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의 역사를 지닌 남한산성은 오랜기간 동안 축조된 성으로 알려져있다.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서, 특히 신라 문무왕이 한수지역에 본격적으로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이 있다. 지난 해 용인 처인성에 갔을때 몽골군이 이 남한산성을 지키던 고려군을 굴복시키지못해 우회하여 남하하다가 처인성에서 김윤후에게 패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곧 입춘을 앞두고 내린 눈이 녹기 전에 성곽에 쌓인 눈을 보고자 남한산성을 찾아 3곳만 보았다.
행궁에서 가장 가까운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으로 조선군이 청군에 기습공격을 하고자 열고 나간 성문이다. 약 300여 명의 병사가 기습 출병했으나 전멸하였다. 성문밖의 계곡은 깊고 험악하다. 적이 얼마든지 매복하여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공간같았다. 기습이라고 하나 의지만 앞세워 적은 병력으로 공격하면 필패다. 이후 정조는 1779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전승문으로 불러라고 교지했다. 그때의 패전을 잊지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7일간 항거하다 1637년 1월 30일 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가 삼전도로 가서 청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서문은 4개 성문 중에서 제일 작은 문으로 이 곳에서 송파까진 가장 빠른길이다. 인조는 추운 겨울 지름길로 그렇게 빨리가서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싶었는지.. 성문밖 가파르고 좁은 산길을 보니 나아간 치욕의 길이 험하지만 가야만하고, 능멸을 당해도 참아야만하는 눈물의 길로 보인다.
수어장대는 이전 서장대를 영조가 개명하였다. 제일 높은 망루로서 군사지휘가 용이한 곳이다. 반드시 보아야할 곳이 수어장대 바로 옆에 있는 무망루(無忘樓) 현판이다. 영조는 수어장대를 2층 높이로 증축했고,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의 뜻을 새기고자 2층 문루에 이 현판을 달았다.(1989년 밖에서 볼 수 있도록 현판을 따로 떼어서 작은 누각안에 걸었다) 봉림대군은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의 볼모로 잡혀가 오랫동안 심양에서 생활했다. 똑똑했던 형 소현세자가 못난 아비의 손에의해 죽자 봉림대군은 왕(효종)으로 즉위하여 송시열을 앞세워 북벌을 계획했다. 효종의 뜻은 이루지 못했다. 여주 영릉(寧陵)에 가면 효종의 혼을 만나볼 수 있다.
아직도 푸른 솔이 무성한 남한산성. 성벽과 성곽위에 쌓인 하얀 눈은 석양빛을 받아 390여 년 전의 이야기를 더욱 선명하게 들려주는 듯하다. 고즈넉한 산길을 걸으면서 상상해보는 이 시간은 나에겐 작은 행복이다.
20240127. Song s 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