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폴란드의 일본문화 매니아 아시엔스키

도보사랑 2018. 12. 25. 20:33

폴란드의 일본문화 매니아, 펠릭스 망가 야시엔스키(Feliks "Manggha" Jasieński)

 

일본역사나 문화관련 서적에 흔히 등장하는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를 묘사한 그림은 카쯔시카 호쿠사이 (葛飾 北斎 かつしか ほくさい)가 그린 것이다. 카쯔시카 호쿠사이와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 広重 うたがわ ひろしげ)는 일본의 대표적인 우키요에(浮世繪)화가다.

 

이 사람들 그림을 보면 화가 이름은 몰라도 어디서 한번쯤은 본 듯한 친숙한 그림이다. 1880년대 마네와 고흐에게도 큰 영향을 준 세계적으로도 아주 유명한 일본화가다.

 

마네와 고흐외에도 이 작품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인생을 일본예술품 수집에 헌신한 폴란드 화가 겸 미술품 수집가가 있었다. 펠릭스 망가 야시엔스키(Feliks "Manggha" Jasieński)라는 이다. 어찌나 일본문화를 사랑했는지 필명을 ‘망가(漫畫)’라고 했다.

 

야시엔시키는 1861년 7월 바르샤바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다. 당시 폴란드는 강대국들에 의해 삼분할된 상태였다. 포즈난 대공국은 프로이센령으로 독일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바르샤바가 속한 폴란드 입헌왕국은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폴란드어가 금지됐고 민족주의 봉기가 탄압을 받았다. 크라코프 대공국은 오스트리아령 이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그나마 자유로운 편이었다.

 

외세의 영향권에 있었던 폴란드의 예술가들은 창작의 자유를 찾아 해외로 떠돌았다. 야시엔스키도 중등교육을 받은뒤 조국을 떠났고 프랑스 파리에서 호쿠사이와 히로시게의 환상적인 우키요에를 접했다.

 

야시엔스키는 호쿠사이와 히로시게의 작품을 보고 저서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들 두 예술가들은 마치 탁월한 예술가에 의해, 그리고 예술가를 위해 존재한 것 같은 나라의 멋진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그들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예술과 자연을 재현하는 방법을 유럽의 예술가들이 알게 함으로서 19세기 유럽 풍경화에 혁명을 가져왔다.

아름다운 나라에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예술도 멋지다.“

1880년대 중반 파리 예술계에서는 일본에 대한 취미를 예술에서 살려 내고자 하는 미술사조인 자포니즘(japonisme)이 큰 유행을 탔다. 일본의 미술품 수집가인 하야시 타다사마(林 忠正はやし ただまさ)가 루이 곤스(louis gones)가 함께 도록인 ‘일본미술’을 간행했다. 마네, 고흐도 우키요에의 화풍을 녹인 작품들을 선보여 각광을 받았다

 

야시엔스키는 서구회화에서는 없었던 우키요에의 구도와 기법, 배경의 여백. 서정적인 내용에 매료됐다.

 

그가 우키요에에 감명 받았을 때, 조국 폴란드의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폴란드 입헌왕국은 러시아화가 더 심화되고 프로이센이 점령한 포즈난대공국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빠른 시기에 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생각에 폴란드인은 문화에서의 애국에 집중하게 된다. 자치가 그나마 허용됐던 오스크리아령 크라코프에서는 얀 마티코등에 의한 애국적 역사화(歷史畵)가 유행했다.

 

야시엔스키는 우키요에로 폴란드 예술에 자극을 줘서 국가예술양식의 상상을 이끌기 위해 일본문화를 폴란드에 소개하기로 한다. 그동안 파리에서 준비했었던 책들을 바르샤바에서 출판한다. 러시아어는 싫었고 폴란드어는 금지돼 프랑스어로 출판했으니 바르샤바에서는 팔릴 리가 없었고 대신 프랑스에서 팔렸다. 이때부터 그는 망가(漫畫)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그는 1901년 말 거점을 바르샤바에서 크라코프로 옮겨 폴란드를 위해 미술작품을 수집하기로 한다. 자신이 모은 컬렉션을 전시한 곳을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 개방해 일본예술을 접하도록 한다. 그리고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폴란드 공화국이 성립되자 야시엔스키는 1920년에 6천점의 작품과 4천5백점의 목판화를 크라코프 국립박물관에 이관하고 1929년에 타계한다.

 

그러나 야시엔스키 컬렉션은 폴란드에 닥친 비극으로 무사하지는 못했다. 1939년 나치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고 1941년에는 독일이 독소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으로 밀고 들어가자 독일에 편입된다. 이 때 예술을 좋아했던 히틀러가 야시엔스키 컬렉션 가운데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카쯔시카 호쿠사이의 후가쿠산쥬롯케이(富嶽三十六景ふがくさんじゅうろっけい)의 일부를 포함해 모두 515점을 빼앗는다.

 

나치독일은 1944년 크라코프에서 나름대로 일본미술전람회를 열기도 한다. 이때 이 작품들이 너무 보고 싶어 레지스탕스라는 신분을 감추고 두근두근하는 심정으로 전람회에 온 소년이 있었다. 이 소년은 방대한 일본미술 컬렉션을 접하고 펠릭스 야시엔스키처럼 예술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 소년이 바로 폴란드 영화계의 거장이 된 안제이 와이다(Andrzej Wajda)라는 인물이다. 2016년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안제이 와이다는 불모지였던 폴란드 영화의 수준을 세계적으로 끌어올린 이로 제2차 세계대전이후 철의 장막이 드리워진 폴란드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를 그린 ‘재와 다이아몬드’ 정부에 저항하는 노동조합의 승리를 담은 ‘철의 사나이’ 만년에는 세계대전 중 소련군이 폴란드 군 2만여명을 학살한 사건을 고발한 ‘카틴의 숲’등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