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거장이자 기인이었던 미술가 카쯔시카호쿠사이

도보사랑 2018. 12. 25. 18:35

거장이자 기인이었던 미술가 카쯔시카호쿠사이(葛飾北斎かつしか ほくさい)

 

카쯔시카호쿠사이(葛飾北斎)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우키요에(うきよえ) 화가다. 北斎ほくさい는 그의 정식 아호인 호쿠사이타쯔마사(北斎辰政ほくさいたつまさ)의 약칭으로 북극성을 신격화한 니찌렌불교(日蓮)의 북진묘견보살(北辰妙見菩薩)에서 따온 것이다. 일본전통미술의 북극성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호쿠사이는 평생동안 아호를 30번이나 바꿨다. 역사적으로 일본인들은 경제적 이유로 다른 집에 입양을 가거나, 훌륭한 스승을 모시거나 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성과 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아주 많다. 문인의 경우 필명에는 사연이 있다.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郎)는 사기를 지은 司馬遷의 재능에 훨씬 못 미친다고 해서 司馬라는 성을 쓰고 이름에 멀다는 遼를 썼다. 메이지시대 뚜르계녜프의 아샤를 첫사랑(初恋)으로 번역소개한 노문학자인 후타바테이시메이(二葉亭四迷)는 문학의 길을 걷고 싶다는 말에 부친이 “쿠타밧데시마에”(くたばってしまえ뒈져버려라)라고 질책했다고 해서 이와 발음이 비슷한 글자들을 조합해 이름으로 삼았다.

 

호쿠사이는 다양한 화풍을 연구하기 위해 문파를 여러번 바꾸는 바람에 스승의 이름인 카치카와(勝川かちがわ)와 타와라야(俵屋たわらや)를 쓰기도 했고 나중에는 제자들에게 사용했던 아호를 물려주고 자신은 다른 아호를 사용한 탓에 평생사용한 아호가 30가지나 됐다. 경제적으로 궁핍해 아호를 제자에게 팔아 돈을 마련했다는 설도 있다.

 

그는 평생 동안 이사를 93번이나 갔다. 그림을 그리면서 식사나 주택청결에 무관심했다. 살다가 지저분해 냄새가 나면 거처를 옮기다 보니 93번 이사를 한 것이다. 호쿠사이는 현재의 일본 토쿄에서 1760년에 태어나 90세가 되던 1849년에 타계했다. 평균수명이 50정도였던 에도시대였으니 엄청나게 장수한 인물이다.

 

호쿠사이는 스스로 70세를 전후해 그림을 제대로 그리기 시작했다고 생전에 자평했다. 인생 100세라는 요즘 음미해볼만 한 대목이다. 고흐와 모네가 경탄하고 이른바 자포니즘붐을 일으킨 그의 대표작 후가쿠산쥬롯케이(富嶽三十六景ふがくさんじゅうろっけい)가 완성된 것은 그가 73세가 되던 1833년이었고 이 작품의 일부인 가이후카이세이(凱風快晴)와 카나가와오키나미우라(神奈川沖浪裏)의 제작은 70세 전후에 시작한 것이다.

 

호쿠사이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73세에 금수충어(禽獣虫魚)의 골격과 초목(草木)의 나고 짐을 알고, 90세에는 그 속뜻의 깨달음이 지극해지며 101세에는 신묘해질 것이다. 110세가 되면 그림을 일점일획 살아있는 듯이 그릴 것이다.“

 

평균수명 50인 시대에 살면서 100세 넘어서까지 자신의 인생행로를 예측하고 선언을 한 것이다. 한마디로 70세까지는 자기 실력이 대수롭지 않지만 이후부터는 능숙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인데 실제로 그가 60세에 그린 鍾馗図(しょうきず중국도교의 신선을 그린 그림)보다는 80대에 그린 鍾馗図가 박력이 있고 디테일과 표정도 살아있다.

 

가장 만년인 89세에 그린 후지고시류우즈(富士越龍図ふじごしりゅうず)는 최고 걸작중 하나로 꼽힌다. 그가 타계하기 4 달전의 작품인데 후지산 뒤로 솟구치는 검은 연기와 함께 승천하는 용을 그린 그림이다. 이 작품에서 호쿠사이는 자신을 후지산이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용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호쿠사이는 우키요에 이외에도 삽화와 만화, 요즘의 산업디자인에 해당하는 각종 스케치, 중국화와 서양화의 수법에 이르기까지 평생 배움을 멈추지 않는 자세를 보였다.

 

그는 살면서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고 늘 현재시점의 주제에 열중했다. 거리를 걸어갈 때는 항상 뭔가 주문을 외듯 혼자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타인이 귀찮게 말을 걸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걸으면서 일종의 참선을 하는 셈이었다.

 

호쿠사이는 만년에 풍요로운 자연환경에서 그림에 몰두했다. 또 때때로 사자의 모습을 묘사한 묵화 ‘日新除魔’ 200매 정도를 남겼다. 일종의 퇴마요법으로 사자를 그리면서 정신을 맑게 하는 훈련을 한 것으로도 추정된다. 호쿠사이의 작품활동에는 이렇듯 100세 인생에 이르는 비결이 담겨 있다.

 

호쿠사이를 필두로 일본의 우키요에는 에도막부가 1858년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등 5개국과 맺은 안세이(安政)조약에 따라 30여만점이 유럽으로 유입됐다. 이 과정에서 호쿠사이의 冨嶽三十六景는 여러경로를 거쳐 요코하마에서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당초 40전이었던 것이 3500배나 가치가 뛰어 1500엔이나 됐다. 우키요에는 이후 유럽의 인상파 미술가들에게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줬다.

 

고흐, 모네, 르느와르, 드가, 세잔 등은 루이 14세 시대부터 계속된 권위주의에 눌려 있었다. 신(神)중심의 종교화와 문학에 주제가 한정되고 기법은 대칭과 원근법을 고집하는 구도에 어두운 색조구사와 무거운 필치 등 고루한 관습에 묶였던 화가들에게 머나먼 아시아의 화가 호쿠사이의 자유롭고 찬란하며 살아있는 인간과 자연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특히 거대한 파도를 그린 호쿠사이의 대표작 카나가와오키나미우라(神奈川沖浪裏かながわおきなみうら)는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마음속 깊이 예술적 쓰나미로 다가갔다.

 

인상파 화가 가운데서도 고흐에 가장 영향을 미친 호쿠사이의 작품들은 미국 보스턴과 유럽의 로마, 밀라노, 베를린, 파리, 런던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일본 우키요에의 미학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