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비스마르크와 메이지유신

도보사랑 2018. 12. 25. 16:03

‘만국공법보다 군사력’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와 메이지 일본

 

1870년 프러시아는 보불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하고 대승을 거둔다. 이듬해인 1871년에는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가 황제로 즉위하는 대관식이 열리고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독일제국 재상에 취임한다.

 

이에 앞서 1862년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통일은 연설이나 다수파의 결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대포 즉 철(鐵)과 병사 즉 혈(血)의 힘에 이뤄지는 것이라고 설파했고 실제로 독일의 통일은 비스마르크의 외교력과 군비증강에 따른 것이었다.

 

독일제국이 수립된 1871년말 동양의 소국 일본에서는 서구국가와 맺은 불평등조약의 개정여지를 모색하고 미국과 유럽의 선진문물을 시찰하기 위한 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団)이 구성돼 장도(長途)를 내딛는다.

 

이와쿠라토모미(岩倉具視)를 단장으로 한 사절단에는 키도타카요시(木戸孝允), 오쿠보도시미치(大久保利通)、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등 메이지 유신의 인걸들을 비롯해 장 자크 루소를 일본에 소개해 자유민권운동의 이론적 지도자가 된 나카에쬬민(中江兆民)、세이난전쟁(西南戰爭)에서 사이고타카모리군에 참전해 목숨을 잃은 무라타신파치(村田新八)도 있었다.

 

이외에도 즈다쥬쿠대학(津田塾大学)의 창설자인 즈다우메코(津田梅子), 나중에 오야마이와오 대장의 부인이 된 야마카와스테마츠(山川捨松)등 여성 5명을 포함한 유학생 59명등 이와쿠라사절단은 107명으로 구성된 대규모였다.

 

이들은 미국에서 6개월을 체류한 뒤 대서양을 건너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을 둘러보는데 유럽제국 가운데 가장 메이지 일본에 영향을 미친 것은 독일 방문이었다.

 

기존에 일본은 유럽의 패권국가인 영국과 프랑스를 동경했었는데 유럽의 소국이었던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제국으로 우뚝 서자 새롭게 주목한다. 메이지의 지사들은 일본이 토쿠가와막부체제에서 막 근대국가의 첫걸음을 뗀 터여서 프랑스와 영국, 미국의 체제는 다소 생경했고 산업혁명과 근대통일국가의 후발주자인 독일이 이상적인 모델로 다가온 것이다.

 

통일 전 300개의 소국이 군웅할거 했던 프로이센과 역시 300개의 소번(小藩)이 존재했었던 토쿠가와 막부체제,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후 천황제와 독일제국의 카이저등 정치체제가 다른 구미국가와는 달리 일본과 유사했다.

 

이와쿠라사절단은 독일에 도착해 1873년 3월 11일 빌헬름 황제를 알현하고 12일에는 비스마르크 수상과 프로이센 육군을 유럽최강으로 키워 보불전쟁을 승리로 이끈 몰트케 참모총장과 회견한다. 몰트케는 메이지 육군의 스승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정보전의 개념과 참모본부제도를 도입한 카와카미소로쿠(川上操六), 카츠라타로(桂太郎), 일로전쟁 작전계획을 모두 마련해 놓고 전쟁직전 과로사해 일본의 제갈공명이란 별명이 붙은 타무라이요조(田村怡与造)등이 그의 신봉자였다. 일본메이지 육군이 프랑스식에서 독일식 군제로 전환한 것은 전적으로 몰트케의 영향이다.

 

비스마르크는 1873년 3월 15일 이와쿠라사절단을 자신의 관저로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 연회가 끝나자 비스마르크는 사절단의 주요인사만을 별실로 불러 의례적인 이야기가 아닌 속마음으로 일본의 네이션빌딩(Nation building)을 위한 조언을 한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지도자들에게 행한 비스마르크의 조언은 미구회람실기(米欧回覧実記)에 세밀하게 기록돼 있다. 요점은 국제질서에서 중요한 것은 법이 아닌 군사력이란 것이었다.

 

“세계 각국은 모두 친목, 예의로 서로 사귄다고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표면상의 것으로 내면은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고 큰나라가 작은나라를 깔보는 것이 실정인 것이다. 내가 어릴 때 우리 프로이센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제공(諸公)들도 알 것이다. 그 때 소국(小国)의 형편을 직접 보고 경험한 나는 항상 울분을 품고 있었던 것은 지금도 결코 잊을 수 없다.

 

이른바 공법(公法 : 国際公法、万国公法)이란 것은 열강의 권리를 보전하는 불변의 도라고는 하지만, 대국이 이익을 다툴 경우 자국에 이익이 되면 공법을 고집하지만, 일단 불리해지면 그 태도를 바꿔 군사력을 동원한다. 따라서 공법(公法)은 항상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일본이 구미열강 틈바구니에서 생존하는 길은 국제법인 만국공법을 준수하는 것이라고만 믿었던 이와쿠니 사절단은 국제관계의 본질은 더블스탠다드(double standard)이며, 만국공법보다는 힘이라는 비스마르크의 솔직한 가르침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메이지의 지도자들은 서구열강이 아시아의 청조(淸朝)를 분할 점거하는 약육강식의 현실에서 보듯 만국공법이 약소국의 독립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비스마르크의 조언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게 됐다.

 

오쿠보도시미치는 비스마르크의 진심어린 충고에 감명 받아 사이고타카모리와 러시아에 유학중이던 훗날의 외무대신 니시토쿠지로(西徳二郎)에 편지를 써서 독일체류기간을 짧았지만 비스마르크, 몰트케 같은 큰 스승을 만나 유익했다고 적었다. 이후 오쿠보도시미치는 비스마르크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그를 선생(先生)이라고 호칭한다.

 

독일을 모델로 삼은 메이지 일본은 군제(軍制)뿐만 아니라 헌법도 독일의 것을 참고해 제정한다. 이토히로부미가 메이지헌법제정을 위한 연구를 하기 위해 1882년에 법학자들을 이끌고 독일을 방문하는데 이 때 비스마르크는 독일제일의 법학자인 루돌프 폰 그나이스트(Rudolf von Gneist)를 소개해 주는 등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는다.

 

이와쿠라사절단에 동행한 메이지 지도자들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인상은 매우 깊었다. 비스마르크의 시원시원한 성품과 속내를 털어놓은 가르침에 이토히로부미는 귀국직후 사이고쓰구미치를 찾아가 비스마르크에 대한 칭찬을 입이 마르도록 했다고 한다. 이토의 말을 듣던 쓰구미치는 “비스마르크가 당신의 판박이로구만”이라고 화답했고 이후 이토에게는 동양의 비스마르크란 별명이 붙었다. 이토는 이 별명을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전회의에 이토가 지각하자 메이지천황이 “동양의 비스마르크가 아직 안보이네”라는 우스개소리를 했다는 일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