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일본의 카레라이스

도보사랑 2018. 12. 25. 18:37

분메이카이카(文明開化ぶんめいかいか)와 해군(海軍)의 상징 일본의 카레라이스

 

인도가 원산인 카레와 관련해 일본에서 가장 화려하게 등장한 장면은 1884년 메이지천황이 당시 황실사무를 총괄하는 궁내경(宮内卿)이었던 이토히로부미와 함께 오리고기카레로 한 점심식사였다. 일본최초의 석조건물인 엔료칸(延遼館えんりょうかん)에서 프랑스식 코스요리에 오리고기가 올라간 백미카레라이스를 먹은 것이다

 

일본에서 카레는 서양문물 도입으로 생활양식이 변하는 이른바 분메이카이카(文明開化ぶんめいかいか)의 상징음식으로 지금은 일본인이 주 1회 정도 먹을 만큼 널리 보급된 국민식이기도 하다. 분메이카이카(文明開化)의 슬로건과 함께 일본에 상륙한 카레의 전파속도는 매우 빨랐다. 페리제독이 우라가(浦賀うらが)에 내항한 이후 일본의 쇄국체제는 붕괴되고 요코하마 주면에는 서구인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양식(洋食)이란 것이 일본인들 사이에 확산됐다. 1872년 카레조리법이 수록된 서양요리책이 나오고 쇠고기 역시 분메이카이카의 상징이 돼 급속히 보급되면서 가벼운 식사방법으로 쇠고기와 카레가 조합된 요리의 인기가 높아졌다.

 

1873년에는 육군사관생도에게 토요일 점심에는 카레라이스가 제공됐고 1876년에는 “Boys, be ambitious!”로 유명한 윌리엄 클라크 박사가 삿포로농학교(현재의홋카이도대학)를 열고 전원 기숙사제를 운영하며 격일로 카레라이스 제공했다. 당시 클라크는 수업시간에 영어만 쓰게 하고 하루 세끼 식사를 양식으로만 하게 했는데 격일 카레라이스 제공은 그의 발상이었다.

 

이후 1903년에는 오사카의 약재상메이커인 今村弥(현재의 ハチ食品)가 “서양풍의 덮밥을 집에서도 만들 수 있다”(洋風どんぶりがうちでも作れまっせ!)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일본산 분말카레를 출시한다. 역시 오사카에서 1908년 카레 南蛮(なんばん)남만이 개발되고 이외에도 즉석 카레, 카레 빵 등 여러 메뉴가 속속 등장한다.

 

그동안 일본에서는 카레분말로 가장 고급이라 인식되던 것은 영국 C&B社의 것이었는데 1931년에는 포대갈이 수법과 같은 짝퉁 C&B 분말카레가 적발된다. 영국제 C&B용기에 일본산 카레분말을 담아 판 것이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맛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이후로 일본산 카레 분말도 품질이 수입산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카레라이스는 일본에서 군용식 으로도 명성이 높다. 메이지초기 일본 해군과 육군 최대의 병사 (病死)원인은 단백질과 비타민 B1부족에서 오는 각기병이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카레를 도입했다. 각기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하자 1884년 해군군의관이었던 타카키카네히로(高木 兼寛たかき かねひろ)가 영국해군메뉴인 카레스튜를 도입해 소맥분과 영양보충용의 여러재료를 넣은 뒤 이를 백미에 얹은 카레라이스메뉴를 개발한 것이다. 1883년 각기병 환자 수 1,632명에 사망자는 49명이던 것이 이듬해부터 병사들에게 카레라이스를 먹이자 환자 41명에 사망자는 전혀 발생하지 않아 극적인 효과를 거뒀다.

 

카레라이스는 이후 해군의 상징으로 굳어진다. 요코스카(横須賀) 해군기지의 조리사가 고기와 야채의 균형을 살린 카레라이스 레시피를 채용한 것이 현재 일본 카레라이스의 원조다. 일본에서는 카레 하면 해군 카레가 아주 유명한데 그 가운데서도 요코스카 해군 카레가 발군이다.

 

요코스카 해군카레는 1908 발행된 “海軍割烹術参考書‘의 레시피를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갓포(割烹かっぽう)라는 단어는 싱싱한 재료를 그 자리에서 썰고 불에 익힌다는 의미로 고급 일식 요리점에서 사용된다. 요코스카에는 원칙적으로 이 레시피를 살리면서 나름대로의 특색을 가미한 해군카레요리점으로 유명하다. 해군카레는 항구에 정박돼 있는 일로전쟁 당시 연합함대의 기함 미카사(三笠)와 함께 요코스카의 최고 관광상품으로 꼽힌다.

 

해상자위대(海上自衛隊)도 구일본해군 카레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해자대에서 매주금요일은 카레라이스를 먹는 날이다. 일본 해군에서 카레를 먹는 전통은 각기병을 예방하기 위한 보건목적과 함께, 해군의 특성상 오랫동안 함상에서 근무하고 먼 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시간과 날짜 감각이 무뎌지기 때문에 일주일에 하루를 정해 고정메뉴로 카레라이스를 제공한 것이다.

 

해상자위대의 카레는 함정, 부대마다 서로 다른 맛을 자랑하며 레시피북도 발행한다고 한다. 카레를 동경해 해상자위대에 입대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자위대 급양부대에서 카레라이스의 원조인 해군카레를 익히고 면허를 따면 셰프의 실무경험으로 계산돼, 제대 후 카레 전문 레스토랑을 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