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일본군과 공모한 모택동

도보사랑 2019. 3. 28. 11:56

일본군과 공모한 남자 모택동의 번역을 끝내며..

 

엔도 호마레 박사의 역작 <모택동. 일본군과 공모한 남자>의 초벌번역이 완료됐다. 대략 보름에서 20일 정도 걸렸다. 한국어와 어순이 같아 쉬울 것 같지만 사실 읽고 이해하는 것과 번역은 또 다른 차원인 것 같다. 중국사와 관련된 일본학자의 내공은 상당하다. 특히 창춘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엔도 박사의 통찰력은 일본최고의 중국학자라고 불릴 만하다.

 

한국인들은 보통 에드가 스노우나 아그네스 스메들리의 저작을 통해 중국현대사를 이해하고 이를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모택동이나 주덕, 팽덕회같은 인물들과 같이 생활하며 오랫동안 취재한 것이니 사료적 가치는 충분하고 디테일도 높이 살만하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은 이들이 결과적으로는 중국공산당의 선전원 노릇을 했다는 점이다. 특히 일중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당시 미 대통령 루스벨트는 사실 코민테른의 스파이로 밝혀진 각료들에 둘러싸여 공산당에 농락당한 면이 많고 여류 언론인이며 작가인 아그네스 스메들리 같은 경우도 엄밀히 말하면 좌파 페미니스트이다.

 

엔도 박사의 저서는 일중전쟁과 국공내전 기간 동안 상하이를 무대로 벌어진 모택동의 스파이와 일본군 특무기관인물들과의 공모를 파헤치고 있다. 배우 탕웨이 주연의 영화 색계의 시대배경과 스토리가 바로 이 책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일중 첩보전이다. 이와 함께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이뤄진 전후처리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취재해 묘사하고 있는데 당시 국제정세가 어떻게 흐르고 있었는지도 명쾌하게 해설하고 있다.

 

번역을 마치며 느낀 점은 이 책만큼 모택동의 실체와 심리변화를 잘 파헤친 책은 국내에 드물다. 프랑크 디퀘터의 인민 3 부작도 물론 뛰어나지만 엔도 호마레 박사의 저서는 모택동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일중간의 역사전쟁의 근원에 대해 아주 훌륭한 인사이트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모택동이 ‘일본군의 진공進攻에 감사한다‘란 표현에서 보듯 모택동은 침략이나 침공이란 어휘 대신 점령이나 진공이란 단어를 사용했으며 자신이 만난 일본의 좌파정치인들이 사죄란 말을 끝없이 하는 것에 ’진절머리‘를 냈다는 점을 밝혀내고 있다.

 

단어와 어휘 하나만으로 의미는 180도 바뀐다. 어휘는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중국이 쓰고 있는 한어에서 영어의 Revolt나 Uprising은 모두 일률적으로 기의(起義)로 번역하고 있다. 그 예가 우리는 진승오광의 난 황건적의 난으로 알고 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모두 기의(起義)로 교육하기 때문에 무심코 계속 사용하면 세뇌가 된다.

 

모택동은 일본이 중국을 공격해 들어왔기 때문에 국공합작도 가능했고 일본군과 공모해 끊임없이 국민당의 약체화를 시도해 중국전체를 차지했다는 속내를 여러 번 밝혔다고 한다. 또 살아있는 동안 한 번도 일본에 역사문제를 제기한 적도 항일전쟁승리를 경축한 적도 없다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중국이 항일전쟁승리를 기념하기 시작한 것은 쟝저민 정권부터이며 이는 쟝저민의 부친이 친일 왕조명 정권의 선전부 부부장을 지냈고 일본군벌측 관리의 아들로 풍족한 생활을 한 출신을 세탁하기 위해서라고 엔도 박사는 지적한다. 쟝저민은 당시 중국인으로서는 드물게 댄스나 피아노에 능숙한 점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쟝저민은 자신이 얼마나 반일적(反日的)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1994년부터 시작한 ‘애국주의교육’에 반일 프로그램을 포함했고 1991년 옐친의 초청으로 러시아의 군사퍼레이드를 관람했고

이를 벤치마킹해 항일전승절 기념하는 군사퍼레이드를 1995년부터 개최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일본이 패전한 뒤 장개석이 일본의 지나파견군 사령관 오카무라야스지를 패장이지만 극진히 예우하고 그가 전범재판에 회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보호했다는 일화와 나중에 미국몰래 그를 반공대륙(反攻大陸)을 위한 국민당군의 군사고문으로 초빙했다는 스토리, 그리고 일본군에 대한 보복행위를 금지하는 이덕보원(以德報怨)으로 역사적 앙금을 해소한 사례를 기록한다.

 

또 모택동은 베이징 대학 사서시절부터 인텔리계층으로부터 받은 모욕감으로 나중에는 1919년의 5.4운동을 부정했고 사사건건 간섭하고 자신을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려는 모스크바 유학파들도 혐오했다. 그리고 스탈린 사후 1956년 흐루시쵸프에 의해 격하운동이 벌어지는 것을 목도하고 자신도 사후 비판받을 것을 두려워해 백화제방 백가쟁명운동을 일으켰으며 이후 권력을 공고히 하고 개인숭배를 위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고 있다고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이래 전쟁이 아닌 상황에서 1억 가까운 자국민을 살해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 대한 역사관은 쟝저민, 시진핑 정권과 비교하면 차라리 정직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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