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현대중국사의 미스테리: 저우언라이는 동성애자

도보사랑 2019. 1. 25. 08:00

현대중국사의 미스테리 :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동성애자(同性愛者)였나.

 

중국현대사의 거인으로 핸섬한 외모에 죽어서도 유골을 남기지 않았다는 저우언라이(周恩來)에 대한 평판은 긍정적인 것 일색이다. 한국에서도 중국현대사를 안다는 이들조차도 그의 이런 모습에만 주목한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한국인들도 그의 핸섬한 이미지 때문인지 보편적으로 알려진 그의 긍정적인 면만 보고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사실 대중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2015년 저우언라이의 감춰진 모습을 합리적인 추론으로 유추해낸 ‘저우언라이의 비밀정감세계’(周恩来的秘密情感世界)라는 흥미로운 책이 출간됐다. 중국에서는 금서인 이 책은 한국에서는 출판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았지만 홍콩, 타이완의 언론은 물론이고 뉴욕타임즈, BBC가 관심을 가지고 내용을 보도했다.

 

‘저우언라이가 사실은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상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 책의 저자는 홍콩의 정치논평 매체인 개방(開放)기자였던 초이윙무이(蔡咏梅), 이 책을 낸 신세기출판사는 천안문사태 당시 학생들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 실각된 자오즈양 총리의 비서 바오통의 아들 바오푸가 설립자다.

 

초이윙무이는 일찍부터 발현된 저우언라이의 독특한 성적취향에 주목했다. 일찍이 난카이학당(南開學堂)에 재학했을 때 저우는 연극에 출연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핸섬한 이목구비의 저우는 여성으로 분장해 무대에 오르곤 했다. 당시 2살 연하의 남성 후배인 리푸징(李福景)과 각별한 관계였다. 남성간의 우정을 넘어선 요즘식으로 말하면 특이한 브로맨스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우언라이는 난카이에서 리푸징과 반년이상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다

 

1918년말 20세였던 저우언라이는 톈진을 떠나 일본으로 가면서 홍콩으로 떠나는 리푸징과 눈물의 이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에 머무르면서 가슴속에 응어리진 상처를 일기에 쓴다.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정(情)이란 것에 물들었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이라고나 할까.” “마음의 상처가 두 달이 됐다, 달이 뜨는 밤, 바람 부는 새벽, 비가 창을 두드리고 꽃이 피어날 때 내 마음이 상념은 깊어진다. 나의 ‘혜’동생(慧弟)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다.

 

여기서 ‘혜’동생(慧弟)은 리푸징의 자(字)인 신혜(新慧)를 지칭한 것인데 이 일기는 1998년 저우언라이 탄신백주년을 기해 공개됐는데 중국당국은 저우언라이의 감성이 절절하게 표현된 구절을 시커먼 잉크로 덧칠했다.

 

저우언라이와 리징푸는 서로 헤어져 있기가 괴로웠는지 1921년에 영국에서 해후한다. 리푸징은 런던의 맨체스터 대학에 입학했지만 저우언라이는 런던의 생활비가 너무 비싸 견디지 못하고 일하면서 공부(勤工儉學)하겠다면서 프랑스로 건너간다.

 

프랑스에서 저우언라이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소련의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이 제공하는 생활비를 받는다. 이 때 리징푸와는 한동안 못 본 상태여서 저우는 멘털붕괴(情緒崩潰)상태에 빠진다. 그러다가 프랑스에서 느닷없이 1923년 광저우에 머물던 덩잉차오(鄧穎超)에게 우편엽서로 구혼한다. 덩잉차오와는 5년 동안 못 본 상태였는데 그렇다고 예전에 연애관계도 아니었다. 중학시절 학생운동단체인 각오사(覺悟社)에서 만나 알고 지내던 정도였다.

 

중국공산당사 전문가인 가오원쳰(高文謙)는 2007년에 출판한 만년의 저우언라이(晚年周恩来)라는 저서에서 광저우에서 저우와 덩의 해후를 결혼할 사이라고 보기에는 특이했다고 밝혔다.

 

“저우는 덩잉차오가 광저우에 있다는 것을 알고도 찾아가지 않았다. 결국 덩잉차오는 저우가 회의중이던 광동성 총공회로 찾아갔다. 공회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는데 덩이 방으로 들어오자 슬쩍 미소만 지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끝나자 미래의 부인이 될 덩잉차오에게 저우는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고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중국공산당은 덩잉차오에 대한 이 같은 저우언라이의 냉담한 태도를 두고 당을 우선시하는 사심 없는 자세라고 치켜 올리지만 상식적으로는 자연스럽지 않다. 초이윙무이(蔡詠梅)는 저우언라이 부부를 서로 손님처럼 공경(相敬如賓)하는 극도로 예의를 차린 관계이면서도 늘 독수공방(空殼一般)상태였다고 평가한다. 사실 덩잉차오의 외모는 미인이 아니며 공산혁명에 투신한 저우언라이가 그녀에게 애정을 표현한 경우도 발견할 수가 없다.

 

1925년에 결혼한 저우언라이 부부는 슬하에 자식도 없었다. 덩잉차오는 저우를 남자혁명동지로 여겼던 것 같다.

 

홍콩과 타이완의 여러 매체에 따르면, 저우언라이의 성적취향은 마오저동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된다. 저우언라이가 부인 덩잉차오에게 극진하게 예우를 갖춘 것(相敬如賓)처럼 마오에게도 굴종하는 모습(卑躬屈膝)으로 대했으며 불이익을 받더라도 감내(逆來順受)했다. 1930년대 중기 이전에 저우는 공산당내 서열이 마오보다도 높았지만 그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에서 동성애는 반사회주의적인 죄악이며 자산계급의 생활방식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동성애자의 면모가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도 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에서 거의 성인으로 추앙될 정도의 인물이다. 그가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거론하는 자체부터 금기다.

 

이 때문이지는 확실치 않지만 2015년 말 홍콩에서 ‘저우언라이의 비밀정감세계’(周恩来的秘密情感世界)가 출판되자 중국에서는 2016년 1월초 공산당원과 청소년에게 저우언라이의 공작풍조(作风)와 품덕(品德)을 설명하는 저우언라이문답집(周恩来答问录)이 관주도로 출간됐다.

 

그런가 하면 2016년 1월에는 홍콩의 연예인 왕시(王喜)가 페이스북에 저우언라이가 동성애자일수도 있다는 내용의 포스팅을 올렸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중국관영 CCTV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대단한 도전’(了不起的挑战)에 출연했는데 정작 방송에서는 그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된채 나갔다. 당시 홍콩과 타이완의 연예매체들은 중국의 정치적 금기를 건드린 연예인이 방송화면에서 모자이크 처리됐다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반면 중국측은 왕시(王喜)가 홍콩독립분자라서 모자이크 처리했을 뿐이라는 입장이었다.

 

보통 한자 문화권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해서 풍채(身)를 가장 먼저 치지만 그 뒤에 숨겨진 진면목은 보이지 않도록 가리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