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타이완의 비극

도보사랑 2018. 12. 25. 17:00

타이완의 비극 2.28과 정의, 용기의 변호사 탕더장(湯徳章/坂井德章さかいとくしょう)

 

타이완 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은 1947년에 발생한 2.28사태다. 1992년 타이완행정원은 희생자 수가 18,000에서 2만8000 정도라고 공표했지만, 최다 10만명까지 사망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낸 백색테러다.

 

사태의 발단은 타이베이에서 무허가 담배를 팔던 린쟝마이(林江邁)라는 여성을 관리가 단속하는 것에서 비롯됐다. 단속관리는 그녀를 총검으로 구타하고 가지고 있던 돈까지 빼앗았다. 이 여성에 동정하는 군중이 몰려들자 관리는 위협사격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 한명이 숨졌다.

 

타이베이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군중들은 당시 국민당출신의 타이완 행정장관 천이(陳儀)의 청사로 몰려갔는데 헌병대는 기관총을 난사해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국민당지배에 대항하는 폭동은 타이베이에서 시작돼, 타이쫑, 쟈이, 타이난, 까오슝 등 타이완 전역으로 확산됐다. 국민당정부의 천이는 쟝카이셱(蒋介石)에게 대륙에서 군대를 빼내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른다.

 

타이난의 변호사 탕더장(湯徳章 / 坂井德章さかいとくしょう)은 천이의 강경진압 가능성을 우려하고 타이난시의 폭동이 확대되지 않도록 분주하게 노력한다. 타이난시의 임시치안협조위원회의 치안조장을 맡아 타이난공학원(현재의 청꽁대학成功大学)학생들이 봉기를 계획하자 그들을 설득한다. 학생들까지 무기를 들고 저항하면 쟝카이셱의 국민당군이 피의 보복을 가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타이난시 전역에서 미증유의 유혈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탕더장은 변호사답게 학생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무기를 회수해 당국에 반납한다.

 

탕더장의 예상대로 3월 9일 국민당의 정예 제21사단이 지롱(基隆)과 까오슝(高雄)에 상륙한다.

국민당군은 지롱(基隆)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베이징어에 서투른 타이완인들을 체포해 바다로 던져버렸다고도 한다. 무자비한 백색테러가 시작된 것이다. 천이(陳儀)도 무기를 반납하고 소요사태가 진정되면 민주화를 추진하겠다는 종전의 약속을 뒤집는다. 그리고 타이완에 잠입한 공산주의자와 잔류 일본인들(留用日本人)이 폭동의 배후라면서 대대적인 체포에 나선다.

 

당시 타이완인들은 반국민당 시위를 벌이며 ‘허르쥔자이라이’(何日君再来)라는 곡을 불렀다. 何日君再来(언제님은 다시오시려나)는 나중에 덩리쥔이 불러 더욱 유명해진 곡인데 이는 ‘賀日軍再来’(일본군이 다시 오기를 기원한다)와 발음이 같아, 부패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국민당정부보다는 차라리 일본이 좋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또 ‘거우취쭈라이’(狗去豬來 개가 가니 돼지가 왔다)라면서 국민당정부를 야유했다.

 

국민당경찰은 일본계 타이완인인 탕더장을 체포하기 위해 30명을 투입한다. 유도 5단인 탕더장은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면서 국민당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려 했던 타이난공학원 학생들의 명단을 불태워 버린다. 국민당특무경찰에 체포된 탕더장은 모진 고문을 받는다. 타이난공학원에서 무기를 들고 봉기하려 한 학생운동 지도부의 명단을 대라는 것이었다. 탕더장이 입을 열지 않자 국민당경찰은 그를 혹독하게 구타하고 고문했다. 늑골이 부러지고 젓가락을 집을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상했지만 그는 끝내 발설하지 않았다.

 

탕더장은 트럭에 실려 형장인 민생록원(民生緑園)으로 끌려간다. 그는 눈가리개와 죄명을 써붙인 나무막대를 등 뒤에 붙이는 것을 거부하면서 “죄인이 필요하다면 나 한사람으로 충분하다(若一定要有罪人,那就我一人已足夠)”고 부르짖었다. 그가 형장에서 무릎을 꿇지 않자 사형집행인들은 발로 걷어찬 뒤 세발의 총격을 가했고 두 눈을 부릅뜬 상태에서 절명했다. 형장에서 그가 남긴 마지막 외침은 “타이완인 만세!”였다.

 

이튿날 국민당의 통제를 받던 타이완의 신문은 ‘타이난의 폭도 사카이토큐쇼(坂井德章)에게 어제 총살 집행’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국민당 정권은 그가 폭동을 배후조종한 일본인이라는 누명을 씌운 것이다.

 

이렇게 숨져간 탕더장은 쿠마모토현 출신의 부친과 타이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일본계 타이완인이다. 부친성에 따른 일본이름은 사카이토쿠쇼(坂井德章さかいとくしょう)인데 8살 때 부친은 타이완인의 경찰습격사건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친을 여의고 고학을 했던 그는 어렵게 타이난사범학교(台南師範学校)에 들어가지만 경제사정으로 중퇴하고 순사(巡査)로 경찰에 입문한다.

 

그러나 강직한 성품을 가졌던 그는 어느 날 카누마마사오(鹿沼正雄)라는 일본인 의사가 차를 몰다 타이완인을 치어 사망하게 한 뒤 도주한 사건이 발생하자 원리 원칙대로 처리한다. 카누마는 타이난의 일본인 지사와 동문인 유력인사라 경찰상층부는 적당히 처리하려했지만 끝까지 조사해 20엔의 벌금형에 처한다. 이 일로 조직에서는 윗사람의 말을 안 듣는 고집통으로 낙인찍히게 돼 사표를 쓰게 된다.

 

타이완에서 경찰조직을 박차고 나온 탕더장은 일본 토쿄로 처와 자식을 데리고 건너간다. 일본인 삼촌의 양자로 입적한 그는 쮸오대학(中央大学)법학부의 청강생 신분으로 주경야독 한 결과 고등문관사법과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된다.

 

변호사가 된 그는 타이완인들이 차별 없이 법률의 보호를 받도록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고 자란 타이난으로 돌아간다. 이 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패전으로 물러간 일본대신 타이완에 진주해 폭정을 일삼는 국민당정권이었다.

 

대륙에서는 아직 전쟁 중이었고 국민당 정권은 전쟁물자 보급명목으로 타이완인들을 수탈해 인플레이션이 1,000%에 달했고 설상가상으로 국민당 관료들의 부정부패도 극에 달했다.

 

국민당의 행정장관 천이(陳儀)는 갑작스럽게 접수한 타이완의 통치를 위해 엘리트가 필요했다. 그는 일본계이긴 하지만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된 탕더장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타이완성공무원훈련소(臺灣省公務員訓練所)소장직을 제의한다. 그러나 국민당 관료들의 가렴주구를 목격한 그는 “중국의 관리가 되려면 탐욕스럽고 부패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한다, 나는 양심을 속이고 싶지 않다”(當中國官,在心理上要做貪污的準備,我不願埋沒自己的良心)면서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이 같은 일화는 천이의 국민당정부가 나중에 그를 체포해 극심한 고문을 가하고 처형한 또 다른 이유가 됐을 수도 있다.

 

이 같은 탕더장 변호사의 비장한 스토리는 38년에 걸친 타이완 계엄통치하에서도 묻히지 않고 타이완인들의 마음속에 각인돼 있었다. 탕더장이 고문에 못 이겨 학생 시위지도부의 이름을 발설했더라면 수 천명이 희생됐을 것으로 타이난 시민들은 생각한다. 1998년 타이난시의 라이칭더(頼清徳)입법위원은 그가 처형된 현장인 민생녹원을 탕더장기념공원(湯徳章紀念公園)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의 흉상을 세웠다. 그리고 2014년에는 그가 숨진 3월 13일을 타이난시 정의와 용기 기념일(臺南市正義與勇氣紀念日)로 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