하이퐁에서 여관을 하던 숙모와 베트남에서 잡화점을 경영하는 친척이야기를 듣고 늘 동경하던 베트남으로 건너간 마쯔시타는 세탁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프랑스어와 베트남어를 배운다. 그가 현지에서 만난 베트남 청년 가운데는 독립운동에 뜻을 둔 이도 있어 서로 베트남어와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친교를 맺는데 이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중국에 이어 프랑스의 핍박을 받는 베트남인들의 저항의 역사를 알게 된다.
마쯔시타는 세탁소 아르바이트에 이어 사이공의 미쯔이물산 출장소에서 4년간 무역실무를 배우고 베트남에 건너온 지 10년만인 1922년에 무역회사를 하노이에 설립한다.
그리고 회사이름을 응우옌왕조(阮王朝)의 국명인 다이남(大南)공사로 정한다. 다이남은 남쪽의 큰 나라라는 의미로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는 청조에 대해서는 월남이라고 했지만 스스로는 다이남으로 자처했다. 다이남은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갈구하는 상징적인 국명이기도 했다.
마쯔시타는 프랑스인만 상대하고 돈 없는 베트남인은 무시해온 다른 일본인 상점과는 달리 베트남인이 맨발로 부담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사업장을 지향했다. 다이남 공사는 날로 번창해 9천명의 사원을 거느리는 상사로 성장하고 베트남 뿐 아니라 태국, 버마, 말레이시아 등으로도 지점을 늘리고 사업영역도 일용품 매매, 광업, 요업, 제조업 등으로 다각화한다.
마쯔시타는 다이남 공사를 베트남인을 위한 기업으로 성장시키면서 버는 돈은 베트남 독립운동을 위해 사용한다. 그가 베트남 독립운동을 지원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28년 베트남의 황태자 쿠온 데를 타이베이에서 만나면서부터다. 쿠온 데는 응우옌 왕조(阮王朝)의 시조인 嘉隆帝의 장남의 4대손이다.
쿠온 데는 이에 앞서 1906년 일본에 건너가 12년 동안 망명생활을 해온 터였다. 두 사람은 의기 투합해 혈맹을 서약한다. 마쯔시타 미쯔히로를 신뢰한 쿠온 데는 베트남 각지에 잠복해 있는 독립운동동지들의 연락책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이후 쿠온 데는 베트남에 있는 동지들에게 마쯔시타 미쯔히로는 자신의 대리인이니 그의 지도를 따르라고도 전한다.
쿠온 데와 그를 따르는 독립운동가이며 항불(抗佛)조직인 베트남 유신회를 이끌던 환 보이 차우(潘佩珠)는 일본 국내에서 독지가로 베트남 유학생들을 지원한 아사바 사키타로(浅羽 佐喜太郎あさば さきたろう)와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이누카이 쯔요시(犬養 毅いぬかい つよし), 오카와 슈메이(大川 周明おおかわ しゅうめい)등의 보호를 받는다.
당시 일본은 혁명가들의 요람이었다. 일본의 사업가 우메야 쇼키치(梅屋庄吉)가 중국의 쑨원을 후원했듯이 백인들로부터 아시아를 지키자는 아시아주의에 심취했던 오쿠마 시게노부 같은 여러 일본 정계의 거물들은 베트남 혁명청년들의 일본행, 동유(東遊)를 적극 받아들였다.
동유운동(東遊運動)은 그러나 베트남 혁명의 위험을 경계한 프랑스의 견제로 순탄치 않았다. 1908년 프랑스 총독부는 유학생 가족을 인질로 잡고 귀국을 압박한다. 프랑스는 쿠온 데와 환 보이 차우의 신병인도를 요구하자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이들의 국외퇴거를 명하는 선에서 타협을 한다.
1909년 이누카이 쯔요시는 출국하는 쿠온 데에게 상당액의 돈을 쥐어주게 되고 쿠온은 이후 홍콩, 싱가폴, 타이, 유럽을 전전하다 1915년에 일본에 다시 돌아온다. 이때 이누카이는 매월 그에게 대졸초임의 4배나 되는 돈을 지원한다. 나중에 이누카이는 총리직에 오르지만 1932년에 암살당한다. 이때 쿠온은 일본에서 아버지 같은 사람이 타계했다면서 슬픔에 잠긴다.
일본이 쿠온 데에 쏟은 지원은 베트남의 망명인사들이 일중전쟁때 일본편을 드는 효과를 본다. 쿠온 데는 1937년 베트남 부국동맹회(復国同盟会) 결성에 나서 베트남을 경유하는 장개석 국민당의 물자지원루트를 끊어 일본군의 베트남 진주를 지원하기로 한다. 베트남에게 중국은 숙적인데다 혁명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제휴해야 한다는 쿠온 데의 주장에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베트남인들은 동의했다.
한편 마쯔시타 미쯔히로의 친구이며 동유운동에 적극 나섰던 아시아주의자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는 동남 아시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오카와쥬쿠(大川塾)를 운영해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전문가를 배출한다.
오카와 쥬쿠에는 동아 경제조사국이란 부속 연구소도 설치됐는데 여기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오카와씨에게 가르침을 받은 니시카와 히로키(西川寛生)라는 인물은 마쯔시타 미쯔히로의 다이남 공사에 입사해 나중에 상무까지 지낸다.
베트남에서 마쯔시타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베트남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마쯔시타는 프랑스령인도차이나에 진주한 일본군과 특무기관장 코노미 우지도시(許斐 氏利このみ うじとし)도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마쯔시타는 호치민과 젊은 시절부터 친구였던 일본의 불문학자 코마쯔 키요시(小松 清こまつ きよし)와도 가까이 지냈다.
니시카와도 마쯔시타와 함께 프랑스 식민지 당국이 체포하려 한 민족주의자 응오딘지엠을 구출하는 공작에도 가담하는 한편, 베트남 사회를 관찰하고 인맥을 쌓는다. 응오딘지엠이 대통령이 되고 일본이 베트남의 댐 건설을 하게 된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어린나이에 단신으로 베트남에 건너가 다이남 공사를 일으키고 베트남 역사에도 깊숙이 관여한 마쯔시타 미쯔히로(松下光廣)는 일본의 전형적 상사(商社)의 신화로 남아있다. 동남아에 진출하는 일본인들이 베트남에 가기 전 반드시 학습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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