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철포를 주조하고 빵을 구웠던 에가와히데타츠

도보사랑 2018. 12. 25. 18:18


철포(鐵砲)를 주조하고 빵을 구웠던 에가와히데타츠(江川英龍)

 

에도막부시절 지금의 시즈오카현에 있는 이즈(伊豆)의 니라야마쬬(韮山町にらやまちょう)의 당주는 에가와(江川)씨다. 에가와씨가 대대로 세습하는 당주를 보통 에가와타로자에몬(江川太郎左衛門江川)이란 관직명으로 부르는데, 여려 명의 에가와(江川)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가 36대 당주인 에가와히데타츠(江川英龍)다.

 

에가와히데타츠는 쉽게 말하면 지역의 원님 정도에 해당하는 인물이었지만 일찍부터 양학을 도입하고 바다를 건너오는 서양인의 침공을 막는 ‘해방’(海防)에 진력했다. 시나가와 다이바(品川台場 : 다이바는 포대)를 짓고 여기에 배치할 철포를 만들기 위해 당시로서는 신식기술인 반사로(反射炉はんしゃろ)를 만들었다. 현재 시즈오카현 이즈노쿠니시 니라야마(韮山)에 남아있는 반사로는 2015년 7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반사로는 철포를 만들기 위한 쇠를 녹이는 용해로로 1853년 페리함대가 내항하자 일본도 근대적인 기술을 도입하자면서 에도막부가 명령해 무사들이 네덜란드 기술로 완성한 시설이다. 용해로의 열을 내부에서 반사시켜 쇠를 녹일수 있는 1300도의 고열을 얻도록 고안된 반사로는 높이가 15m나 되는 시설로 여기에서 주조된 철포가 토쿄 오다이바에 설치됐다고 한다. 내화성이 뛰어난 돌로 만든 반사로는 히데타츠가 병으로 죽는 바람에 아들인 에가와히데토시(江川英敏えがわ ひでとし)때 완공된다.

 

“꽤나 인물이었다. 안세이 시절에 해방(海防)을 위해 (히데타츠가) 진력한 것은 누구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사나이는 산속에서 성장했으며, 늘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는 식으로 근골을 연마하니, 날이 밝으나 어두우나 무예에 여념이 없었다. 카쯔카이슈, 카이슈전집 제10권”

<かなりの人物であった。その嘉永安政の頃に、海防の為に尽力したことは誰も知っているだろう。この男は山の中で成長して、常に遊猟などをして筋骨を練り、明け暮れ武芸に余念なかった

— 勝海舟、海舟全集 第十巻>

 

일본 근대 해군의 시조라 불리는 카츠카이슈(勝海舟)가 격찬했을 정도로 해방(海防)에 관심이 많았던 히데타츠는 마을 주민들을 모아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서양식 군대를 조직했다. “쉬어”(休め), “우향우”(右向け右), “좌향좌”(左向け左) “우로돌아”(まわれ右)같은 제식훈련 구호는 그가 주도해 서양문헌에서 일본어로 번역해 도입한 것이었다.

히데타츠는 또 일본에서 빵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전시의 휴대식량으로 유럽육군의 병량(兵糧)을 채택하기로 하고 부하인 카시오기타다토시(柏木忠俊かしわぎ ただとし)에게 명해 나가사키의 빵직인(職人)으로부터 제조법을 익히게 한다. 일본인의 주식인 쌀은 병사들이 가지고 다니긴 쉽지만 취사하기에는 번거로워 간편한 전투식량으로는 적절치 않다는 판단에 구운 빵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히데타츠가 최초로 빵을 구운 것으로 알려진 것이 1842년 4월 12일인데, 이를 기려 일본의 빵식보급협회(パン食普及協議会)는 쌀 대신 밀가루도 고르게 먹자면서 1983년부터 4월 12일을 빵의 기념일(パンの記念日)로 지정했다.

 

히데타츠의 구운 빵 레시피는 “구운 뒤 하룻밤에 걸쳐 수분을 빼면 보존이 가능하다”고 돼 있다. 히데타츠가 병량(兵糧)으로 제조하도록 한 구운 빵을 일본인들은 건빵(乾パン)의 시조로 보고 있다.

 

병량(兵糧)목적의 건빵(乾パン)은 전쟁과 함께 본격적으로 보급됐다, 1877년 지금의 큐슈인 사쯔마번의 사이고타카모리(西郷隆盛)가 일으킨 사족반란인 세이난전쟁에서 메이지정부군의 해군에 초기형태의 건빵이 지급됐다. 이때는 크기가 대형으로 하드 비스켓(ハードビスケット),줄여서 하-비스(ハービス)라고도 불렸다.

 

이후 건빵은 일청전쟁에서 본격적으로 보급된다. 중국에서는 마실만한 물이 귀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는 風月堂같은 과자 메이커들이 군의 소요제기에 따라 세이난 전쟁 때보다 훨씬 소형화된 제품을 생산하는데 그 명칭은 밀가루 반죽이 단단해 지도록 여러번 구운 빵이란 의미의 쥬쇼멘포(重焼麺麭じゅうしょうめんぽう)였다.

 

그런데 일청전쟁이후 벌어진 일로전쟁에서는 뤼순공방전등으로 전사자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병사들은 쥬쇼멘포(重焼麺麭)의 쥬쇼(重焼)라는 표현이 중상(重傷)과 발음이 같아 심리적으로 악영향을 받게 된다. 군부는 이를 감안해 명칭을 칸멘포(乾麺麭かんめんぽう)로 바꾼다.

 

칸멘포(乾麺麭)는 계속 개량을 거치게 된다. 1931년에는 독일군의 하드 비스켓을 참고해 더욱 소형화돼 한끼 225그램으로 표준화된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별사탕’이라고 하는 콘페이토(金平糖こんぺいとう)가 들어간다. 콘페이토는 식수가 다소 부족한 환경에서 침샘을 자극해 건빵을 섭취하는데 도움을 주는 용도다. 칸멘포는 타이쇼, 쇼와시대를 거쳐 점차 칸판(乾パン건빵)이란 명칭으로 굳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