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모택동도 읊은 일본 한시

도보사랑 2019. 3. 9. 21:05

모택동도 읊은 일본 한시의 절창 ‘장동유제벽’(将東遊題壁)

 

将東遊題壁     釈月性

 

男児立志出郷関, 学若無成死不還, 埋骨豈惟墳墓地, 人間到処有青山

 

将(まさ)に東遊(とうゆう)せんとして壁(へき)に題(だい)す 釈(しゃく) 月性(げっしょう)男児(だんじ)志(こころざし)を立(た)てて郷関(きょうかん)を出(い)ず

 

学(がく)若(も)し成(な)る無(な)くんば死(し)すとも還(かえ)らず

 

骨(ほね)を埋(うず)むる豈(あに)に惟(た)だ墳墓(ふんぼ)の地(ち)のみならんや

 

人間(じんかん)到(いた)る処(ところ)青山(せいざん)有(あ)り

 

남아가 뜻을 세워 고향을 나서니 학문을 이루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으리.

뼈를 어찌 묘에만 묻어야 하는가, 인간 도처가 청산인 것을.

 

일본 에도 메이지 시대의 한시는 수준이 상당하다. 7언 절구인 이 시는 남아가 뜻을 세워 출가할때의 결심을 유장하게 그리고 있다. 장동유제벽(将東遊題壁)이란 제목의 이 시의 작자는 막말시기 존황양이파의 승려인 겟쇼(月性)다. 나가사키에 유학하면서 네덜란드군함을 보고는 바다 방비(海防)의 필요성을 막부에 호소해 해방승(海防僧)으로도 불린다.

 

겟쇼는 1843년 여름 뜻한바 있어 상경하게 되는데 이 때 지은 시가 장동유제벽이다. 야마구치현 출신인 그는 오사카 에도등지를 17년동안 전전하며 당대의 명사와 사귀었는데 하기의 요시다 쇼인과는 의기투합했으며 사쯔마번의 사이고 타카모리보다는 11세 연상이지만 그와도 교유했다. 그는 에조치(현재의 홋카이도)경영과 관해 강의를 해달라는 막부의 요청을 받고 이동하던중 42세로 병사한다. 겠쇼는 평생 학문을 익히며 국방을 역설해 이를테면 호국승인 셈인데 그가 남긴 저작도 불법호국론(佛法護國論)이었다.

 

겟쇼의 시는 그와 동시대 인물인 메이지 유신 삼걸 중 한명인 사이고 타카모리(1828-1877)가 읊어 더욱 유명해진다. 2, 3, 4번째 구절에 사용된 글자가 약간은 다르지만 사실 의미는 같다.

 

男兒立志出郷關, 学不成名死不還. 埋骨何须桑梓地, 人生無處不青山.

 

세 번째 구절에서 뼈를 묻는데 상재(桑梓:뽕나무와 가래나무)을 땅이 굳이 필요할까라고 했다.상재는 조상을 기억하기 위해 고향에 심는 나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미뤄 사이고 타카모리는 중국의 한학과 경서에도 능통했음을 알 수 있다.

 

겟쇼보다는 사이고 타카모리가 일본 역사에서 지명도가 훨씬 높아 많은 사람들은 사이고 타카모리를 원작자로 착각하기도 한다. 서구열강과 경쟁해 식민지화를 모면하고 부국강병을 이룩한 메이지 유신의 지사들을 존경한 중국의 모택동도 이 시를 몇 글자만 바꿔 읊어 중국에서도

장동유제벽은 유명하다.

 

1910년 17세였던 모택동은 친척의 도움과 부친인 마오순성의 허락을 받아 집을 떠나 상향현동산고등소학으로 가게 된다. 그는 출가한 뒤 부친에게 한편의 시를 쓴다. 시의 제목은(改西郷隆盛詩贈父親)였다. 즉 사이고 타카모리의 원시를 약간 바꿔 부친에게 바친 시다.

 

“孩兒立志出郷關, 学不成名誓不還。埋骨何须桑梓地, 人生无处不青山.”

첫째 구절에서 부친에게 주는 헌정시라 남아(男兒)를 아이(孩兒)로 고치고 둘째 구절의 죽어도 돌아오지 않는다(死不還)를 돌아오지 않는다고 맹세한다(誓不還)로 글자만 바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