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선 이야기] 세한도와 후지츠카(藤塚鄰)
2019.3.10.
우리나라는 여전히 일본 식민지 시절의 친일과 희생자 프레임이 강하다. 그 말을 뒤집어 보면 극일도 많고 착한 일본인도 많다. 나는 성선설이나 성악설을 믿지 않는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과 인센티브에 따라 전술적, 전략적 행동을 할 뿐이다. 때로는 선하게, 때로는 악하게, 하지만 많은 사람이 선한 영향력을 하면 할수록 더 좋은 결과가 얻도록 하부구조를 갖추는 것이 국가가 할 일이다.
조선 시대 그 집안이 양반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5대조 이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해야 한다. 추사는 고조할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할아버지가 영조 대왕 사위이며, 아버지 김노경은 이조판서를 지낸 명문가다.
그는 24세 때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연경을 가는 부친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석학 옹방강, 완원을 만나 금석학을 배웠고, 그 기개로 조선 최고의 신지식인과 신 예술가로 자부했다. 하지만 55세 때, 10년 전의 과거의 문제를 트집 잡아 안동김씨 세도가들은 추사를 사형시키게 되며 절친인 영의정 조인영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목숨을 살렸으며 제주도로 위리안치(圍籬安置) 귀양을 가게 된다.
추사는 한평생 벼루 열 개를 구멍을 내고 천 자루의 붓이 닳도록 공부하신 분이다. 귀양 9년 동안 쓰고 또 썼으며 그런 노력 끝에 추사체가 완성되었다. 귀양 갈 때 대흥사에 들러 절친인 초의에게 조선의 글을 다 망친 이가 원교 이광사라며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떼어내고 자신이 새로 써 준 “무량수각”을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런 그가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대흥사에 들러서는 자신의 안목이 잘못되었다고 뉘우치면서 자신이 쓴 현판은 떼어내고 원교의 현판을 다시 달라고 한다.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는 해남 신지도의 30년 유배 생활에서 완성한 서체이다.
그렇게 제주도 유배 생활에서 끝까지 제자의 의리를 지킨 중인 이상적(李尙迪)에게 세한도(歲寒圖)를 그려준다. 이상적은 다시 세한도를 들고 청나라 연경으로 가서 당대 대학자 16분에게 세한도의 평을 얻어 두루마리로 만든다. 그것이 바로 청유십육가(淸儒十六家)의 제찬(題讚)이고 길이가 무려 11m나 된다.
그 세한도 두루마리는 이상적 사후 그의 제자 김병선에게 넘어갔고, 그 뒤 휘문고등학교 설립자인 민영휘의 소유가 되었다가, 그의 아들 민규식이 일본인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에게 팔았다. 이 사실을 안 손재형(孫在馨)은 일본으로 건너가 두 달 동안 애걸복걸한 끝에 후지츠카에서 세한도를 되돌려 받는다. 후지츠카는 세한도를 되돌려 주는 조건으로 오로지 잘 보관만 해달라 하고 금전적 보상은 받지 않는다. 후지츠카의 서재는 세한도를 되돌려 준 후 3달 만에 미군의 도쿄 공습으로 불타버린다. 정말 하늘이 세한도를 살렸다.
훗날 손재형은 국회의원 선거자금이 쪼들리게 되자 후지츠카와 약속을 어기고 세한도를 저당 잡히고 돈을 끌어다 썼다. 미술품 수장가 손세기는 저당 잡혔던 세한도를 인수하여, 그 아들 손창근 씨에 넘겼다. 현재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으며, 소유자는 손창근 씨다.
모나리자가 유명하게 된 이유는 한 명의 이탈리아 도둑이 모나리자를 훔쳐 본국으로 달아나자 프랑스 언론이 주목하기 시작했고,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둔 시점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민의 애국심이 모나리자를 명품으로 만들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세한도를 되돌려 준 일본인 후지츠카와 세한도를 한국으로 되 가져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손재형, 둘 중 누가 더 세한도를 사랑한 사람인가?
*참고문헌: 유홍준 지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pp.87-89,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pp.350-354
* 사진은 예산 추사 고택(20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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