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퇴계와 율곡의 선택을 반추하며

도보사랑 2017. 3. 31. 10:52
퇴계와 율곡의 선택을 반추하며
박 원 재(강원대 삼척캠퍼스 강사)

   개인적으로 15년을 다닌 직장을 지난해 연말 그만두었다. 정년이 몇 년 더 남았지만 새로운 자극이나 동기 부여가 필요한 나이라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다. 다행히 아내가 뜻을 같이해서 부담감은 덜했지만 잘한 결정인가 하는 생각은 지금도 명확하게 판단이 안 선다. 그러나 결과야 어떻든 인생의 후반부를 ‘전통’의 색채가 가장 짙다고 평가받는 두 도시에서 차례로 영위해나간다는 것도 남다른 인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니던 직장은 안동에 있었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 거처를 잡은 곳은 고향인 강릉이기 때문이다.

조선유학 두 봉우리의 만남

   안동과 강릉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분위기가 비슷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예전에는 경남 진주와 함께 유교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또 그런 면에서 보수적 기풍이 강한 대표적인 3대 도시로 일컬어진 것이 좋은 예이다. 이들 도시가 조선 유학을 대표하는 세 명의 거장, 퇴계 이황(안동)과 남명 조식(진주) 그리고 율곡 이이(강릉)와 각각 연고가 있음을 감안하면 수긍이 가는 일이다.

   안동에서 강릉을 오가는 주 교통로는 두 갈래이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원주까지 가서 영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강릉으로 가는 경로와 부산과 강릉을 내륙으로 연결하는 35번 국도를 타는 코스가 그것이다.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긴 하지만 우회하는 경로라 시간이 딱히 절약되는 것도 아니어서 퇴사 전 가끔 고향에 들를 때도 그랬고 퇴사 후 몇 가지 잔무로 안동을 오갈 때도 35번 국도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35번 국도 가운데 풍광이 수려한 안동-봉화 구간의 낙동강 변을 타고 안동과 강릉을 오가다보면 종종 조선유학사의 한 장면이 오버랩되곤 한다. 조선유학의 양대 봉우리인 퇴계와 율곡의 만남이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이들의 고향을 연결하는 지금 국도의 번호처럼 나이가 35살 차이인데, 둘의 역사적인 만남은 퇴계와 율곡이 각각 58세와 23세가 되던 1558년 봄에 이루어졌다. 장소는 퇴계가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던 안동 도산 골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짐작한다면, 그 해가 도산서당이 지어지기 2년 전이었으니까 현재의 퇴계종택 앞을 흐르는 시내 좌측 건너편에 복원되어 있는 계상서당(溪上書堂) 어림이었을 것이다. 바로 지금의 천 원짜리 지폐 뒷면에 나오는 그림 속 장소이다.

퇴계의 당부와 율곡의 선택

   그해 봄 율곡은 경북 성주에 있는 장인을 찾아뵙고 외할머니가 계시는 강릉 외가(오죽헌)로 가는 길이었다. 아마 성주에서 출발하여 안동으로 들어서면서 대략 지금의 35번 국도 언저리를 따라 강릉으로 가는 여정을 잡았을 터인데, 퇴계가 있던 도산은 그 길에서 안동에서 봉화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다. 거기다가 당시 퇴계는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사림의 존숭을 한 몸에 받는 원로였으므로 그때의 여정에서 율곡의 도산 방문은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일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전 얼마 동안 율곡의 인생사는 풍파가 있었다. 16살에 어머니 사임당 신씨가 돌아가시자 삼년 동안 시묘(侍墓)를 하고 그 충격으로 19살에 금강산으로 출가를 하였다. 그러다 1년 뒤 환속하면서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이제부터는 성인을 본받는 삶 즉 유자(儒者)로서의 삶을 추구하겠다고 다짐하고 과거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2년 후인 22살 되던 해 가을에는 결혼도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두 사람의 만남은 율곡이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방황을 끝내고 자기 삶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고 매진하던 시기에 이루어진 사건인 셈이다.

   자고로 방황을 끝낸 뒤의 삶은 확신에 차 있기 십상이다. 당시의 율곡 역시 유자로서 내공을 쌓아 세상을 한 번 제대로 경영해보겠다는 포부와 자신감에 차 있었던 듯하다. 이는 그가 퇴계와 첫 대면에서 만남의 감흥을 한시로 의례적으로 주고받은 뒤 오늘 방문 목적은 ‘도(道)를 듣기 위함’이라고 단도직입으로 말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아홉 단계의 과거시험을 모두 1등으로 합격한 이른바 구도장원(九度壯元)의 젊은 천재의 기개가 묻어나는 장면이다.

   그러자 자기 앞에 서 있는 젊은이의 가능성을 간파한 퇴계는 기대를 품으면서도 한편으로 혹 지나침이 있을까 염려하여, 재주가 뛰어나고 나이도 아직 어리니 바른길을 밟아 나아간다면 나중에 많은 성취를 이룰 것이라면서 부디 작은 공에 자족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철 늦은 봄눈으로 이틀을 더 묵은 율곡이 강릉으로 떠나며 청한 가르침에 ‘마음가짐에서 중하게 여길 것은 속이지 않는 것이요[持心貴在不欺], 벼슬에 나가서는 마땅히 일 만들기를 좋아하지 말라[立朝當戒喜事]’고 당부하였다고도 전한다. 그러나 율곡은 훗날 퇴계의 이 당부를 반밖에 지키지 못했다. 조정에 나간 뒤 성리학적 이상이 담긴 도학(道學) 정치의 실현을 위해 여러 가지 제도적 변혁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누구보다 일을 만드는 데 열심이었고 또 그것의 실현을 위해 각고면려한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나가는 데 필요한 것은

   율곡이 그렇게 한 데에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그의 시대는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한 사림이 도학 정치의 당위성만을 강조하던 재야(在野)에서 그것의 구체적인 실현을 책임져야 하는 재조(在朝)로 자리를 옮긴 시대였다. 정권의 실제적인 담당자로 새로 부상한 사림이 자신들의 구호가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이상임을, 그것도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했던 시대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퇴계의 시대는 달랐다. 퇴계는 50대 후반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잦은 사화(士禍)를 거치며 사림의 꿈이 가혹할 정도로 좌절되는 것을 경험한 세대였다. 그는 19세 때 기묘사화로 조광조로 상징되는 사림의 꿈이 채 피지도 못하고 꺾이는 것을 보았고, 45세에는 을사사화로 그 꿈이 재차 잘려나가는 것을 목도하였으며, 다시 2년 후인 47세에는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남은 그루터기마저 뿌리째 뽑히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도산에 은거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반동에 대항하여 ‘길고 멀리 보는’ 방책을 선택하기 위함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당장의 정치권력이 아니라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을 깊고 넓은 저변의 확대가 더 중요함을 절감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퇴계의 서원 건립 운동과 후진 양성, 향약의 시행 등은 그런 고민의 산물이다. 결과적으로 퇴계의 이러한 선택은 성공하였고, 그는 사림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한 세대 뒤, 바로 그렇게 하여 도래한 사림의 시대를 살았던 율곡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도학이 한갓 이념이 아니라 ‘실학(實學)’임을 보여주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가 부여안은 자기 시대의 과제였다. 요컨대, 퇴계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는 무엇보다 그것을 감당할 의식있는 ‘사람들’이 준비되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였고, 율곡은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새로운 시대도 관념의 유희에 머물 뿐이라고 본 것이다.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 언론들이 명명한 ‘장미 대선’이 끝나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아니 마땅히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국민은 기대한다. 하지만 예로부터 새로운 시대란 이렇듯 원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대선 이후의 계절은 퇴계의 원려(遠慮)를 필요로 하는 시간일까, 율곡의 결단을 필요로 하는 시간일까? 500여년 전 퇴계를 만나고 걸었을 율곡의 여정을 따라 35번 국도를 오르내리며 드는 상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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