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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신념(2018. 6. 6, 수)

도보사랑 2018. 6. 8. 17:16


지도자의 신념(2018. 6. 6, 수)

 

현충일이다. 나라를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호국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추모차 사관학교 동기생들과 전쟁기념관을 방문하였다. 영전에 헌화하고 고개를 숙였다. 지나간 발자취를 더듬어보고자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전장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무명용사들의 혼과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유골 발굴과 기록에 정성을 쏟고있는 전쟁기념관의 모습이다.

 

War memorial,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기념한다... 북의 남침과 응전, 당시 전쟁수행을 지도했던 지도부의 심정과 이후 국가재건, 나라의 미래에대한 생각들은 어떠했을까?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을 앞두고 미국정부와 싸웠다. 한국 정치외교사에서 미국에 대항해 싸워 승리한 유일한 지도자 일것이다. 1952년~53년 전쟁을 멈추고자했던 미국정부는 당시 정전을 반대하고 한국군 단독북진론을 주장했던 이승만을 제거하기위해 상비계획(Operation Everready)까지 검토했었다. 이승만의 자유진영에의한 통일의지는 역사에대한 혜안과 미국을 잘알고있는 지식에 기인한다. 이승만의 머리속엔 두번의 미국의 한반도 포기행위(카스라테프트, 얄타회담)가 자리잡고 있었을것이다. 북의 남침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과의 싸움으로 규정하고 미국과 유엔을 끌여드린 통찰과 혜안에 그저 놀랄뿐이다.

 

이승만은 미군정후 1949.6월 미군이 철수할땐 한국방위를 위해 미국의 남한 안전보장 보증과 태평양 동맹을 요구한바있다. 52~53년 정전이 진행될 당시엔 수많은 국민들을 동원하여 휴전협정반대 궐기대회를 유도하여 미국 정부를 압박했다. 53. 6.18일 27,000여명에 이르는 반공포로 석방은 마지막 승부수였다. 반공포로 석방 소식을 접한 처칠이 마시던 찻잔을 떨어뜨릴 정도로 이승만의 정치외교력과 국제관계를 보는 통찰, 강대국에 대응하는 능력은 뛰어났다. 미국정부가 굴복하여 이승만과 방위문제를 협의하기위해 로버트슨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를 파견했을때 이승만은 "당신은 물에빠진 사람에게 내민손과 같습니다. 부디 우리가 물에서 나갈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늘날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부강한 자유대한민국은 한미동맹의 근간이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토대위에서 이룩되었다.

 

조선의 문을 열기위해 평안도 용강도에 나타난 美 제너럴 셔만호, 강화도에서 벌어진 신미양요, 1882년 조미통상조약, 일제하 광복군의 한반도 진군작전을 도왔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해방과 미군정, 한국전쟁과 정전협정, 부강한 자유대한민국과 한미동맹의 역사다.

 

역사는 반복된다. 지도자의 역사와 국제관계에대한 혜안, 신념, 힘으로 체제를 유지하고 국민의 안녕과 질서가 회복되기를 기대한다.