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중국신해혁명의 연출자 우메야쇼키치

도보사랑 2018. 12. 25. 18:39

중국신해혁명의 연출자 우메야쇼키치(梅屋庄吉)

자네가 거병하면 나는 재산으로 지원할 것이네(君は兵を挙げたまえ、我は財を挙げて支援す)

 

일본은 중국혁명의 요람이었다. 중국의 국부 쑨얏센(孫逸仙 逸仙은 쑨원孫文의 자字로 영어권에서는 그의 출신지인 광동성 발음으로 Sun Yat-sen이라 함 중산中山은 호號로 그의 일본식이름 나카야마에서 유래)이 신해혁명에서 주로 한 일은 해외화교자금의 조달이었다.

 

1894년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고 이듬해 광저우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하지만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한다. 쑨얏센은 일본에서 미쟈자키토텐(宮崎滔天)의 소개로 겐요샤(玄洋社)의 토야마미쯔루(頭山満)와 만나고 그들 통해 실업가였던 히라오카고타로(平岡浩太郎)의 경제지원을 받는다. 쑨얏센이 동맹회(同盟會)를 결성해 유학중인 쟝졔스와 만난 것도 토쿄였다. 중국의 국부인 쑨얏센은 여러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는데 이 가운데 그를 믿고 평생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준이는 우메야쇼키치(梅屋庄吉)란 인물이다.

 

우메야쇼키치는 일본에서 시작한 영화사업에서 재산을 이루고 그 재산을 쑨얏센의 혁명사업에 쾌척했다. 중국의 혁명가와 나가사키 출신의 야심만만한 사업가는 그들이 20대였던 1895년에 서로 만났다. 사진기술을 배우던 우메야는 홍콩의 번화가인 센트럴(中环)에서 우메야照相館(사진관)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쑨얏센의 은사였던 의학박사 제임스 컨트리씨가 드나들면서 두 사람을 이어줬던 것이다. 우메야照相館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고 동양의 평화를 주제로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중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혁명을 일으켜 청나라를 쓰러뜨리는 수 밖에 없다”고 쑨원은 말했고 이에 대해 우메야쇼키치는 “자네가 거병하면 나는 재산으로 지원할 것이네”(君は兵を挙げたまえ、我は財を挙げて支援す)라고 맹약했다.

 

메이지원년인 1868년에 태어난 우메야는 나가사키 무역상의 아들로 성장했다. 나가사키는 상하이와의 교역창구였으며 에도시대부터 계속된 해외문물의 출입구였다. 어릴 때부터 외국문화에 친숙했던 우메야는 14살 때 상하이로 건너가 아편전쟁이후 대륙의 모습을 접했다

 

우메야는 사진관 사업을 영화사업으로 발전시켜 대성공을 거둔다. 특히 싱가포르에서 50만엔을 벌어 귀국했다. 당시 영화산업은 최첨단 미디어 사업이었다. 그는 귀국 후 M 파테(프랑스의 파테 필름을 구입한 것이 계기)를 설립한다, 그러다 메이지말기 영화산업에 불황이 닥치자 요시자와(吉澤)상점 요코다(橫田)상회, 후쿠호쿠도(福宝堂)등의 영화사를 인수해 일본활동사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시라세 중위의 남극탐험 기록영화를 만들고 히비야공원에서의 이토히로부미의 장례식을 전하는 등 영화제작자로 여러 실험적인 시도를 한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우메야는 약속대로 쑨얏센에 아낌없이 보냈다. 송금방법은 영화필름깡통에 돈뭉치를 넣어 혁명군에게 보내기도 하는 등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다. 우메야쇼키치는 신해혁명이후 일본에 망명한 쑨얏센을 숨겨주고 쏭칭링을 소개해 결혼에 이르도록 한다. 심지어는 결혼 피로연 장소로 자기의 저택을 제공하기도 한다. 쑨얏센 부부가 중국에 귀국할 때 까지 쏭칭링은 우메다의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고 틈만 나면 피아노를 쳤다는 일화도 있다.

 

쑨얏센은 1925년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동지들이여 혁명을 향해 노력하시요!(革命尚未成功,同志仍须努力)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우메야는 쑨얏센을 기리기 위해 현재가치로 1억5천엔의 돈을 들여 4기의 동상을 제작해 난징과 광저우, 마카오와 황푸에 기증한다. 우메야는 이후 계속 악화된 일중관계의 개선을 위해 힘쓴다. 그러다가 일중전쟁이 시작되기 전인 1934년 쓰러져 65세로 타계한다. 그 때 사업으로 번 돈은 모두 쓴 상태였다. 우메야가 쑨얏센의 혁명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쓴 돈은 현재 가치로 1조엔 정도라고 한다 그가 생애를 관통해 신조로 삼은 것은 貴富在心이었다. 우메야는 명성이나 지위 같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젊은 날의 서약을 중시해 쑨얏센을 물심양면으로 도와 중국혁명의 연출자로 불리고 있다.

 

우메야쇼키치가 개인의 재산으로 만주족의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신해혁명에 성공하도록 지원한 것은 마치 일본군의 탁월한 정보장교였던 아카시모토지로(明石元二郎)가 짜르체제의 러시아를 전복시키기 위해 레닌의 사회주의운동에 자금 원조를 한 것과 유사해 보인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제정 러시아와 만주족의 청조라는 유라시아의 두 구체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일련의 사건 배후에 일본이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