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노량 - 죽음의 바다

도보사랑 2023. 12. 25. 00:06

노량 - 죽음의 바다

8년 전인 2015년 5월말, 남쪽지역에선 봄을 지나 여름의 문턱에 들어갈 무렵 난 남해 창선에서 노량까지 걸었다.

8년이 지나 내가 걸었던 그 바닷가 상상의 길이 영화로 나왔다. '노량 - 죽음의 바다'라는 영화다. 명량, 한산에 이어 이충무공의 마지막 삶을 그린 영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순천왜성과 남해 창선, 노량바다, 고니시와 시마즈, 진린과 등자룡,
이순신과 셋째 아들 면이 영화의 전부다.  

영화의 첫 장면.
1598. 8월 히데요시는 죽으면서 '인간의 삶은 풀잎의 이슬과 같다'며  조선에서의 철병을 지시한다. 그 자리엔  5살의 그의 아들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있었다.(히데요시가 마지막 숨을 고르며 이에야스에게 '네 이놈 이에야스..'라고 외친 말엔 57살에 얻은 늦둥이 아들 히데요리의 운명이 얹혀있었다). 순천왜성에 갇힌 고니시는 명 제독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며 퇴로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창선에 주둔한 시마즈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아산에 있던 충무공의 셋째 아들 면은 고니시가 보낸 왜군의 칼에 쓰러진다. 싸움을 피하고싶은 진린과 적을 두고 명군은 그냥 있을 수는 없다는 등자룡. 조선백성을 도륙한 의롭지않은 전쟁에서 적을 섬멸하지 않고선 이 전쟁을 끝낼 수는 없다는 이순신..

노량해전에서 시마즈 군 22,000여 명, 전선 500여 척 중 그  절반이 전사 또는 침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고니시와 시마즈는 큐슈 구마모토와 사쓰마(가고시마) 지역을 영지로 하사받았고, 가토는 구마모토가 고향으로 모두 큐슈와 연관있는 왜장들이다.

가토와 고니시는 조선출병의 선봉장이었으나 철군당시엔 왜성(왜군은 7년간 주로 조선 해안가까이 약 30여 개의 성을 쌓았다)에 갇혀서 고전했다. 가토는 울산왜성, 고니시는 순천왜성에서.. 시마즈는 칠천량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남해 창선에 왜선을 주둔시키면서 인근 사천 선진리성을 쌓은 인물이다. 철군후엔 가토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복종했고, 고니시와 시마즈는 이에야스에 반기를 들었다.(철군후 세 인물의 행적에 대해선 세키가하라 전투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이순신, 그를 알기위한 영화가 3편이나 나왔다. 예전엔 TV에서 '불멸의 이순신'이란 드라마가 장기간 방영되었다. 그럼에도 그를 온전히 알기엔 많은 것이 부족하다. 그가 걸었던 역사의 행로를 찾아 직접 걸으면서 그의 체취를 맡고 상상을 해보는 것이 유일한 앎의 길이다. '이순신 백의종군길'을 걸어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그의 치열한 기록, 난중일기를 읽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진주에서 지휘관을 할 때 백의종군길 한 장소였던 합천 삼가, 하동 옥종과 진주 수곡을 찾은 적이 있다. 우리 곁에 늘 머무르는 성웅의 길..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8년 전 그의 마지막 죽음의 바다길을 걸은 후 남긴 그 때의 글을 다시 읽어 본다.

"적으로부터 죽음을 맞이하고서야 편하고 고통을 멈출 수 있었던 인간, 이순신장군의 마지막 해전지 노량에 서니 그분의 치열하고 숭고했던 삶이 되살아난다.

남해대교 아래 노량이 삶의 마지막 자리인 것을 알았기에, 아니 선택했기에 고니시의 안전철수 제의를 거절하고 고니시군과 이들의 원군, 양쪽의 적을 맞이하여 전투를 지휘했다. 근처 관음포엔 충무공이 전사하신 후 시신이 잠시 가매장된 이락사가 있다.

이른 새벽에 남해 창선에서 걷기 시작하여 창선대교를 지나 설천마을~남해대교~구노량마을~금남에 이르는 노량해안로를 걸은 것은 장군이 마지막으로 선택했던 운명의 바다에서 그의 치열했던 삶을 상상해보기 위함이었다"

계묘년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영화 '노량'을 관람하시고자 하는 분들에게 작은 참고가 되었음 좋겠다.

20231220, Song s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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