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피우스즈키 형제와 일본의 100년 인연

도보사랑 2018. 12. 25. 20:29

피우스즈키(Piłsudski)형제와 일본의 100년 인연.

일본 홋카이도와 사할린(樺太일본명 카라후토), 쿠릴 열도 등에 남아 있는 일본의 소수민족 아이누인을 촬영한 오래된 흑백사진들은 사실 한 폴란드인이 촬영해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의 이름은 브로니스와프 피우스즈키(Bronisław Piłsudski)다. 그는 1866년 현재의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동생이 폴란드 공화국의 초대 국가원수가 된 유제프 피우스즈키다. 1886년 브로니스와프 피우스츠크는 러시아 상뜨 뻬쩨르부르크 대학 법대에 진학했지만 이듬해 알렉산드르 3새 암살 계획에 연루돼 시베리아보다 더 먼 오지인 사할린 유형에 처해진다.

 

사할린에서 처음에는 목수일에 배정됐지만, 고학력자라서 원주민과 문화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다 알렉산드르 3세 사후 사면돼 형기를 마치지만 그 동안 해왔던 연구를 그만 둘 수 없어, 북부 사할린 섬에서 민속학 연구에 계속 몰두하고 아이누 연구에 매달린다. 그리고 1902년에는 카메라와 축음기로 남사할린에 가서 아이누에 대한 자료수집에 나선다. 그러는 사이 남사할린의 아이누족 촌장의 사촌여동생과 결혼까지 하게 되고 1남1녀를 둔다. 가족이 생기다 보니 아이누인들에 대한 애착이 더 생겨 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겠다는 열정으로 남사할린에 문자해독 학교를 열게 된다.

 

사할린의 아이누족 교육자로 유명한 카라후토아이누총화(樺太アイヌ叢話)를 남긴 센토쿠타로지(千徳太郎治)는 브로니스와프로부터 문자해독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배우기도 하고 교편을 잡는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교육 사업은 일로전쟁에 의해 흔들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일로전쟁이전에 러시아와 일본은 사할린 섬에 분명한 경계가 없었다.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은 북위 50도 이남을 일본령으로 한다. 일로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1905년에 브로니스와프는 가족들을 데리고 조국 폴란드에 돌아가려 하나 주변의 반대에 부딪혀 임신중인 아내, 아들과 결별하고 혼자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하기 전 그는 토쿄에 들러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러시아문학을 일본에 번역 소개한 문인 후타바테이시메이(二葉亭四迷)등과 만나 짜르에 대항하는 러시아인 난민의 조직화와 차별받는 아이누 인들을 일본정부가 도와야 한다고 역설한다. 후타바테이시메이는 브로니스와프가 아이누를 돕기 위해 뭔가를 해야하며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라고 흥분된 어조로 말할 때 순수함을 느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사할린을 떠난 그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령의 크라코프에 정착하게 되는데 어느새 사할린에 두고 온 아이누인 부인과 아들을 잊고 어릴 적 친구였던 마리아 잘노프스카와 재회해 결혼한다. 이미 남편이 있는 여성을 취해 윤리도 법도 없이 결혼한 것이었는데 몇 년 안가 마리아가 악성종양이 생기는 등 건강이 악화돼 파경을 맞게 된다. 마리아는 결국 원래 남편에게 되돌아가게 되는데 이런 파란만장한 개인사의 와중에서도 브로니스와프는 오랜 세월 정렬을 쏟아온 아이누 언어, 민속학 연구자료를 완성한다.

 

나중에 폴란드 공화국의 초대 국가원수가 된 동생 유제프 피우스즈키(Józef Piłsudski)도 일본과 인연이 깊다. 1904년에 폴란드 독립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토쿄를 방문한다. 이 때가 일로전쟁 발발 직후였는데 반러시아 투쟁을 벌이고 있던 그는 러시아에서의 파괴활동과 일본군에 협력하는 폴란드인 부대편성까지 제안했다. 이 제안에 감명 받은 아까시모토지로(明石元二郎)등은 피우스즈키에게 무기와 탄약 구입자금을 지원하고 그 대신 러시아군의 동향이나 사회정세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는다. 아카시모토지로는 러시아 혁명을 배후에서 사주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이에 고무된 유제프 피우스즈키는 군대를 창설하고 독립운동을 강화한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의 틈을 타 1918년 폴란드 독립을 주장하게 되고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이를 추인함으로서 폴란드는123년만에 독립을 쟁취한다.

 

피우스즈키 형제들은 그러나 폴란드 국가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정견을 달리했다. 유제프는 폴란드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다민족국가여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반면 브로니스와프는 “폴란드는 폴란드어를 말하고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단일민족국가여야 한다”고 했다. 소수민족 아이누를 연구하고 구제를 외친 브로니스와프가 왜 단일민족을 주장했는지는 알 수 없는데, 그는 1918년 제1차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파리 센강 퐁뇌프부근에 투신해 생을 마친다.

 

다만 브로니스와프가 아이누족의 연구에 평생을 바친 것은 유럽에서 독일과 프로이센, 러시아 사이에서 농락당하며 차별받았던 조국 폴란드의 모습이 아이누인의 처지와 비슷해서였을것이라고 추론만 할 뿐이다.

 

그가 남긴 대량의 사진자료와 음성자료는 인류학적으로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1980년대까지 브로니스와프의 딸은 일본 홋카이도에 살고 있었지만 유년기를 혼혈아라는 놀림을 받으며 지낸 마음의 상처가 있었던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18년은 브로니스와프 사후 100주년인 동시에 폴란드 독립 100주년이기도 하다. 아이누 여인과 결혼하고 자손을 남긴 브로니스와프 그리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 일본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었던 폴란드 초대 국가원수인 유제프, 이 두 명의 피우스즈키 형제는 일본-폴란드 교류사의 상징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심포지움과 영화상영, 전시회, 추모행사 등 양국에서 열리는 행사가 아주 다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