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로쿠메이칸의 꽃 오야마스테마츠

도보사랑 2018. 12. 25. 16:52

로쿠메이칸의 꽃(鹿鳴館の花) 오야마스테마츠(大山捨松)

 

1871년 12월 23일 이와쿠라토모미(岩倉具視)가 인솔하는 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団)이 요코하마를 출발했다. 50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에는 5명의 여자유학생도 끼어있었다.

 

이 5명의 여자 유학생 가운데 일본메이지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가 나중에 오야마이와오 육군대장의 아내가 된 11세의 오야마스테마츠(大山捨松), 그리고 쯔다쥬쿠대학(津田塾大学)의 설립자가 된 6세의 쯔다우메코(津田梅子)였다.

 

홋카이도 개척에 몰두하던 메이지 정부는 프런티어 정신과 인재육성이 필요하다는 것에 착안해 서부개척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룬 미국에 배워야 한다는 의식이 높아지고 있었다. 사절단은 외국의 선진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의욕으로 충만했다.

 

메이지정부가 나이어린 소녀들을 외국에 보낸 데는 10년 정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 결혼 적령기가 돼 외국에서 체득한 개척정신을 홋카이도 개척과정에서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이 시대에 소녀들을 유학보내는 안을 추진한 이는 홋카이도 사할린의 개척과 경영을 담당했던 개척사(開拓使) 쿠로다기요타카(黒田清隆)였다. 이들은 모두 관비유학생이었는데 모집이 쉽지는 않았다. 어린 딸들을 외국에 떠나보내는 것은 부모로서도 대단한 결단이었기 때문이다. 오야마스테마쯔(大山捨松) 의 스테마쯔란 이름은 버리듯‘捨’ 떠나보낸 자식을 기다린다 ‘待(松는 待와 발음이 같음)’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나중에 육군대장 오야마이와오의 성을 따르게 되지만 그녀가 유학을 떠날 당시 이름은 야마카와 사키코(山川咲子)다. 그녀는 아이즈번 번사의 딸로 보신전쟁 막바지에 신정부군이 아이즈와카마쯔의 쯔루가성을 포위 공격할 때 처절한 역사를 목격했다. 에도 막부말기 잔다르크라 불리는 니이지마야에(新島八重)가 스펜서 총으로 신정부군과 싸울 때, 8살이었던 사키코(咲子)는 성안에서 납으로 된 총탄을 운반했다. 아이즈번에 속하는 그녀의 가문도 아이즈와카마쯔성 함락후 쇠락할 수 밖에 없었다. 사키코가 삿포로 개척에 필요한 미래의 여성인재를 모집한다는 유학생에 응모한 것도 이런 배경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미국으로 건너간 오야마스테마츠는 코네티컷 주 뉴 헤이븐의 레오나르드 베이컨 목사의 집에 머무르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4년을 머무른다. 그리고 19세가 되자 7개 미 명문 여자대학 세븐 시스터즈의 하나인 뉴욕주 바사 칼리지(Vassar College)에 입학한다.

 

오야마스테마쯔는 인문대학인 이곳에서 라틴어와 수학, 물리학, 역사학 등을 공부했다. 재학중에는 뛰어난 학생만 받는다는 셰익스피어 연구회에서 활동했고 성적도 우수해 졸업 할때‘magna cum laude’칭호를 받았다.

 

이때 일본정부가 그녀를 유학 보냈을 때 명분인 ‘홋카이도 개척’은 이미 백지화된 상태였다. 귀국명령이 떨어졌지만 그녀는 체류연장을 신청해 코네티컷 간호사양성학교에서 간호사 자격증을 취득한다. 이는 나중에 적십자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스테마쯔가 귀국했을 때 귀국한 여성유학생이 마땅히 활약할 무대는 없었다. 이때 그녀는 운명적으로 육군경이었던 오야마이와오(大山巌)를 만나 구애를 받게 된다. 사쯔마 출신인 오야마이와오는 사투리가 심해 데이트를 할 때 스테마쯔가 간혹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영어로 대화를 하게 되면 곧바로 의기투합했다는 일화도 있다. 실제로 사쯔마사투리(薩摩弁)는 세이난 전쟁에서 군사암호로 사용됐다고 할 만큼 다른 지역의 일본인들은 알아듣기가 힘들다고 하니 차라리 외국어가 편했다는 이야기도 그리 과장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야마이와오는 당시 상처(喪妻)한 상태였으며 메이지 육군은 프랑스 체제에서 독일체제로 군제를 개편중이어서 군사외교업무상 불어나 독어를 쓸 일이 많았었다. 그래서 오야마이와오는 영, 불 독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면서 아름답기까지 한 스테마쯔에 한눈에 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테마쯔에게 오야마이와오는 가문의 숙적이었다. 그는 보신 전쟁때 포병대장으로 아이즈와카마쯔의 쯔루가성에 포격을 가한 인물로 스테마쯔의 오빠 히로시도 당시 포탄에 아내를 잃었다. 스테마쯔의 부모들은 결혼에 반대했지만, 사이고타카모리의 동생으로 메이지 정부 편에 선 사이고 쯔구미치 등이 설득한다.

 

오야마부부는 1883년 결혼식을 가지고 한 달 뒤 서양식 사교장 로쿠메이칸(鹿鳴館)에서 피로연을 따로 연다. 당시 로쿠메이칸에서는 연일 무도회가 열려 각국의 외교사절과 메이지 정부 관료들이 참석했는데 여기서 스테마쯔는 두각을 나타낸다.

 

당시 일본여성으로는 드물게 장신인 그녀는 화려하고 세련된 드레스를 입고 능통한 외국어로 각국외교관과 담소를 나누는 실력을 발휘해 ‘로쿠메이칸의 꽃’(鹿鳴館の花)이란 명성을 얻는다. 그녀는 1884년 간호사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로쿠메이칸 바자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는데 이것이 일본최초의 바자회였다. 남편인 오야마이와오가 일청, 일로전쟁에서 각각 참모총장과 만주군총사령관으로 국운을 건 전쟁을 지휘할 때 스테마쯔는 후방에서 기부금을 모으고 일본적십자사에서 전상자 간호를 한다, 또 유학경험을 살려 미국의 신문에 투고를 하며 일본의 처지를 적극 홍보한다.

스테마쯔는 75세로 사망한 남편 이와오의 국장이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다가 1919년 여자영어학교(女子英學塾 : 쯔다쥬쿠대학의 전신)을 운영하던 미국 유학시절 동료 쯔다우메코(津田梅子)가 병으로 쓰러지자 이를 수습하려 새로 숙장(塾長)직을 맡게 되는데 바로 그 다음날 스페인독감으로 자신도 쓰러져 결국 5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오야마스테마쯔(大山捨松)는 니이지마야에(新島八重)와 더불어 보신(戊申)전쟁과 메이지 유신 150주년을 맞아 아이즈번 즉 지금의 후쿠시마를 대표하는 여성인물이다. 니이지마야에가 스펜서총을 든 강인함과 특유의 당찬 성격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면 오야마스테마쯔는 국제감각과 적과 결혼할 만큼 유연함으로 운명을 개척했다. 토호쿠(東北)지역의 스테마쯔가 숙적인 남쪽 사쯔마(薩摩)의 이와오(巖)와 결혼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오야마이와오가 스테마쯔(大山捨松)를 먼발치서 처음 보고 반한 자리는 스테마쯔가 출연한 미국 유학 동기생들의 세익스피어 연극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