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리(サントリー)의 붉은 해 아카다마(赤玉)
일본주류업을 상징하는 산토리의 창업자 토리이신지로(鳥井信治郎)는 1878년 오사카시에서 환전상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학교에서 4년이나 월반했을 만큼 명석했던 그는 13살 때 집을 나와 약재도매상과 그림물감 도매상 종업원을 거쳐20살 때 토리이상점을 개업한다.
자기 사업을 시작한 토리이신지로는 양주(포도주)수입판매를 시작한다. 그는 일본에서 포도주를 만들어 국내에 확산시키고 싶었다. 과거 스페인의 상인 세레스 가에서 직수입한 포도주를 마실 기회가 있어 당시에는 그 맛에 감격해 스페인산 포도주를 수입해 판매했으나 매출 실적은 신통치 않았다. 신맛이 강해 일본인 입맛에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그 메이커의 포트와인을 맛볼 기회가 찾아왔다. 그런데 의외의 맛이었다.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그는 외쳤다 “이거야 일본인에게는 바로 이 단맛이야!” 포트와인으로 자신감을 얻은 신지로는 토리이상점에서 옥로를 寿屋(ことぶきや)洋酒店으로 바꾼다.
신지로는 이 스페인산 와인을 베이스로 해서 고심을 다해 일본인에게 맞는 포도주를 완성한다, 무엇보다도 집착한 것은 그 아름다운 빨간 색이었다, 지금까지의 포도주는 갈색에 가까웠다, 일본인은 색에도 맛을 느낀다. 찬란한 빛깔의 진한 붉은색이면 좋다는 생각에 테스트를 거듭해 탄생한 것이 아름다운 붉은색과 단맛, 그리고 적당한 알콜이 들어간 아카다마(赤玉)포트 와인이다. 붉은 원은 일장기의 히노마루, 태양을 상징한다, 신지로는 이것이야말로 일본인을 위한 와인이라고 생각해 ‘아카다마(赤玉)포트와인’으로 명명했다. 메이지 40년인 1907년 아카다마 포트와인은 이렇게 탄생했다.
아카다마 와인의 발매당시 가격인 한병에 38전으로 쌀 1.5킬로그램이 10전이었을 시절이라 사치품이었다. 그래도 팔려 나갔다. “좋은 물건을 만들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 다만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그 것을 알리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란 경영방침이 주효했다. 좋은 제품을 알리는 신지로의 광고전략은 파격적이었다. 와인병 라벨은 획기적인 가로 글씨로 했다. 제품이 모던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신문광고는 역발상을 했다. 타이쇼9년 어느날 신문에는 어린아이가 세로로 붓으로 낙서를 한 듯한
글씨로 아카다마 포트와인이라 적힌 광고를 냈다. 신문사에는 어린아이가 낙서를 한 것을 광고라고 내보내느냐는 항의가 쇄도해 노이즈 마케팅에 크게 성공했다.
아카다마의 가장 파격적인 광고는 타이쇼 11년에 낸 일본 최초의 누드포스터였다. 전체를 고급스럽게 세피아톤으로 한 이 광고는 여성이 어깨를 드러낸 채 도드라지는 붉은 색의 아카다마 와인이 담긴 잔을 한 손으로 들고 포즈를 취한 것이었다. 광고모델은 마쯔시마에미코(松島栄美子)로 후에 산토리가 만든 아카다마악극좌(赤玉楽劇座)의 프리마돈나로 인기를 모았다. 이 포스터는 독일의 세계포스터전에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아카다마가 발매되기전에는 포도주를 한약처럼 마셨다. 신지로는 그래서 다소 촌스러운 포도주란 명칭을 버리고 아카다마 포트와인이랑 이름을 붙여 본격적인 서양 양주로 팔기 시작해 이후 스테디 셀러가 됐다. 시대에 따라 라벨도 바꾸고 품종도 늘렸다.
아카다마 포트와인으로 성공하 신지로는 위스키 생산에 눈을 돌린다. 1923년 스코틀랜드에서 위스키 증류법을 배운 경험이 있는 타케쯔루마사타카(竹鶴 政孝たけつる まさたか: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라 불리우며 나중에 니카 위스키를 창립)를 초빙해 오사카 시마모토마을의 야마자키에 위스키 증류소(山崎蒸溜所)를 세우고 일본산 위스키 제조를 시작한다. 원래 야마자키는 타케쯔루가 생각한 위스키 생산 최적지는 아니었지만 소비자가 견학할수 있는 곳에 증류소를 지어야 한다는 신지로의 고집에 따라 이 곳에 지어진 것이었다.
신지로의 위스키 사업은 평탄하지는 않았다. 국산 위스키 1호로 내놓은 산토리 화이트 라벨은 피트향이 강해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반품이 잇따랐다. 브랜드를 바꿔 저렴한 산토리 레드라벨도 발매했지만 실패했다. 실패의 와중에 스카치에 집착한 타케쯔루와 신지로의 사고방식의 차이는 더욱 명료해졌다. 타케쯔루는 신지로의 장남인 키치타로에게 위스키제조법도 어느 정도 전수한 만큼 寿屋洋酒店을 떠나 홋카이도의 요이치로 떠난다. 이후 타케쯔루는 요이치에서 산토리와 쌍벽으로 이루는 니카위스키를 크게 일으킨다. 신지로는 타케쯔루를 떠나보내면서 “해보기나 하게”(やってみなはれ)라는 말로 격려한다. 도전정신이 담긴 이 말은 신지로가 남긴 명언으로 남아있다.
이후 신지로는 장남 키치타로를 중심으로 위스키 만들기에 온 힘을 쏟는다, 그리고 1937년 각이 진 병(角瓶)으로 불리는 산토리 위스키 12년을 발매한다. 숙성시킨 야마자키증류소의 원액으로 만든 위스키로 전시체제에서 위스키수입이 중단된 데다 해군지정품으로 선정돼 이번에는 성공을 거둔다.
그런데 1940년 토리이신지로는 장남 키치타로가 33세로 돌연사해 슬픔에 빠진다. 본사 사옥도 공습을 받아 파괴됐다. 그러나 다행히 야마자키공장의 원액은 전화(戰火)에서 무사했다. 전쟁이 끝나자 신지로는 진주한 미군에 판로를 넓히고 오사카의 코(大阪の鼻)로 불린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위스키 제조에 나섰다. 이어 1960년 신지로의 모든 것을 담은 위스키 산토리 로열이 탄생하게 되고 이로부터 2년후 일본 주류사업의 아버지 토리이신지로는 세상을 떠난다.
신지로가 타계한뒤 그의 가업은 양자로 들어온 차남 사지케이조(佐治 敬三さじ けいぞう)가 물려받는다. 케이조는 1963년 맥주 발매를 계기로 사명을 산토리로 바꾼다. 산토리는 태양을 의미하는 Sun과 토리이신지로(鳥井信治郎)의 토리이를 합성한 것이다.
일본 주류업의 상징 산토리는 이후 위스키에서 상당한 맹위를 떨친다. 산토리는 1989년 일본산 위스키 가운데 최고봉이라고 하는 산토리 히비키(響)를 출시한다. ‘히비키’란 명칭은 브람스의 제1번 교향곡의 4악장을 연상시키기 위해 작명된 것인데 등급별로 12년, 17년, 21년 30년이 있고 주령(酒齡)이 표시되지 않은 저패니즈 하모니도 있다. 산토리 히비키는 일본을 넘어 세계최고의 위스키란 명성을 얻어 수요가 폭증하고 있는데 2018년 5월에는 원료부족으로 17년의 판매가 중단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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