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노코로모 (緋の衣ひのころも), 사무라이들이 사과나무를 심은 까닭은?
일본 토호쿠(東北とうほく)지방 특히 홋카이도 바로 아래 아오모리, 후쿠시마등은 사과의 주산지다. 특히 아오모리는 예전에 한국의 농업관련부서에서 사과농사와 관련해 연수를 갔던 곳이다. 그런데 토호쿠 지방외에 홋카이도(北海道)의 요이치(余市)라는 곳도 일본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사과 생산지다. 아사히 맥주에서 생산하는 애플와인이 여기서 생산된 사과로 만든다.
일본의 사과는 메이지 유신 직후 미국에서 도입된 것인데 그 보급은 당시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본의 마지막 내전이라 할 수 있는 보신전쟁(戊辰戦争)에서 패배한 사무라이들이 고향에서 쫓겨나 낯선 곳으로 유배돼 경작해 보급한 과일이 사과다.
메이지유신 원년인 1868년, 보신전쟁(戊辰戦争)에서 정부군과 싸우던 아이즈번(会津藩)은 약 한달 동안 와카마쓰성에서 농성을 벌이다 견디지 못하고 백기를 내걸었다.
역적이 된 아이즈번(현재의 후쿠시마현 서쪽)의 무사와 가족 1만 7천여명은 당시로서는 불모지였던 아오모리현으로 강제 이주했고 다이묘의 핵심 가신들은 토쿄로 가서 근신을 하게 된다.
토쿄에서 병부성(兵部省)관리하에 근신처분을 받은 아이즈번사(会津藩士)의 103가구 333명은
현재의 홋카이도인 에조찌(蝦夷地)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고 토쿄 시나가와에서 배편으로 11일간 항해해 홋카이도에 도착한다.
정부군에 반항했던 이들을 징벌차원에서 멀리 보낸다는 의미와 함께 인구가 희박한 북방영토를 개척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는 목적이었다. 원래 이들은 카라후토(樺太からふと)즉, 사할린으로 보내질 예정이었지만 북방영토 개척관리인 개척사(開拓使かいたくし)에게 홋카이도 요이치(余市)에 우선 들러 열심히 일을 하겠다는 서약서를 내고 1871년에 정착하게 된다.
현재 홋카이도 요이치는 바다고 가깝고 강도 있어 지리적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허허벌판의 불모지였다. 아이즈번사들은 우리가 훌륭하게 이곳을 개척해야 주군의 죄가 가벼워지고 그것이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결심했다.
이때 메이지 정부의 개척사(開拓使かいたくし)는 미국에서 도입돼 토쿄 아오야마칸엔(青山官園)에서 보관하던 사과나무 묘목들을 홋카이도 나나에카이곤죠(七飯開墾場(ななえかいこんじょう)로 옮겨 번식한 뒤 1875년 아이즈번사들에게 배포한다.
사무라이들은 재배 방법도 모른 채, 칼 대신 농기구를 들고 과일재배에 도전한다. 요이치(余市)에는 5백 그루의 사과묘목이 각 가정에 배포된다. 그러나 사과농사가 처음부터 잘 될 리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과나무들이 말라비틀어지고 고사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결실을 맺은 이가 있었다. 사과나무를 심은 지 4년 후인 1879년 아이즈번사인 아카바겐파치(赤羽源八)씨의 마당에 심은 나무에서 6개의 튼실한 사과를 수확했다.
원래 19호로 불린 이 사과 품종은 ‘히노코로모(緋の衣ひのころも)’로 명명됐다. 히노코로모는 ‘주홍색의 옷’이란 의미인데 아이즈번의 영욕(榮辱)을 상징한다.
히노코로모(緋の衣)는 에도말기 코메이천황(孝明天皇こうめいてんのう)이 京都守護(きょうとしゅご)로 근무했던 아이즈번주 마쯔다이라카타모리(松平容保まつだいら かたもり)의 노고를 치하해 하사한 주홍빛 진바오리(陣羽織)를 이르는 단어로 아이즈번이 잘 나갈 때의 영광의 상징이다. 또 보신전쟁에서 패전해 항복식장에 깔린 붉은 피눈물의 양탄자도 의미한다.
아이즈번에 항복하자 번사들은 이 치욕의 양탄자를 잘게 조각내 비운의 역사를 기억하자면서 보관하고 있었다. 아이즈번사들이 척박한 북쪽땅에서 재배에 성공한 붉은 사과에 붙인 히노코로모(緋の衣)라는 명칭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히노코로모(緋の衣ひのころも)는 코교쿠(紅玉こうぎょく), 콧코 (国光こっこう)와 더불어 요이치의 대표적 사과로 명성을 얻게 된다. 히노코로모는 아이즈 사무라이가 재배한 맛좋은 사과라는 명성을 얻어 1897년쯤에는 토쿄와 러시아로도 판로를 확장해 고가로 판매된다.
하지만 사무라이의 사과 히노코로모는 다른 개량종 사과가 속속 등장하자 서서히 사라지게 되고 홋카이도의 요시다관광농원이란 곳에서 간신히 품종을 지켜간다. 이런 가운데 옛 아이즈의 선조들이 히노코로모란 사과의 역사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감명 받은 후쿠시마현지사가 요이치의 사과농과 함께 히노코로모 복원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인다. 이후 히노코로모는 후쿠시마와 아오모리 등 토호쿠 지역 여러 곳에서 종자 번식을 하게 되고 이를 다시 홋카이도에 옮겨 심고 있다.
옛 주군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떠나온 고향의 명예를 위해 척박한 환경에서 재배한 붉은 사과 히노코로모(緋の衣ひのころも)는 막부의 몰락과 메이지 신정부의 시작이라는 역사도 농축돼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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