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정보

탈북자, 농촌에서 성공적인 인생3막 열다.

도보사랑 2012. 5. 31. 10:41
탈북자 출신 원정근씨, 남쪽 들녘서 꿈같은 ‘인생 3막’ 열다
  • 탈북자 원정근씨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다. 북한에서의 당 간부활동, 탈북과 중국 내 도피생활, 남한에서의 도시생활, 그리고 귀농 정착은 그의 기막힌 인생행로를 보여준다. 탈북자로서 ‘왕따’ 취급을 받던 그는 귀농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는 남쪽 들녘에서 당당한 농사꾼으로 부농의 꿈을 키워 나간다.

    ◆인생 1막―탈북

    원씨는 젊은 시절 북한 신의주 도시건설사업소에서 초급당비서를 지냈다. 건설회사 관리자로 중산층 생활을 누렸다. 하지만 출신성분 때문에 이내 신분 상승의 길이 막혔다.

    “이유를 알아보니 증조할아버지 때에 집안이 머슴을 부리던 부농이었더군요. 진급하려고 발버둥치다 꼬투리라도 잡히면 언제 숙청이 될지 모를 처지였어요.”

    원씨의 선택은 ‘북한에서 더 이상 희망은 없다’는 것이었다. 국경 근처에서 당 간부 노릇을 하면서 확실한 때를 기다렸다. 압록강 주변을 둘러보며 도강 장소를 물색했다. 헤엄을 못치는 아내(52)를 위해 비닐포대로 미리 구명조끼를 만들었다. 2003년 8월 아내와 단 둘이서 압록강을 건넜다. 두 딸은 이웃에 잠시 맡겼다. 부부는 중국에서 숨어지내다 석달 후 다시 압록강을 건너 두 딸을 데리고 중국으로 무사히 월경했다.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불법체류자 신분 탓에 한국으로 갈 길이 막막했다. 겨우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의 도움으로 탈북 2년 만에 한국행 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인생 2막―차별

“우릴 아주 못사는 나라에서 온 노동자 취급을 하는 거예요.”

남한에 도착해 받은 대우를 원씨는 이렇게 표현한다.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기관인 하나원 생활을 마친 원씨 가족은 다른 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한국에 정착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부모라면 당연히 자식 대학 보내고, 유학도 보내고 싶죠. 하지만 아무런 터전이 없는 우리에겐 자식 공부보다 먹고살 일이 더 중요했어요.”

경기 파주에 있는 골프장과 식품회사를 온 가족이 다니며 살림을 꾸려갔다. 쉬는 날도 출근하고, 야근을 도맡아 하면서 네 식구가 정말 부지런히 일했다. 그래도 살림살이는 조금 나아졌지만 희망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주위 동료의 차가운 눈초리도 묵묵히 견뎌내야 했다.

탈북자 귀농인 원정근·김영숙씨 부부가 30일 충북 옥천 자신의 비닐하우스에서 서울 등지로 출하할 깻잎을 따고 있다.

◆인생 3막―귀농

원씨는 5년간의 도시생활을 접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딸이 따낸 제과제빵자격증으로 빵집을 낼까도 생각했지만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고심 끝에 귀농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농촌 프로그램을 보고서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한시바삐 각박한 도시생활과 차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원씨는 최종 정착지로 충북 옥천을 정하고 착실히 귀농 준비를 했다. 품목은 가진 돈 사정을 감안해 자금 순환이 빠른 품종을 골랐다. 한두 달이면 수확이 가능한 깻잎 농사가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옥천 지방의 기후가 깻잎 농사에 적합하다는 점도 염두에 뒀다.

“북한에선 깻잎을 장아찌 등으로만 먹는데, 남한에선 고기와 같이 날로도 먹어 수요가 많더라고요.”

작목 선정을 끝낸 후 지난해 여름 온 가족이 옥천으로 터를 옮겼다. 탈북자 대상 영농지원금을 합쳐 7000만원을 들여 시설하우스 2동을 새로 설치했다. 그러나 초보 농사꾼에겐 모든 것이 만만치 않았다. 주위 농민들의 반응도 여전히 냉랭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히뜩히뜩’했다. 히뜩히뜩은 북한에서 대수롭지 않게 본다는 뜻이다.

원씨는 일단 ‘선물공세’에 들어갔다. 농사를 짓다 모르면 무조건 음료수를 사들고 이웃주민에게 물어보기를 반복했다. 자기 집을 찾아온 농민에겐 커피를 대령하며 깍듯이 대접했다. 밤늦게까지 불이 켜진 그의 비닐하우스를 보며 주위 사람들도 원씨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원씨 가족을 이웃으로, 농민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열정으로 농사를 짓다 보니 원씨는 요즘 일 잘하는 농사꾼으로 평판이 났다. 옥천군의 도움으로 최근 하우스시설도 2동을 더 늘렸다. 원씨가 재배한 깻잎은 서울 가락농수산물시장과 대전 등지에 팔려 식탁에 오른다. 수입은 매월 700만원 정도. 한 달에 400만원을 떼어 적금까지 붓는다.

하지만 원씨는 귀농을 꿈꾸는 다른 탈북자들에게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라고 말한다. 그는 “탈북자들이 낮은 이율로 지원해 주는 귀농자금만 믿고 귀농을 서두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면서 “막연한 기대만 갖고 오는 사람들에겐 희망이 절망으로 바뀔 수 있다”고 뼈아픈 충고를 했다. 준비 안 된 상태에서 귀농하면 실패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원씨는 “북한이란 지옥에서 탈출해 천당에 왔지만 여기서도 노력을 하지 않으면 지옥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을 다른 탈북자들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