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Vom Kriege)을 소개한 메이지의 수퍼 엘리트, 모리오가이(森鷗外)
일본 메이지 육군 군령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와카미소로쿠(川上操六)는 보불전쟁이후 군제를 프랑스식에서 독일식으로 개편하면서 몰트케의 전략을 연구하다 그 배경이 되는 클라우제비츠(Karl von Clausewitz)의 이론을 집중분석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 원전 전쟁론(Vom Kriege)은 독일인에게도 난해한 책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당시 독일 베를린에는 일본육군의 수재들이 모여 있었는데 독일어에 정통한 인재까지는 없었다. 카와카미소로쿠는 이때 독일에 유학중인 젊은 군의관 모리오가이(森鷗外)가 독일어에 정통하다는 추천을 받고 그를 불러 전쟁론을 번역하고 그 내용을 타무라이요조(田村怡与造)에게 강의하도록 의뢰했다. 모리오가이는 독일에 머물면서 독일일기(独逸ドイツ日記)를 남겼는데 이에 따르면 두 명의 육군소장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와 카와카미소로쿠(川上操六)가 찾아와 2시간동안 클라우제비츠 강의건과 관련해 대화했다.
타무라이요조(田村怡与造たむら いよぞう)는 일로전쟁의 입안자로 전쟁을 앞두고 급사해 타이완총독겸 내무대신이었던 코다마켄타로가 나라를 위해 자기를 필요로 하는 직책을 맡겠다면서 두 계급을 낮춰 참모차장으로 전쟁에 참여한 일화는 유명하다.
모리오가이는 독일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번역하는 동시에 육군엘리트들을 상대로 매주 2회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강의한다. 세계의 군사평론가들은 일본 참모본부가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을 도입하기 위해 젊은 군의관을 스승으로 모신데 대해 무척 높게 평가한다.
모리오가이의 클라우제비츠 전쟁론(戰爭論 Vom Kriege)번역은 독일체류기간에 이어 귀국 후에도 계속된다. 지금은 그 저작물이 전쟁론(戰爭論 Vom Kriege)이지만 모리오가이 번역본의 원제는 대전학리(大戦學理)였다. 1. 2권을 번역한 모리오가이는 1889년 후쿠오카 코쿠라의 제12사단에 배속돼 육사와 공동으로 3권을 번역해 1903년 10월에 전쟁론을 완간한다. 모리오가이가 제12사단에 배치된 인사를 두고 한때 좌천됐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최근의 연구결과는 일로전쟁을 앞둔 참모본부의 포석이라는 것이다.
일본참모본부가 클라우제비츠에 목숨을 걸고 파고든 결과는 일로전쟁의 육전의 승리로 나타나게 된다. 일본입장에서 인명피해가 막대한 신승(辛勝)이긴 했지만, 병력과 보급에서 훨씬 앞섰던 러시아육군을 만주의 회전(會戰)에서 격멸한 것은 클라우제비츠와 몰트케의 전략을 그대로 적용한 덕분이었다.
군사 정보의 ‘정보’(情報:inteligence)라는 단어는 오늘날 상당히 광범위하게 쓰이는 단어인데 이는 모리오가이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번역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 단어를 쓴 배경에는 후쿠자와유키치의 사상에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모리오가이(森鷗外)의 大戦學理/戰爭論 Vom Kriege은 일본번역의 효시로도 평가되는데 그는
소설가로도 명성을 떨쳐 문호의 반열에 올라서기도 했다.
독일 유학시기는 물론 전 생애에 걸쳐 왕성한 글쓰기를 했던 모리오가이는 여러 불후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마이히메(舞姬)다. 유학생활을 하면서 우울증에 걸렸던 나쯔메 소세키와는 달리 모리오가이는 유쾌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유학을 즐긴 것으로 보이는데 마이히메(舞姬)는 독일 유학에서 만난 독일처녀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주인공 이름만 바꿔쓴 일종의 자전소설이다.
모리오가이는 독일 유학중 베를린교회에서 만난 독일 처녀 엘리제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초기에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한 그는 엘리제와 서로 다른 배편으로 귀국한다. 당시에 외국인 여성을 동반해 같이 귀국하는 것은 너무 튀는 행동이기때문이었다. 그러나 귀국해 보니 모친은 국제결혼에 완강히 반대했다. 모리오가이는 할 수 없이 변심을 하게 되고 엘리제는 쓸쓸하게 독일로 돌아가게 된다.
1862년 시마네(島根)에서 태어난 모리오가미는 일본육군의 중장에 해당하는 군의총감(軍医総監)자리까지 올랐는데 군의 뿐 아니라 소설가, 평론가, 번역가로도 일가를 이룬,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하치멘롯피(八面六臂はちめんろっぴ)의 인물이었다.
토쿄의대에 12세에 입학, 19세 나이로 졸업하고 군의관이 된 뒤, 문부성 장학생으로 독일유학을 했던 모리오가이는 시마네가 낳은 메이지 최고의 수퍼 엘리트로 불린다. 어릴 때부터 공자와 맹자, 난학(蘭學)에도 심취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가 7살 때 필사한 도덕 윤리 교과서 도모뉴가쿠몽(童蒙入学門どうもうにゅうがくもん)의 사본을 보면 놀랍기까지 하다. 해서체로 정성스럽게 쓴 이 책은 모리오가이의 자필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힌다.
메이지의 수퍼 엘리트, 모리오가이는 굉장히 폭넓은 분야에서 족적을 남겨 그에 관한 연구서적역시 다방면에 걸쳐 방대하기 이를 데 없다. 일본 메이지시대는 천재성을 가진 인물이 쏟아져 나온 시대였고 그들은 어김없이 국가발전을 위해 천재성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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