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국가백년대계의 표상 오구리타다마사

도보사랑 2018. 12. 25. 18:26

국가백년대계의 표상 오구리타다마사(小栗忠順おぐり ただまさ)

 

1853년 카나가와 우라가에 미국 페리제독이 이끄는 쿠로부네(黒船)가 나타나자 토쿠가와 막부는 군함과 선박의 건조와 구입에 힘을 쏟아 해군의 강화를 도모한다는 방침을 세운다,

 

대량의 군함과 선박을 보유하는 것은 그 수리와 기자재 제조를 위한 시설도 필요했다. 이에 막부의 재정과 막부직할령의 지배를 총괄하는 직책인 칸죠부교(勘定奉行かんじょうぶぎょう)였던 오구리타다마사(小栗忠順おぐり・ただまさ)가 조선소 건설계획을 입안했다. 많은 중신들이 막부의 재정이 넉넉지 않다는 이유로 건설에 반대했지만 그는 간곡히 조선소 건설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막부정권은 유한(有限)하지만 일본이라는 나라는 무한(無限)하다. 막부가 한 일이 장기적으로 일본을 위한 것이라면 이는 토쿠가와가(家)의 명예이자 국익이 아닌가! (幕府の運命に限りあるとも、日本の運命には限りがない。幕府のしたことが長く日本のためになるのであれば、徳川家の名誉ではないか。国の利益ではないか)라고 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조선소의 건설을 극력주장 한 이유는 1860년 카쯔카이슈(勝海舟), 후쿠자와유키치(福澤諭吉)등과 함께 일미우호통상조약 비준서교환을 위해 미국에 건너가 워싱턴DC의 해군공창(工廠)을 견학하고 크게 느낀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とくがわ よしのぶ)는 오구리의 진언을 받아들여 요코스카(横須賀)조선소 건설에 착수한다. 막부는 1864년 조선소 건설 타당성을 당시 프랑스 공사에게 의뢰했고 요코스카가 조선소건설에 최적지라는 결론이 나자 1865년부터 24만6천 평방미터의 부지에 4년간 240만 달러가 소요되는 초대형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이런 가운데 1868년 사쯔마쵸슈 연합의 신정부군과 이에 맞서는 다른 번(藩)들과의 내전인 보신전쟁(戊辰戦争)이 발발한다. 신정부군이 조선소를 접수하지만 메이지 시대에도 공사는 계속돼 1871년 요코스카조선소가 완공된다.

 

하지만 조선소 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한 오구리는 조선소 완공을 보지 못하고 보신전쟁때 신정부군에 체포돼 참수된다. 대정봉환이후 토쿠가와요시노부는 결국 신정부에 순순히 투항하자는 공순(恭順きょうじゅん)의 입장을 표명하게 되는데 이에 앞서 오구리는 철저 항전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오구리는 처형장에서 “나는 이 세상에 미련이 없지만 모친과 처 등 부녀자에게는 관용을 부탁한다”(私はこの世に未練はないが、母や妻など婦女子には寛容にお願いしたい)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당시 오구리의 부인은 임신중이었는데 곧 소노코(園子そのこ)란 딸이 태어난다. 소노코는 오쿠마시게노부(大隈 重信おおくま しげのぶ)가 거둬 키우고 명문가에 출가해 오구리가는 이후 다시 일어나게 된다.

 

오구리가 역사적으로 인정받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일로해전의 승리였다. 세계 해전사에 남는 쓰시마해전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크게 격파한 도고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원수는 1912년 오구리의 유족을 자택에 초청해 그 업적을 크게 칭송한다. 해전의 승리는 오구리가 만든 요코스카조선소 덕분이라는 것이었다. 역사소설가인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郎)도 이 점을 높이 사 오구리를 메이지의 아버지라(明治の父)라 평가했다.

 

일로전쟁에서 승리한 또 하나의 이유는 1902년의 일영동맹덕분이기도 하다. 영국이 고립정책을 버리고 일본과 동맹을 맺기로 결단을 내린 것은 중국에서의 영국의 권익과 조선, 중국에서의 일본의 이익이 일치했다는 것과 함께, 1900년 의화단 사건 당시 8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중국에 출병한 일본군의 규율이 높았다는 점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또 군함을 수리할 수 있는 높은 기술력과 도크를 보유한 요코스카조선소의 존재 역시 동맹에 기여했다. 요코스카조선소는 해군성관할이 되면서 요코스카해군조선소, 요코스카해군공창으로 이름이 바뀌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전함 무쯔(陸奥むつ)와 항공모함 시나노(信濃しなの)등 여러 군함도 여기서 건조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요코스카는 미군에 접수됐고 메이지시대 완성된 3기의 드라이도크는 미해군의 선박수리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요코스카(横須賀)에는 주일미해군사령부가 있으며 제7함대의 본거지로 항모 조지워싱턴호의 모항이기도 하다.

 

막부는 유한하다는 오구리의 말대로 그는 메이지유신직후 바뀐 정권에 의해 처형됐다. 하지만 정권과 상관없이 국가백년대계를 위해 조선소 건설을 추진한 그의 선견지명은 메이지 시절에 철저히 인정받았다. 그가 남긴 근대화의 유산 요코스카는 오늘날 일본의 국익에 중추적인 미일동맹의 상징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